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실 때마다
눅 22:14~20
영국 교회에서 뉴질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몇 년의 선교활동 후에 야만적 생활로부터 개심한지 얼마 안 된 원주민들을 모아놓고 선교사가 성찬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으려다 갑자기 교회 반대편으로 황급히 달려갔습니다. 잠시 후 돌아와 다시 앉았습니다. 성찬이 끝난 후 선교사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으려 할 때 아버지를 죽이고 그 피를 먹은 이웃 종족의 추장이 자신의 다음 성찬 차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면 죽이기로 신께 서약을 했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복수해야겠다는 충동에 압도되었지만 보다시피 그 힘에서 벗어나려고 돌진하였습니다. 그 순간 자기를 못 박는 자를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도 성찬을 받을 때마다 용서를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얼마나 큰 용서를 베푸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찬을 받는 다해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용서의 떡이 바로 우리가 받는 떡입니다. 용서의 잔이 우리가 받는 잔입니다. 주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고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용서를 먼저 하고 떡과 잔을 받아야 합니다. 떡과 잔을 받는 순간에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사라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잡수실 때가 되자 제자들과 미리 준비해 놓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구속사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자리였습니다. 마지막 식탁을 중심으로 구속 사업을 이어갈 제자들과 함께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입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에서 유월절 식사가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결단이 있는 기념적 식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 마지막 식사를 나누며 자신의 일을 제자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과의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기념하라는 ‘아남네시스’ 인데 기억을 뜻합니다. 성찬을 행하면서 예수의 삶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에 성찬의 기원과 목적이 나타납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 성찬을 제정하심으로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성찬은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첫째로 구원을 기억하라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실 칠판에 ‘뿌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차례대로 한 아이씩 앞에 나가 집안의 뿌리 곧 조상에 대해서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자랑스러운 듯이 발표합니다. “저는 전주 이씨 47대 손입니다. 저의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에 예조 판서를 지내셨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지금 교장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는 무역 회사의 중역이십니다. 저의 집안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아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는 조용한 어조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저의 아버지에게는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아주 많은 가족들이 있답니다. 특히 저의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구나 똑같이 구원하시고 사랑하신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 땅에서 겪는 슬픔과 고난을 얼마든지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느니라.”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예수께서 기념하라 하신 이유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며,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짐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은혜 베푸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떡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주실 때 감사 기도하고 나누어주셨습니다. 성찬을 영어로는 유카리스트(Eucharist) 라고 하는데, ‘감사’ 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찬의 핵심적인 의미는 감사에 있습니다. 거룩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구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헌신을 기억하라 에케이 호모(Ecci Home)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성화로 독일 화가 슈테른베르그(Sternberg)의 작품입니다. 그 그림밑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 너를 위해 이 일을 했건만 너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림을 보고 프랜시스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종이 위에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밤 벽난로 옆에 앉아 시를 꺼내 다시 읽었는데 문장에 자신이 없고 서툰 표현인 것 같아 시가 적혀 있는 종이를 벽난로 불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굴뚝에서 강한 바람이 거꾸로 불어와 불에 던진 종이 조각을 난로 밖으로 토해 버렸습니다. 이 종이에 기록된 찬송시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란 찬송으로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감명 깊게 부르는 찬송입니다. ‘엑케이 호모’ 는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 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예수의 죽음이나 십자가의 고통에 감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죽으셨다고 하지만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주님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천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나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몸을 주심에 성찬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죄값을 지불하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것인 우리가 어찌 마음대로 살려 합니까? 어찌 자신의 뜻대로 살려 합니까?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을 살리라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구원받고 축복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헌신하신 예수를 기억하고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은 헌신할 줄 모르고 예수를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다짐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나눔을 기억하라 198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이 있었습니다. 빛바랜 하늘색 사리를 걸치고 샌들을 신은 작고 구부정한 여인이 상을 받았습니다. 마더 테레사 (Madre Teresa)수녀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상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상금 때문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받은 상금 전액을 나환자 구호소 건축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수상식이 있는 날 저녁에 통상적으로 파티가 개최되는데 그녀는 파티 대신 그 비용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최 측은 놀랐지만 그녀의 요구대로 하였습니다. 그 돈이면 인도에서 400명이 1년 먹을 식량을 살 수 있다고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상을 받고 돌아온 후 한 달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칩거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상을 받았기에 자랑스럽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모습입니까? 나누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감동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 자녀들은 한 몸이 되었기에 서로의 필요를 나누라는 강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을 나누어 주셨듯이 사랑을 나누는 사람, 복음을 나누는 사람,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는 서로 유무상통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나누어주시고 그 피를 나누어주셨듯이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으기만 하는 이기적 모습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모습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됩니다. 나눔이야말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은 밀라노 산타마리아 성당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 유명한 성화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만찬을 뜻하며 거룩한 만찬이기에 성찬(聖餐)이라 명명했습니다. 교회마다 성찬에 참여하며 그 때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개혁자 칼빈(Jean Calvin)은 성찬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렀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떡과 잔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영적인 실재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크리소스톰 (J. Chrysostom)은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먹는 것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성찬의 자리에 가룟 유다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자신을 살핀 후에 먹고 마셔야 한다는 가르침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찬을 통하여 자신을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께서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께서 베푸신 헌신을 기억하며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예수께서 베푸신 나눔을 기억하며 우리의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부디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새롭게 하나님의 것으로 다짐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2012-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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