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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기석목사

무엇을 구하는가?

무엇을 구하는가?
요1:35-42
(2000/5/28)

가시나무 새, 요한
가시나무 새는 결코 울지 않지만 죽음에 직면해 최초이자 최후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가시에 심장을 찔린 채 부르는 그 마지막 노래는 처절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바쳐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시나무 새를 닮은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떠오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몇 가지 점에서 비장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에서 산 야인이라는 점(구도자)
·유대교의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 정신(예언자 정신)
·자기는 예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는 겸허한 자기 고백 / 예수 운동에 대해 질투하는 제자들에게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함(자기 소명의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수용)

정현종 시인은 길 위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마른 나뭇잎을 본다. //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하고 노래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깨끗하게 질 줄 안 나뭇잎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 한 마디는 요한이 도달한 영성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오늘 본문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 두 명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 곁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눈여겨보며 말하였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때 예수님은 곧 돌아서셔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천주교회 신약 성경/"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첫 번째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구하려고 주님께 나왔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솔직하게 "축복이요, 마음의 평화요, 건강이요, 출세요, 권세요" 하고 대답할 수도 있어요.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으니까 정말 원한다면 주실 거예요. 하지만 주님은 조금은 서운하실 거예요. '더 좋은 것을 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요.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머물고 계신 숙소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그게 아닐 겁니다.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샘에서 진리의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은근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짧게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싶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이 내게 있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제자는 이제 결단을 해야 합니다. 돌아서 요한에게로 돌아가든지, 예수님과 함께 가든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만난 시간을 제 십시쯤이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십시는 오후 4시경인데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고,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좀 아까운 시간이지요? 성경에서 10시는 전환의 시간이고, 완성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성전에서 저녁 제물을 바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루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침잠의 시간입니다.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난 시간이 10시라는 것은 그들의 삶이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가서 그분이 머물러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지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미리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갔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가야 할 곳을 분명하게 지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자기 삶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혐오하는 사람이 하와이 왕복 티켓을 내보이며 함께 가자고 하면 가시겠어요?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천국에도 안 간다면서요?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그곳이 어디든간에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경험이에요. 그런데 정말 우리는 예수님이 가자고 하시는 곳에 가고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아픔이 있는 곳, 눈물이 있는 곳, 상처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야말로 예수님을 만날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문다는 것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하루를 함께 보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즉 예수님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사시는 분인지를 알기에는 조금 짧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원을 경험했을 겁니다. 하루는 진리를 구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진리를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볼 눈이 있는가, 들을 귀가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난 후에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15:39)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그리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모습,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고요함을 통해 그는 예수 안에 있는 하늘을 본 것이겠지요? 그래요. 누구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만 보는 거예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듣는 거예요. 그런데 두 제자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님의 걸음걸이, 앉음새, 말씨,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풍겨나오는 생명의 향기를 맡았을 겁니다. 또 그분 곁에 머무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을 통해 자기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을 겁니다. 자기들이 변화되고 있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루를 예수님과 함께 지냄을 통해, 영원히 예수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머물다'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 안에 머무시오. 나도 여러분 안에 머물겠습니다…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15:4-5)

우리도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 노력할 때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예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에 '順'(일치, 거역하지 않음)하고, 그분의 부름에 '從'(좇음)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확실히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눈여겨보시는 주님
예수님과 하루를 함께 보낸 제자들은 벌써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두 제자 중의 하나는 안드레였는데, 그는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경험한 사람은 증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나오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눈여겨보십니다. 그들 속에 있는 허물과 못난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투박하기만 한 갈릴리 어부에게서 장차 교회의 터전이 될만한 반석을 보아내는 예수님의 눈길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의 은총과 능력 안에서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면서,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보여드리느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주님은 우리를 향해 돌아서십니다. 마치 기다리셨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눈여겨보시며 물으십니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시오?" 여러분,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십시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구하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말입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께서 눈여겨보고 계신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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