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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잘 시작한 일에 어려움이 올 때/사도행전13:4-12

잘 시작한 일에 어려움이 올 때/사도행전13:4-12

 

처음에 잘 출발하였는데 어려움이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어떻게 합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스스로 간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누구의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의 축복속에 출발한 것입니다. 순조로운 출발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가는 곳에 모든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고자 하는 것이 만사 형통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앞에 다가온 일이 무엇입니까? 실루기아에 갈 때까지만도 순풍에 돛단 듯 갔습니다. 그러나 구브로에 가니까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6절 보십시오. 바 예수입니다. 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름부터가 이단적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박수였습니다. 이가 바나바와 바울이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대적하였다고 했습니다. 총독을 믿지 못하게 힘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출발을 했다 할지라도 때때로 어려움이 다가 올 수가 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십시오(막4:35절 이하). 예수님께서 날이 저물 때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이들을 주로 어부들입니다. 바다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때 바람이 어떻게 불고 바다의 징조를 보면 폭풍이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저어 갔습니다. 출발은 좋았습니다. 잔잔합니다. 그러나 조금 가니까 큰 광풍이 불어 옵니다(37). 광풍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 온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가니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강퍅한 바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 두 번째, 무려 9가지 기적을 일으킨 데고 그의 마음은 요지부동입니다. 아론은 어떻습니까? 소 우상을 만듭니다. 누이는 어떠합니까? 비난합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순조로운 출발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적으로 평탄한 길이 놓여 있습니까?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순조로운 출발이지만 엄청난 어려움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왜 이런 어려움이 다가 옵니까? 어려운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본문:
총독 바울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수 엘루마가 믿지 못하게 합니다. 이 때 바나바와 바울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습니다.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총독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당시 총독은 식민지에서 로마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두 종류의 총독이 있었다고 합니다. 군대를 필요로 하는 곳의 총독을 프레르레톨(Proprator)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빌라도와 같은 총독입니다. 또하나는 프로콘술(Proconsul)로 행정을 위한 총독이라고 합니다. 서기오 바울은 바로 프로콘술이라고 합니다. 당시 총독이니 권력이 있습니다. 부가 있습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뭐가 무족하겠습니까? 말 한마디면 식민지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 당시 문화는 다신 문화이고 아스다롯, 비너스, 아프로디테 등과 같은 관능적이고 부도덕한 신을 섬길 때입니다. 퇴폐적인 문화 속에 살 때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설교 한번 듣는다고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지 한번 준다고 예수님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신뢰하였던 엘루마, 바예수를 통하여 총독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멀쩡하던 자가 바나바와 바울의 말 한마디에 눈이 먼것입니다. 그것을 목격합니다.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놀랍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기이히 여겼다는 말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엘루마라는 장벽이 없었다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이런 기적을 보지 않았다면 총독이 믿겠습니까?

2) 순조롭게 출발하였는데 일에 어려움이 오면 믿음의 사람에게는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때이고 그것을 통하여 믿음을 갖게하는 신호로 알고 믿음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질병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줄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앞에 홍해가 다가 올 수 있습니다. 때때로 여리고 성이 앞에 버티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좌절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만들고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만듭니다. 왜 성경에 그 많은 것을 기록해 놓았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을 찾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 수도 또 받을 수도 없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며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있습니다.
참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의사 훈련를 받을 때 교수가 사람을 수술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실습 현장에 가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스로 집도하게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직접경험을 통하여 확실하게 압니다.
성경에 나온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믿게 만들기 위해 기적을 눈앞에 보여 줍니다. 질병에 걸리게 하여 기적적으로 낳게 만들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게 만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훈련을 25년 동안 받았습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하는데 믿지 않습니다. 첩을 얻습니다.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합니다. 25년의 긴긴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모세는 믿음의 훈련을 40년이나 받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훈련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받습니다. 믿음의 훈련 1주일이면 끝내도 될 것인데 갖은 고난을 40년 받고 나서야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고난이 없으면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 성수 훈련받는데 일평생 걸리는 사람입니다. 십일조 훈련받는데 일평생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군인들 기본기 한달이면 끝냅니다. 논산 훈련소 4주면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기본기만 받다가 인생 마치는 사람입니다.
구원얻는 믿음은 기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군병이 돼서 세상에서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따라간 제자들에게 폭풍이 다가 왔을 때 제자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막4:40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에는 구원얻는 믿음이 있습니다. "(엡2 :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얻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믿음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인간의 믿음인데 멜랑크톤(Melanchthons)은 믿음에 대하여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첫째, 앎(지식)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둘째, 승인의 단계로서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뢰의 단계는 하나님을 향해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2. 순조롭게 출발하였는데 일에 어려움이 오면 문제의 본질 깨닫고 그것을 처리해야 합니다(10).
1) 본문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엘루마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 때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바나바와 바울은 엘루마 자체를 보지 않습니다. 엘루마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결국 그 배후에 사탄의 전략이 있다는 사실을 꽤뚫어 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초점을 흐리게 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탄의 전략입니다.

2) 우리도 순조롭게 출발하였는데 어려움이 다가 오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의 본질에 대하여 정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우리의 싸움이란 결국 영적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부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자녀와 싸움이 아닙니다. 인간들과 싸움이 아닙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끼리의 싸움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싸움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많은 전쟁을 통하여 인간끼리의 싸움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비교하게 하고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사탄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꼬리를 감추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인간끼리만의 역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본질을 일어버린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학교 교육에서도 초점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깁니다. 학교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험기계 만드는 곳이 학교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학교는 학원에 그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어는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선생님은 학원숙제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더니 "학원이 더 중요하면 학원이나 다니지 왜 학교에 오냐?" 말씀하셨답니다. 그러자 구석에 앉아있던 아이가 말하길................. "학원 숙제하려고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정치가 왜 있습니까? 국민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을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제도, 화폐제도가 왜 필요합니까? 다 같이 행복하게 편안하게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일부의 부를 축척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가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얼마전 우리 교인이 아니고 다른 교회 다니는 분으로부터 상담을 받았습니다. 자기 교회에 다니는 성도님인데 어느 교회에 노인들을 위한 봉사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 나가다 보니까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속 그 교회에 오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섯 남편은 목사를 말하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교회의 목사는 진짜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비유를 들며 순종하지 않으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의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가정에 비극이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울이 싸움의 대상을 다윗으로 생각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서로 인기싸움을 합니다. 누가 많으냐? 누가 잘 사느냐? 싸우게 합니다.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뭐가 않되면 왜 안되는지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업이 안되면 왜 안되는 지 본질을 파악해 대처해야 합니다. 공부가 안되면 왜 안되는지,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왜 문제가 있는 지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암이 걸리면 암세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 놓아 두고 다른 세포 드러낸다고 났는 것 아닙니다.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을 드러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에서 올무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놓아 두며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수도 상류에서 계속 오염물질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류에서 아무리 정화작업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 지나면 다시 더러워 집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일평생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 얼마나 좋게 출발하였습니까?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좋아했습니다. 인기기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인기가 오릅니다. 그 때부터 다윗을 시기합니다. 다윗만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몇차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본질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울의 마음을 사탄이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 16:14)" 신하들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삼상 16:15)" 그런데 자신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전쟁터에서 자신도 아들들도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하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평생 그 순이 자라나 인생을 괴롭힙니다.

3. 우리도 순조롭게 출발하였는데 어려움이 다가 오면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1)본문:
바나바와 바울은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만났을 때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들에게 맡겨준 일을 이루어 냅니다. 그 비법이 무엇이겠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성령 충만입니다. 11절 보십시오. 주의 손입니다. 강력하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이 선교 사역은 바울과 바나바만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일입니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2)우리도 어떤 일이 잘 안될 때는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될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성적을 올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습니다. 성격을 고치려고 하는데 고쳐지지 않습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도대체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대로 포기해 버립니까? 그럴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될 때 그 때 절망하고 포기하라는 때가 아니라 성령 충만하라는 때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나는 못하지만 주님께서 하실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11). 주의 손이 엘루마 위에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손이 그 위에 있습니다. 주의 손이 머무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손으로 할 수 없지만 주의 손으로는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가 못한다고 우리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재물이 없다고 우리 하나님이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능력이 없다고 나에게 실력이 없다고 나에게 권력이 없다고 우리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다윗이 좋은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라는 난공불락의 적을 만납니다. 모두가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풀이 꺽여 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거민을 보고 두려워하고 울며 원망하고 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떻게 합니까?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9)"
베드로를 보십시오.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 어떻게 됩니까? 앉은 뱅이를 고치는 능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내 손으로 안될 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의 손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될 때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출발이 선하면 목적과 방법이 선하다면.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길은 있습니다.

처음에 잘 출발하였는데 어려움이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어떻게 합니까?
1.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2. 문제의 본질 깨닫고 그것을 처리해야 합니다(10).
3.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잘 시작한 일에 어려움이 올 때/사도행전13:4-12/김필곤 목사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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