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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설교준비

감동적인 설교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감동적인 설교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찰스 스펄전이 한번은 새로 지은 예배당에 들어가서 음향 상태를 시험해 보기 위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이 때 마침 그곳에서 일하던 한 일꾼이 스펄전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 말씀에 확신을 갖게 되어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설교자들 중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열 명의 목회자가 똑같은 메시지를 또박또박 설교했다 해도,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보다 성령께 좀 더 철저히 의뢰하거나 또는 더 많은 은사를 갖고 그것을 활용하기도 한다.

설교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생기게 하는 것은 그 설교의 내용이 어떠한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누가 그 설교를 하는 가이다.

좋은 내용의 설교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실패로 끝나기가 쉽다. 아마도 가장 공통적인 요인은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설교가 행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진리에 대한 어떤 느낌도 없이 그대로 설교를 행하는 타성에 젖어 왔다.

우리는 증권시장에서 거래가 별로 없는 날 막바지에 거래 내역을 보고하는 것처럼 메시지를 소리쳐 왔다.

밴스 해브너(Vance Havner)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설교는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러나 강력한 감동을 준 설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십대 소년이었을 때‘목사님은 왜 설교 내용을 인쇄하여 집으로 보내 주지 않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태여 힘들게 교회에 가지 않아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목사님이 너무 냉랭하게 설교해서 그의 설교가 설교 내용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긴다.

설교는 단지 내용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본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인가?”라고 윌리엄 퀘일(William A. Quayle) 감독은 질문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란 설교자를 만들고, 설교자 자신을 전달하는 하나의 기술이다!”라고 그는 답한다.

주일에 강단에서 선포하는 수많은 설교 중에서 설교자 자신이 전달되는 설교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지만, 그들의 설교에는 열정이 없다.

콜로라도의 미카엘 터커(Michael Tucker) 목사는 유능한 설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유능한 설교자는 그가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설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속에서 방망이질해야 한다. 그 메시지가 그를 부추기고, 그로 하여금 설교하고 싶게 하고, 심지어는 그 설교자의 마음속에서부터 설교가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설교자는 설교하려는 열망이 너무 커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지 윗필드는 성도들에게 열정을 가지고 설교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러한 글을 써 보냈다.

“설교할 때마다 그것이 당신에게 부여된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설교하시오. 가능한 한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시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라고 부르짖게 하시오”

예수회 신학자인 월터 버그하트(Walter Burghardt)는 신부들이 형식적으로 강론하는 것에 대해 몹시 가슴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도들이“아무런 감동이나 느낌도 없이 하나님에 대해 설교하는 우리들의 능력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며 한탄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설교의 세 유형

리챠드 오웬 로버츠(Richard Owen Roberts)는 “부흥(Revival)" 이라는 책에서 설교 준비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입에서 귀로 하는 설교(Mouth - to - Ear Preaching)

이러한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의 한 말의 선택과 구성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쓸 때 행해진다. 설교자는 좋은 예화들과 생생한 설명의 필요성을 의식한다. 그는 성경의 핵심 구절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며 독특한 표현들을 찾아서 사용한다. 그러면 대개 성도들은 설교에 대해 “아, 참 훌륭한 설교야, 정말 은혜스러웠어”라고 말한다.

2) 머리에서 머리에로 하는 설교(Head - to - Head Preaching)

이것은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들고, 그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는 설교이다. 설교자는 신학적 오류가 없는 설교를 잘 작성하여 성도를 깨우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러면 성도들은“아주 놀라운 설교였어. 나는 전에 그러한 내용을 결코 생각하지 못했는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3)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는 설교(Soul - to - Soul Preaching)

이러한 경우, 설교자는 메시지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준비하는 데에도 동일한 시간을 투자한다. 이러한 설교만이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개인적 성화의 길로 사람을 인도한다. 바로 자신을 전하는 설교자이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설교자들 가운데 유창하게 설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은사들은 받았을지라도, 설교할 때 단지 메세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함께 전함으로써 특별한 방법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런 설교자들이 전하는 메세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설교의 세 인격

어떻게 하면 듣는 자들의 마음과 뜻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무조건 소리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극적인 이야기들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설교에 포함되는 세 인격적 존재들을 잘 알아야 한다.

첫째, 설교에는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는“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벧전 4:11)라고 썼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설교가 따분하고 반복적이며 형식적이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상황에도 너히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은 성도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가정과 신자들 간의 미움과 의심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물론 다른 모든 질문들도,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할 때 응답되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 우리는 시내산에서의 웅장한 계시에 나타난 바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설교에 있어서 우리의 감동적인 열정을 다시 한 번 점화시키는 첫 단계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서 갖는 우리의 특권의 기이함을 새롭게 체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그분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설교에는 청중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면 그들이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라. 사람들은 교회에 올 때 열린 마음을 갖고 오지 않는다.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말한다.

“사람들의 머리는 열려 있지도 비어 있지도 않다. 머리에는 꽉 조여진 뚜껑이 있어 웬만큼 부어서는 그 속에 사상들을 집어넣을 수 없다. 마음은 그 주인이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만 열린다. 그럴 때에라도, 사상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경험, 습관, 편견, 두려움, 그리고 의심 등의 여러 지층들을 통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분노는 남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한다. 어떤 성도의 열살짜리 아들이 그의 차바퀴 옆에서 잠들었다가 그만 깔려 죽게 되었다. 이 때 지각없는 목회자가 이성을 잃은 아버지에게 “나는 지금 휴가 가는 중이니 나를 장례식에 부를 생각은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그가 좋은 설교자이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그가 말하는 설교를 한 마디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예화는 의사전달에 있어서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아무리 소리치며 웅장한 설교를 한다 해도 그 설교를 대하는 사람이 들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 설교는 대리석 위의 물보다 더 청중의 마음속에 스며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은 설교 시간에 어쩌면 지난 주간에 받은 압박들, 가정의 문제들, 또는 재정적 곤경 등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기에다가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더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가는 사단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고려해 보라. 이러한 가운데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실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성도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가슴에 품지 않으면, 어느 것으로도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 정보만으로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 설교에는 설교자가 포함되어 있다.

설교자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전에, 그것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매주 두세 번씩의 설교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적용되지 않은 진리가 다른 성도들에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설교할 때 우리 자신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들은 우리 자신이 그 전하는 메시지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날마다 직면하게 되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킨다. 우리는 감람산에 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던 그리스도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울지 못한다. 신학교는 깊게 생각하는 훈련을 시키지만, 깊이 느끼도록 훈련시키지는 않는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규칙을 따른다면, 설교의 능력은 급진적으로 증진될 것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눌 때, 그 내용의 대강을 기억해 내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보다는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씀을 충분히 잘 알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권위를 가지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17세기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인 존 오웬(John Owen)의 경우를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을 통해 진리의 어느 한 부분을 경험하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시편 기자와 같이 「내가 믿은 고로 말하리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내가 그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발표하지도 않을 것을 내 양심과 명예를 걸고 다짐한다”(죄의 유혹)

우리가 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시간만큼 우리의 가슴을 준비한다면,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목회자로서 매주 예배를 통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떨림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어렵고, 성경과의 깊은 대화와 연구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을 느끼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많은 시간을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보지만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을 갈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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