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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겟세마네에 이르신 예수님 (막 14:32-34)

V-maker 2017. 2. 7. 22:28

겟세마네에 이르신 예수님 (막 14:32-34)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다락방을 나오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서, 이미 다락방을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열한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루살렘을 벗어나 감람 산으로 가셨습니다.

감람 산이라는 명칭은 그 곳에 감람나무, 곧 올리브나무가 많이 서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그 곳에는 감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감람 산으로 가신 것은 그 곳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 그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며, 또한 베드로가 그 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오직 기도하면서 예수님만을 힘 있게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을 과신하면서,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 날 밤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베드로도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그들은 회복이 되고,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기도 사이마다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시는 도중에도, 제자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기도하시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서론적인 내용인 셈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풍성하게 받기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막14: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요18:1 말씀과 같이, 겟세마네는 감람 산에 있는 한 동산이었습니다. 그 뜻은 “기름을 짜는 틀”입니다. 그 곳에 감람유를 짜는 틀이 있어서 겟세마네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타셨던 나귀 새끼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셨던 다락방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 모두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의 섬김도 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요18:2 말씀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가끔 제자들과 함께 모이시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유숙하실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한 집에서 많은 인원이 계속해서 유숙하기란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어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가지 않으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기도도 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가룟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다락방으로 가실 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사전에 그 장소를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자신이 계신 곳을 숨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곧바로 예수님은 그 곳에서 잡히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과 함께 가룟 유다가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봅니다. 오늘 본문 중간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때의 제자들은 열한 명의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뺀 나머지 여덟 명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끄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동안, 아무에게서도 방해를 받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요18:1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겟세마네 동산이 울타리로 둘러있었고, 또한 동산을 출입하는 문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여덟 명의 제자들에게 동산 입구를 지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잡히셔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을 이기는 길이 기도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6:13 말씀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함을 받으려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변화 산 아래에서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막9:29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시험을 이기는 길은 기도에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곧 위기의 순간이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자를 치시면, 양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겟세마네 동산 입구에 앉아 있는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그들도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입을 벙긋했다는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 안에서는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상실되거나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면 시험에 들어 악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또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대로, 늘 기도하기에 힘씁시다. 그리해서 날마다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매우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은 여덟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겟세마네 동산의 입구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들 세 명은 예수님의 최측근에 해당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이들 세 사람은 제자들 중에서도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 세 사람을 가까이 하셨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또한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도,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만 데리시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이들 세 명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까? 어떤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예수님이 이들을 경호원으로 쓰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이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위해서 이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반면에 세 제자들은 자신들을 과신하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위기가 닥치자, 모두 시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과신하며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 가운데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33절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읽어봅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당하실 일로 인해서 심히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슬퍼하셨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심히 놀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심히 놀라셔야 할 만큼 충격적이고도 뜻밖의 일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심히 놀라신 것은 십자가에서 당하실 육체적인 고통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당하셨던 심적인 고통도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며,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에게 이는 그다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피조물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시며,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예수님이 이미 다 아시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심히 놀라시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을 심히 놀라시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히2:9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이제 곧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실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홀로 다 담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죄에게 내려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한꺼번에 홀로 다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이 심히 놀라시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가 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심히 놀라신 것은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슬퍼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슬퍼하신 모습은 자주 나옵니다. 예컨대 요11:35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눅19:41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곧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가장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히5:7 말씀을 보면, 이 때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슬퍼하셨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으셔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또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던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는 것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슬프시게 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또한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 지르시며,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시는 자신의 슬픔을 고통스럽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심히 놀랍고 슬픈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대로, 우리도 우리의 겟세마네 시간을 가집시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놓읍시다. 

예수님도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모두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의 짐을 대신 맡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고, 늘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막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여덟 명의 제자들을 동산 입구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눈앞에 두셨기에,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시고 얼마 동안 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그들을 동산 한 곳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이와 같이 밝히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왜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죄를 가까이 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곧 예수님은 죄가 되셔야 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죄가 되셔야 하니까, 얼마나 그 마음에 고민이 되셨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제 곧 예수님은 모든 인류와 모든 죄악에게 내려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한꺼번에 몽땅 다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로 인해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마음에 어느 정도로 심히 고민하셨습니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당장에라도 예수님이 죽게 되실 정도였습니다. 마음의 고민이 깊어지면, 몸에 있는 모세혈관이 팽창합니다. 그러다보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눈이 충혈 되기도 합니다.

더 심해지면, 모세혈관이 터집니다. 그러면 그 피가 피부에 있는 땀샘을 통해서 몸 밖으로 새어나옵니다. 그래서 눅22:44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시고,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눅22:43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에게 힘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돌아가시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습니다. 우리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심히 놀라며 슬퍼하고 우리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그래야 우리가 죄를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오늘 본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신 후,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들은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들을 떠났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잡히셔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며, 또한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그들도 깨어 있어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강한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다 잠을 잤습니다.

결국 그들은 시험에 다 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에 이길 준비를 전혀 갖추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잠자는 자는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오직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 때의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이 각성하고, 벧전5:8에서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깨어 있지 않았다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대적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오직 깨어 기도하는 데 있음을 밝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사노라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우리도 심히 놀랍고 슬프며, 우리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러할 때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교훈하신 대로, 우리도 겟세마네의 시간을 가집시다.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룁시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날마다 기도로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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