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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시사 예화

피딩족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박재홍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최근 설을 앞두고 피딩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주 들어 언론에 등장한 피딩족. 어원과 출처는 정체불명이다. 포털 검색에서는 컴퓨터 게임 속에 등장하는 부족의 이름으로 드물게 눈에 띄는 정도였지 어디에도 등장치 않는 단어다.

그렇다면 언론들이 일제히 쏟아내는 피딩족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피딩족 관련 기사를 읽어보면 공통점은 'F' 백화점의 '손주의 날' 행사이다. 결국 백화점이 물건을 팔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라는 이야기이다. '손주의 날'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에게 설을 맞아 선물을 사주자는 백화점의 이벤트. 결국 피딩족은 백화점이 마케팅을 위해 지어낸 신조어이고 언론은 이 말이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분석의 도구인지 아닌지 가릴 것 없이 백화점 보도자료를 받아쓰고 있는 셈이다.

백화점은 피딩족의 정의는 이렇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 자료사진 (사진 = 이미지비트 제공)

◇피딩(Feeding) 족

- 경제적(Financial)으로 여유가 있고, 육아를 즐기며(Enjoy), 활동적(Energetic)이면서도, 헌신적(Devoted)인 50대~70대 할아버지 할머니를 뜻하는 신조어.

과연 피딩족이라는 신조어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가능도 하다. 꽤 괜찮은 성공사례를 하나 들자면 '골드미스'이다. 골드미스의 문화백과사전 정의를 옮기면 이렇다.

"한국 사회에서 노처녀를 의미하는 말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올드 미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되는 골드 미스는 30대 이상 40대 미만의 미혼여성 중 높은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갖춘 여성을 일컫는다. 구체적으로는 대졸 이상의 학력에 연봉 4천만 원 이상의 고소득이 가능한 전문직 혹은 대기업 사원, 부동산 혹은 전체 자산 규모가 8천만 원 정도에 이르는 여성들을 골드 미스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 골드 미스는 자기 성취욕이 높은 만큼 자기 자신에게 아낌없이 투자한다. 명품 쇼핑과 우아한 해외여행을 즐기는 골드 미스들에게 연애나 결혼은 인생의 우선순위가 아니거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다. 골드 미스들이 결혼정보업계, 여행업계, 패션업계, 미용업계, 외식업계 등의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선도 ..."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골드미스는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 쓰는 신조어이고 올드미스 중 구매력이 있는 여성들을 겨냥해 "당신은 프리미엄 노처녀"라고 추켜세운 뒤 지갑을 열게 하자는 목적으로 지어낸 마케팅 전략이다.

피딩족도 이와 유사한 경로로 생겨난 것이라 여겨진다. 백화점이 고령화 사회에 노인세대의 지갑을 열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다 가장 쉽게 먹힐 수 있는 손주 사랑을 생각해낸 모양이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나 손주의 선물을 사러 온 할아버지의 표정은 똑같다고 한다. 기대와 기쁨이 가득 차 무엇이든 흔쾌히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심리학 실험 중에는 지갑회수율에 대한 실험이 있다. 연락처가 들어있는 빈 지갑 수백 개를 도시 곳곳에 버려두고 주인에게 되돌아오는 지갑들의 특징을 살피는 것이다. 지갑 속에 아기 사진이나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경우 회수율이 월등히 높았다.

신경과학에서 우리 두뇌가 특정 물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측정하는 뉴로이미징 기술을 활용한 방법에 '뇌자도'가 있다. 실험 결과 아기 사진을 보여주면 뇌의 내측 안와전두부 피질 쪽이 급속히 반응을 보이며 활발해진다고 한다.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반면 어른들 사진을 보여주면 반응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아기와 가족을 이용한 마케팅이 가장 효과가 강하고 쉽게 먹히는 것이다.

호주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상품 광고 속에 찍혀 있는 아기 사진이 막연히 위를 향하거나 아래를 향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어른들은 아가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아기가 자기 옆의 선물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면 어른들은 아기 얼굴과 함께 선물까지 유심히 바라보고 갔다. 우리는 이렇게 신조어, 광고판 등 철저히 계산된 마케팅 장치물들에게 포위돼 있다. 보는대로 보고 듣는대로 듣다가는 합리적 소비가 불가능하다.

백화점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유아용품 구입이 엄청 늘고 있다고 매출 자료를 분석해 내놓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세이니 그렇게 소비하라는 것이고 이것이 확산되면 다른 할아버지.할머니와 비교당하면서 억지춘향으로 손주 선물을 사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확산을 노린 것이 이번 마케팅의 목적일 것은 분명하다.

몇 가지 사족을 달아 보자.

1. 손주들 선물을 사주시는 건 좋다. 그러나 백화점은 아니다. 유아용품이나 아동용품의 상당수는 외제수입품이다. 백화점의 외제수입품 코너는 로열티, 매장유지비, 판매사원 인건비, 백화점 수수료 등 여러 가지 경비가 붙어 대단히 비쌀 수밖에 없다. 손주 선물을 굳이 백화점 가서 살 건 아니다. 더구나 언론이 나서 백화점 이벤트만 소개하는 건 더욱 아니다. 여기저기 살펴보고 알뜰하게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옳다.

2. 백화점 유아용품 아동용품이 워낙 바가지가 심하니 젊은 엄마들은 해외직구를 이용한다. 그래서 백화점에 입점한 해외 수입 아동브랜드들은 매출이 크게 떨어져 요즘 과거의 부풀린 값을 꺾다시피 해 팔고 있다. 노인 세대가 백화점에 몰리면서 이 가격거품을 다시 키울 필요는 없다.

3. 백화점이 노인세대를 겨냥하는 배경은 무얼까도 연구가 필요하다. 어쩌면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막강한 인구층이 이제 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할아버지.할머니로서 본격적으로 손주의 선물을 사기 시작했다면 노인층의 유아용품 매출이 오르는 한 요인일 수 있다.

4. 혹 젊은 부부들의 형편이 날로 어려워진 여파는 아닐까? 아기나 어린이에게 값나가는 걸 사줄 형편에서 멀어지기만 할 뿐 회복의 기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할머니 세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사회 양극화의 일면은 아닐까?

CBS 박재홍의 뉴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