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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난 속에 기쁨을 유지하는 삶/시편 90편 10-17

고난 속에 기쁨을 유지하는 삶/시편 90편 10-17

 

요즈음 선거철이 되어 파업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웃음 파업이라는 말 들어 보았습니까? 작년 홍콩의 한 항공사 승무원들은 회사측과 임금 협상에 난항을 겪자 "웃음 짓는 서비스만 파업하겠다"고 헙박성 경고를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깍듯한 인사와 따뜻한 미소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접촉하는 것이 항공사 승무원들의 가장 큰 임무일 텐데 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네킹처럼 무표정 얼굴로 차를 가져오고 식사를 가져오면 밥맛 나겠습니까? 제사밥처럼 느껴지지지 않겠어요 웃음이 없는 웃음 파업한 가정, 웃음 파업한 교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서 하루에 얼마나 웃고 살고 있습니까? 한 통계를 보니 직장인들은 하루에 5번, 어린이들은 약 4백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장수하는 이유는 여성이 웃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초 웃으면 5분 에어로빅 한 효과가 난다고 합니다. 웃음 치료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웃음은 우리 건강에 매우 좋다는 것을 성경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마음의 즐거움은 앙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잠언 17장 22절)
우리 성도님들 일생 살면서 웃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울으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일생 사는 동안 기뻐하며 즐겁게 인생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슬픔하며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짧은 인생 기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시 90:14-15)"
이 기도가 우리 성도님의 기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까지 어려움 당하고 화를 당한 연수를 모두 보상하여 앞으로 기쁘게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뻐할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인생은 늘 기뻐할 것만 생기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고난의 환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어떤 고난의 환경에 처한다할지라도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고 기뻐하는 삶을 의지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가데스바네아(민13:1-14:35) 사건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오래된 시편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모세가 기록한 유일한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모세가 가데스바네아(민13:1-14:35)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여 이제 눈 앞에 가나안 땅을 두고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그렇게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뽑았습니다. 지금 말하면 간첩입니다. 그 지형을 살펴보고 적들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적들의 동향을 살피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들이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장대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적진은 너무나 튼튼합니다. 우리를 그들과 싸우면 다 죽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밤이 새도록 백성들이 곡을 합니다. 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이 꼴 안봐도 될 텐데 우리 애굽으로 돌아 가자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뭐 교회에 다니느냐 차라리 치워버리자. 천국이고 뭐고 그냥 즐기면서 살다가 가자 믿지 않던 시절이 좋지 않으냐 옛날로 돌아가자" "가정 생활도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 갈라서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모세를 갈아 치우자. 능력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자" "요즈음 같으면 무능력하나 목사를 갈아치우고 좀 우리를 걱정 근심하지 않게 하는 유능한 목사를 세우자" 뭐 이런 꼴입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님이 모세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죽음을 무릎쓰고 이들을 이끌고 이제 막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갈아치우자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민수기 14장 19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참 위대한 모세입니다. 인간으로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한 두번이 아닙니다. 22절에 보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10번이나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때 기록한 말씀이다면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또 다른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입니다.
모세는 네가지를 위해 기도합니다. 1)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13).-불쌍히, 위로해 주십시오. 2)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14-15).
공동 번역에 보면 "동틀녘에 당신의 사랑으로 한껏 배불러 평생토록 기뻐 뛰며 노래하게 하소서. 우리가 고생한 그 날수만큼, 어려움을 당한 그 햇수만큼 즐거움을누리게 하소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3)주의 영광을 자손에게 나타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16). 4)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살도 되고 안기쁘게 살도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기쁘게 살아야 하고 기쁘게 살지 않으면 죄를 짖는 것입니다. 기쁨을 유지하지 못하고 늘 우울하고 짜증내고 분노를 내며 사는 것은 죄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3대 실천 강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도하는 것보다 감사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면서 감정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환경과 상관없는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감옥에 갖혀 있으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집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 돌보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기뻐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빌1:18 2:17) 그러면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기뻐하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들의 환경이 기뻐할 만한 환경입니까?
1장에서 불화를 초래하는 다양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순두게와 유오디아로 인하여 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2장 그들은 에바브라 디도의 질병 때문에 걱정하였습니다.
3장 그릇된 이단 그릇된 삶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있고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기뻐할 조건이 있어야 기뻐하지요 말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라 그러면 기뻐할 만한 조건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에 따라 순종하다 보면 상황은 기쁨으로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신비의 역사이고 기적의 역사입니다.
지난 1백 여 년간 '웃으면 즐거운 기분이 되는가, 즐거운 기분이 웃음을 짓게 하는가' 달리 표현한다면 '웃음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감정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고 합니다. 얼굴 표정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19세기 생물학자 찰스 다윈과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웃음이 즐거운 마음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이론에 대해 행동심리학자들은 대개 반론을 폈는데 즉, '기분이 좋아야 웃음이 나오지 어떻게 웃어야 기분이 좋아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서 다시 다윈과 제임스의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미국의 폴 에크먼이라는 심리학자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각기 다른 감정 표현을 흉내 낼 때 그들의 몸도 각각 그에 따른 독특한 생리적 유형을 띠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부러라도 미소를 지으면 더 행복감을 느끼고 억지로라도 슬픈 표정을 지으면 더욱 슬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기뻐하다 보면 환경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환경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환경에 따라 감정이 변화를 가지지 마십시오. 환경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기쁨의 환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질병에 걸리고 그 질병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을 때도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안질 때문에 하나님께 고쳐줄 것을 세번 기도했을 때에 하신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자신이 비난 받고 있는데도 기뻐하였습니다.
빌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쫓겨나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행13: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환경에 지배 당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과거의 고난을 보고 기쁨을 잃지 말고 과거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의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기쁨을 잃고 사는 이유 중 하나는 기뻐할 수 없는 과거의 경험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 과거의 가정 파탄, 과거의 슬픈 경험 때문에 그것을 잊지 못하고 계속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 끌려 다니며 슬퍼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했든 못했던 그 과거에 얽매여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참 밝고 기쁘게 사셨는데 어느날부터 얼굴에 어둠의 그림자가 끼어 있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큰 아이가 자폐아입니다. 어릴 때 몰랐는데 사모님이 아이를 가졌을 때 집에 도둑이 들어 왔는데 그 충격으로 아이가 자폐아가 된 것같다고 합니다. 늘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인 중에서도 말못할 사연 때문에 늘 기쁨을 잃고 우울하게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도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기록한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보면 불이라도 내려 망하기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쁨을 회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다 할 지라도 기쁨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나의 고난의 환경을 보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감옥에 가 있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이단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유오디아와 순두개의 주도권 다툼을 보면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 밖에 있으면 질병에 걸렸는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즉 주님을 위하다 감옥에 갔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다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육체적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안고 즐거움으로 생각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이 그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기뻐하였습니다. 감옥에 갖혔습니다. 재산을 다 빼았겼습니다.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로마 황제의 악랄한 핍박을 목격하면서도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8)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어느날 부천에 있는 정신지체아들을 방문하여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중 30대쯤 되시는 분이 누워서 손뼉을 치며 기뻐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으로 찬양드리는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서부터 한번도 앉아 보지 못한 분입니다. 머리 따로 손 발 따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구원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참된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잘될 때 가지는 감정상태입니까? 구원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 안에서의 기쁨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경우든
(1)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눅10: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은 예수님의 제자 70인의 전도대가 파송받았다가, 훌륭하게 전도로 승리하고 돌아와, 예수께 신실한 보고를 했을 때의 일인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때는 '사탄이 결박당할 때'이니, 눅10:19,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시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케 한다고 합니다.(요14,15,16장 성령이 오시는 것 중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3)

(2)고난 가운데서도 계명을 지키는 기쁨입니다.
요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 19:8)
우리는 주님 안에서 고난이 있다고 할 지라도 1)예수님을 만났을 때(요16:22) 2)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요16:24) 3)성경 말씀이 기쁨(시19:8) 4)그 기쁨은 충만한 기쁨 요16:24, 15:11 시16:11 5) 이렇게 해서 얻은 기쁨 빼앗을 자 없습니다.(요16:22)

3.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고난스러워도 미래를 보며 우울하게 살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전하게 이끄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입니다. 미래를 가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하며 기쁨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의 시간의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모세는 기도하면서 고생한 날 수대로 기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모세의 가슴을 멍들대로 멍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모세에 대하여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그 기적을 배풀었는데도 모세는 기뻐하고 즐거워 춤을 추었다는 기록은 없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백성이 춤을 추며 기뻐한 기록만 있습니다(출15:20). 쓸 물을 단물로 변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베푼데도 말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멍들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를 기쁨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표준 새번역을 보면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아침에는, 주의 사랑으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 (시 90:14)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경험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시 90:15)]
어떻게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이 슬프게 사는 것을 좋아하실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뻐하고 즐겁게 살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저의 아내가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매를 맞고 우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며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슬퍼하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보면 슬퍼할 수 밖에 없으나 하나님이 앞으로 우리를 이끌 것을 생각하면 기뻐하며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십니다(1).
2)영원하신 분이십니다(2).
우리 인생은 어떤 존재입니까?
1)사람은 티끌과 같습니다(3절)
2)사람은 밤의 한 경점과 같은 생애을 삽니다(4절,9.10) 70, 80을 살아갑니다.
3)사람은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같습니다.(5-7)
4)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생애를 보냅니다(8-10)
이러한 인생들에게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용서해 주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도 기뻐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보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6)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7)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8)]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0)]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십시오(예레미야 애가 3장)- 얼마나 고통스런 상황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미래를 보장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고난 스러울 지라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를 만듭시다. 기쁨이 넘치는 가정을 만듭시다.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환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고후8:1-2)이 넘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고후 7:4)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같이 자기의 이름을 넣어 읽어 봅시다. 우리 열린 교회의 이름을 넣어 읽어 봅시다. 이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 속에 기쁨을 유지하는 삶/시편 90편 10-17/김필곤 목사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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