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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지혜

살림의 지혜
왕상 3:16-28
(2000/6/25, 민족 화해 주일)

한울을 다치게 하지 말라
의사들의 파업으로 많은 환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의약분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이럴까 하다가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엊그제 기독교인 의사들의 모임인 〔한국 누가회〕소속 전공의 800여명이‘생명이 위기에 처한 현 의료 상황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내고 진료 복귀를 선언했습니다.“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는 기독 의사로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 그분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분들은 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해서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용기있게 자기의 신앙 양심을 지켰습니다. 이분들이라고 해서 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뜻과 이익을 관철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를 택했습니다.

생명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최우선의 가치입니다. 어떤 명분과 정당성이 있다 해도 생명을 해치거나 돌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최제우의 동학도 열 가지 해서는 안 될 일 중에“한울을 다치게 하지 말라"(毋傷天)는 계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이거나 사회이거나, 어떤 사람이든 다치게 하는 것은 하늘을 거슬리는 일이요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6월은 우리 민족이 큰 아픔으로 기억하는 달입니다. 6.25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6월을 막연한 상처로 기억되지만, 직접 민족적인 참극을 경험한 분들에게는 두고두고 아물지 않는 상처일 것입니다. 특히 이산가족들의 슬픔과 한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얼마 전에 평양의 소년 예술 단원들이 와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했었지요? 그때 저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왔나보다 했지요.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는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표를 구하지 못한 실향민들이 발걸음을 돌리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는 모습 때문이었어요. 공연을 보고 못 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분들은 소년 예술단을 통해 고향을 회상해보고 싶었던 거겠지요. 잊고 지내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생명은 이처럼 큰 상처를 입고 있구나, 생각하니 저도 비감해지더군요. 하나가 되어야 해요. 6.25는 부끄러운 상처예요. 이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살림의 지혜가 필요해요. 저는 오늘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를 통해 살림의 지혜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이야기의 맥락 읽기
솔로몬은 다윗의 열 일곱 아들 가운데 10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고 본다면 그는 왕위 계승 서열이 한참 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단 선지자의 도움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권력 기반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카리스마도 부족합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왕권을 다져온 다윗의 권위에 비하면 솔로몬은 아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뭔가 비상한 조치가 없으면 그는 왕의 권위를 세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성소인 기브온 산당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북부에 있던 전통적인 성지 세겜을 찾아가지 않고 기브온 산당을 찾아간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원주민들이야말로 자기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천 번제를 바치며 기도하던 솔로몬을 기특하게 보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어리고 경험도 없으며,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구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는 이미 응답 받은 기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거예요.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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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덧붙인 이야기가 뭐지요?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이거 대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 그리고 오래 사는 복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걸 보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고 하는 건가요? 군침만 삼키지 마세요. 복받는 것은 참 쉬워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사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가운데 "에이, 그거 다 그저 해보는 소리지 뭐,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없더라. 누구는 아이 데리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노름 하다가 돈만 많이 벌던데, 나는 이게 뭐야" 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돈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솔로몬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사실 이 말은 공부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다는 말은 뭔가 의도가 있는 말입니다. 사사들이나 왕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커다란 무훈을 세움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어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도 왕으로 뽑혔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은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울은 암몬 군사에 의해 포위당하고 위협받고 있던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를 왕으로 인정합니다(삼상 11장).

그런데 이 얼굴이 하얀, 전쟁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솔로몬이 왕으로 인정받는 길이 무엇이었겠어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는데, 그의 지혜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출중하다, 이런 소문을 일부러 슬쩍 내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드는 거예요. 물론 솔로몬은 똑똑했지요. 우리는 그걸 알아요. 돌머리인데 지혜롭다고 해보아야 당장 들통나고 말지 않아요?

솔로몬의 재판
솔로몬이 지혜롭다고 말로만 하면 사람들이 믿겠어요. 뭔가 보여주어야겠지요? 그게 바로 오늘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예요. 이것은 그저 이야기입니다.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감히 창녀들이 왕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아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어야 해요.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창녀들입니다. 그 여인들은 사흘 간격을 두고 아기를 낳았어요. 그런데 그만 자다가 한 여인이 자기 아기를 깔아 죽였어요. 야단났어요. 그 부주의한 어미는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다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아기를 바꾸자.'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지혜를 주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인은 다른 여인이 곤히 잠들어있는 틈을 타서 아기를 바꿔치기 했어요. 아이 엄마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곧 사태를 파악했고,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리고는 솔로몬 왕에게 온 거지요. 올바른 판정을 해달라구요.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누가 보아도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표시가 있어야지요.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솔로몬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칼을 가져 오라."
"둘로 나눠 주라."

사실 저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 어린 생명을 두고 칼로 나누라고 하다니요. 아무리 그게 재판을 위한 과정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이야기는 이야기이니 말이에요. 왕의 냉정한 선언을 듣고 두 여인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진짜 엄마는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고 번역된 말은 "그녀의 자궁이 꿈틀거려서"라는 말의 의역입니다.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겁니다.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이 엄마가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아들이지, 죽은 아들이 아닙니다. 설사 그가 나와 함께 살 수 없다 해도 아기의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진짜 어머니이기 때문에 생명 중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짜 엄마는 말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이 가짜 어미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분배가 문제입니다. 손해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소유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참 끔찍합니다. 이쯤 되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누가 진짜 어머니인 줄을 말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움의 예증으로 기록된 이 이야기가 기록된 곳은 바벨론입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결국은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는 망하고, 국민들은 바벨론에 잡혀간 희망없는 처지에서, 사람들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것만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창기인 두 어머니의 현실은 신랑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타락과 죄악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처지의 여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꾼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남과 북으로 갈라져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넌즈시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이 최우선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이득이라도 챙겨보려고 나라를 나누고 가르는 것은 결국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꾼은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라를 살리는 살림의 지혜는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나라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려는 결의임을 히브리의 이야기꾼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통일의 철학
6.25 전쟁 5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한반도에는 해빙의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념의 칼로 나뉘어 있습니다. 신앙도 갈라지고, 가족도 갈라지고, 문화도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단 체제를 통해 단물을 얻어먹던 세력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방해가 어떠하든지 이 땅의 생명이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면서라도 생명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뜨거운 헌신이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역사는 생명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려는 이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진짜 어머니는 권리의 포기를 통해 진짜 어머니로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기독교인 의사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한 것처럼, 먼저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죽음의 위협 속에 있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6.25의 참극이 일어난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올해 우리 민족은 통일의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제안하고 응한 것입니다. 이제 남북의 만남을 통해 나뉘었던 가족들이 만나고, 기아에 허덕이는 형제들이 살아나고,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화해의 봄기운이 감도는 이 강산에 개화의 새봄을 앞당기기 위해 화해의 밑거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림의 지혜를 주셔서, 죽임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창조적으로 살림을 택하는 민족적인 지혜를 발휘하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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