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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경공부교재

[스크랩] 제자의 길: 제 1 단원 - 십자가의 능력

 


square11_bronze.gif 제자의 길: 제 1 단원 - 십자가의 능력

 

제1과 당신은 십자가 능력으로 사십니까?

제2과 십자가의 능력 은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제3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 용서받는 능력입니다.

제4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씻는 능력입니다.

제5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제 1단원 십자가 능력

요절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제 1과 당신은 십자가 능력으로 사십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에게 약속된 삶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체험은 말씀의 약속과는 달리 '좌절과 낙심'입니다.

성경에서 구원받은 성도에게 약속되어진 놀라운 삶은 어떠한 삶인지 찾아 봅시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질문> 당신은 이제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② [요 7:37-38]"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질문> 당신은 가정, 직장, 학교에서 주위에 놀라운 은혜를 끼치며 사십니까?

③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 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질문> 당신은 시험을 만날 때, 넉넉히 이깁니까? 겨우 이깁니까? 매번 집니까?

위의 질문에 대하여 당신은 아마 자신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많은 성도들이 확신없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은 안 믿고 있는가?

* 예수님은 정말 내 안에 계신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 예수 믿으면 정말 축복을 받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고도 가난한 사람, 실패한 사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왜 생기는가?

* 기도하면 정말 응답받는가? 기도하면 정말 다 응답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질문> 고전 1:18을 읽고 답해 보십시오.

① 십자가의 도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인다고 했습니까?

② 십자가의 도는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어떤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까?

고전 1:18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는 자는 멸망할 자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십자가가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중학교 친구 중에, 지금 대학교수요, 장로가 된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의 아들이면서도, 그 친구를 제가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0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친구의 부인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중학교 때, 목사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 왜 그 때는 전도하지 않았나요?"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 한 사람이 최근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첫 심방을 갔던 날,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그때는 전도하지 않았나요?" 솔직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때는 제가 목사의 아들이면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러시아에는 기독교인이 9천만명, 신부만도 6만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 54,000명의 손에 나라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질문> 당신은 십자가를 묵상할 때, 어떤 능력을 얻습니까?

오늘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느껴지는 것을 솔직히 써 보십시오.






































제 2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불신자는 십자가를 보아도 특별한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보면, 자기 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이며, 능력인지 모릅니다. 도데체 그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진정으로 깨닫게 만들 수 있을까요?

십자가 뿐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하고 설교를 했을 때, 유대인들이 마음에 갑자기 통렬한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할꼬"(:37) 하면서 울부짖으며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17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주일에 촛불 옆에서 원고지를 들고 설교문을 읽기만 했는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했다고 했습니다. 그 제목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잡힌 죄인들'이었습니다. 1600년, 1700년대 그날의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빛되신 주님 앞에 솔직히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죄를 그 밤에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미국 시카고 헤몬드에 젝 카일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곳은 블루 칼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사람들이 윤리적 개념이 부족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목사님 강대상 앞에 방탄 유리를 설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젝 카일 목사님은 매주일 설교 때마다 날카롭게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어느날 이 설교를 듣기 싫어하던 한 청년이 권총을 발사해 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총알은 빗나가고 목사님은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가서 "목사님 이제는 죄를 그만 말씀하시지요?" 권면을 했더니 젝 카일 목사님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대상 앞에 방탄 보호막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다시 한번 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권총으로 저격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젝 카일 목사님은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잭 카일 목사님이 강단에서 죄를 지적하자 그것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교회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120대의 버스가 운행을 할만큼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현지에 가서 그 교회를 둘러 본 목사님들은 이런 지역에 이렇게 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택가도 아닌 철도 주변에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올 때는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죄를 죄라고 가르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그 길로 들어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 새 능력을 입게 하고 주님을 위하여 뛰게 할 때에 그토록 엄청난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인도 조동욱선교사님의 편지에는 끔찍한 순교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지난 99년 1월 23일 인도 오리싸(Orissa)주 마나하푸르(Manahapur) 마을에서 금년 58세이신 스테인스 그래함 (Steins Graham) 선교사님이 24세에 호주에서 인도로 와서 34년동안 돌보던 나병환자 공동체에 9살된 디모데(Thimothy)와 7살된 필립(Philip) 두 아들을 특별히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그래함 선교사님은 두 아들이 아버지의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지기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인 형제들을 살피다가 돌아갈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근처에서는 그들이 묵을 만한 곳이 없어서 날이 밝을 때까지 타고 간 찝차에서 새우 잠이라도 자기로 작정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던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자정을 넘긴 새벽, 찝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휘발유를 붓고는 동시에 불을 붙였습니다. 선교사님과 두 아들은 그 찝차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도당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그들을 다시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환호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도망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두 아들은 서로 껴안고 불꽃 속에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야 했습니다.

그 힌두교도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죄인입니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어느 정도 죄인인지, 어떤 죄인인지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일까요?

상담학자 크리스 톨만 박사는 "사람들이 왜 불행하게 사는가?"에 대하여 연구하다가 사람들이 거짓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인 줄로 믿고 살면, 죄책감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나의 불행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래"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해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쉽고, 덜 고통스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야"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쉽게만 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신앙생활에서도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죄책감도 없습니다. "결국 이익이 많이 남는 것이 좋은 것이지"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언제나 자기 이익을 먼저 계산하며 삽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전혀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진리가 십자가에서 폭로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너무나 많지만,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지냅니다.

지난 99. 3. 8. 월. 경찰서에서 제게 출석 요구서가 날라왔습니다. 펼쳐서 보니, 차 사진과 함께, [3월 4일 오전 9시 42분 57초, 강서구 대저1동 700번지에서 제한속도 60km인 도로에서 74km로 달렸기에 속도위반으로 적발되었으니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하는 내용의 통지문이었습니다. 그날 교도소에 수감된 교우를 면회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통지서를 받고 하루종일 기분이 나빴습니다. 억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겨우 74km 인데! 그러나 점점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모든 일이 이처럼 다 사진에 찍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두려웠던 것은 그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나에게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다!] 이 얼마나 전율할 일인가?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짓고도 이렇게 무감각하게 넘어간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만일 하나님 앞에 가서야 깨닫게 된 죄가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리고 제 안에 죄를 깨닫고도 죄를 합리화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61km였어도 범칙은 범칙인 것을. "죄 보다 더 무서운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교했던 내 안에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눈 마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기 전에는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동화책에서도, 교과서에서도, 만화나 영화 등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본래 착한 아이, 나쁜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눈에는 다 착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리 착해 보여도, 욕심부리고, 고집부리고, 혈기 내고, 편가르는 것 보면 다 나쁜 아이입니다. 본래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과자를 만나면 가까이 하기가 괜히 겁부터 나지만, 사실, 정도 나름이지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싸울 때 보십시오. 교인들끼리 윷놀이 하는 것 보십시오. 정치하는 것 보십시오. 본래 좋은 나라, 나쁜 나라 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는 무조건 좋은 나라, 일본과 북한은 무조건 나쁜 나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각종 전쟁의 실상을 찾아 보면, 다 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지적인 나라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했고,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영국과 미국이 얼마나 인종차별을 했는 지 모릅니다. 다 똑같습니다.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면서 눈이 뜨인 사람은 누구도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가지고 남의 욕심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거짓을 품은 채 남의 거짓을 참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사람을 정죄합니다.

하영이 출생 당시, 못생긴 아이, 교인들이 어떻게 할 말을 찾지 못함, "귀엽네" 어느날, 자기 어릴 대 사진을 들고와서 이렇게 못생긴 아이가 누구에요 "너야" 그 다음부터 누구 잘 생겼다 못 생겼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게 이렇게 밖에 못하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야기는 곧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질문> 눅 5:8에세 베드로가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눅 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어부였던 베드로는 엄청난 고기를 잡고서,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순간, 영적 눈이 뜨여, 자신을 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죄를 회개하라고 했을 때, 자신은 아무리 돌아 보아도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는 순간 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죄가 깨달아 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다 돌을 내려놓고 가 버렸습니다.

 

송진경자매, 한 방의 자매와 필통, "제가 요나였습니다. 필통하나 잃어 버린 것은 그렇게 아까와 하면서, 룸메이트는 그렇게 싫어하느냐?"

창신대 김형준교수님은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나중에 예수를 믿고 장로님까지 되셨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 "아버지, 그때 왜 어머니를 때리셨어요?"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는 한참 만에 대답하셨습니다. "네 할머니가 조선 명태와 여자는 때릴수록 부드러워진다고 하셨단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 말을 정말 믿었단다"

어느 남자가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서 아내에게 어떤 선물이 필요한지 물었답니다. 아내가 다른 선물은 필요없으니 2시간만 달라고 했습니다. 생일에 아내와 마주 앉았습니다. "여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당신은 맞아! 맞아! 그렇지! 그 말만 해 주세요" 그리고는 아내가 결혼 때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듣다보니 말도 안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아니, 여보 그건" 하니까 아내가 "여보 두 시간만, 두 시간만" 10분을 듣는데, 속이 뒤틀리고, 20분을 듣는데, 화가 치밀어 오르고, 30분을 듣는 데, 죽을 것 같더랍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왔는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구나" 1시간을 계속하여 말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울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아내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2시간 후, 아내를 붙잡고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면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질문>

① 엡 2:1을 써 보십시오.

② 여기서 "죽었던"이란 말은 무엇이 죽었다는 말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전도자에게 빈정거리면서 물었습니다. "죄가 무겁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런 무거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50근입니까? 100근입니까?" 전도자가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쌀 10가마를 올려 놓으면 그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죄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영이 죽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영이 죽으면 하나님도, 마귀도, 천사도, 천국지옥도, 영적인 것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를 깨닫는 것이 영적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서울 신대 홍성철 교수님은 대학4년 때, 친구의 전도를 받아, 여름 수련회 참석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까지, 아무런 감동도 없어, 다음 날 내려 갈 결심을 하고 자기를 전도한 친구에게 가는데, 오히려 자기 방으로 오는 그 친구를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손을 잡고 울면서, "성철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야 한다!" 하는 말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답답하여 혼자 말 같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정말 제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있다면 가르쳐나 주십시오" 그런데 점점 지나간 날의 죄가 깨달아 지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이 죄인을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자기 죄를 깨달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자기 죄를 알기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되고, 만날수록 은혜롭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분명히 행위로만 따지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백배 낫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자기 죄를 다 폭로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둘 중에 누가 더 무섭습니까? 자기 죄를 모르면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속죄도 구원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질문> 여러분은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아십니까?
































제 3과 십자가의 능력은 용서받는 능력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의 죄만 깨닫게 한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죄가 너무 많고,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지만, 놀라웁게도 우리의 죄짐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벗겨졌다는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질문> [은혜]가 무엇인지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정의해 보십시오.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과분한 처분과 사랑을 받은 것

만약 어떤 학생이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져 왔다고 합시다. 어머니의 반응이 세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적표를 보시더니,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시더니, 갑자기 성적표를 내 동뎅이 치시면서, 높은 톤의 목소리로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았니? 당장 가서 회초리 가져와"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응보하고 합니다. 둘째는 어머니께서 깊은 한숨을 내 쉬시더니, "어쩌겠니,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하거라"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정도에도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만, 정확히 말하면 온정입니다. 세째는 성적표를 보고, 생각에 잠기시더니, 고개를 푹 수그린 아이를 꼭 껴안아 주시면서 "사랑한다! 시험보느라고 수고했지, 그래도 너는 나의 자랑스런 아들이야. 오늘 아빠에게 전화해서 외식이라도 할까? 네가 좋아하는 피자 먹으러 가자" 이것이 왠일입니까? 피자는 무슨 피자입니까? 피가 나게 맞아도 할 말이 없는 데,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용서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① 존 웨슬리,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홀리클럽이라는 경건단체를 만들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간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경건과 믿음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때,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동승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어린아이까지 평안하게 찬송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웨슬리에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길 구원이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에서 온 모라비안교도의 영적지도자 스팡겐버그가 웨슬리에게 물었습니다."하나님의 영이 그대의 영혼 속에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주십니까?"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실상 성령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할 때, 웨슬리는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그가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압니다" 그 때 스팡겐버그는 물었습니다. "그가 바로 당신을 구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때 웨슬리는 너무나 확신없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사실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의 미국 선교 여행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에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귀국하면서 "나는 인디언을 회개시키러 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사람은 누군가? 나는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다" 눈물로 "나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죄의 권세에 눌려 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 거리의 한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사회자가 읽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오면서, "그렇구나! 구원을 위하여 나는 다만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구나. 주께서 나의 죄, 나의 모든 죄까지 다 거두어 가셨구나.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감격에 차서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믿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그때 웨슬리 목사님에게서 죄짐이 사라진 것입니다.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② 마틴 루터, 그는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 때까지도 구원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죄짐에 눌려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생활에는 기쁨과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구원받으려고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가는 중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은혜의 진리"가 깨달아졌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는 순간에 정말 자신의 모든 고민과 죄의 무거운 짐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때,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지만, 은혜를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죄짐에 눌려 사는 교인이 많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그의 전도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어떤 기자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들과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지금까지의 사역 중에서 혹시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복음이 교회 밖에만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은 교회 안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질문> 눅 15:11-24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아버지는 둘째가 유산을 달라고 할 때, "이놈아!" 하면서, 몽둥이들고, 내 쫓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아들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될 것을 아신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 올 날이 있음을 바라보며, 재산을 포기하고서라도, 떠나는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래 기다려주시는 사랑, 죄인일 때부터, 이미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방탕한 아들을 둔 목사님,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도 정신을 못 차린 아들, 하루는 술이 취해서 밤 늦게 집에 들어와 자는데, 뜨거운 것이 손등에 떨어져, 눈을 떠 보니, 아버지가 기도하고 계셨답니다. "이 아들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차라리 나의 생명을 거두어서라도 이 아들은 구하여 주옵소서" '나를 저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언제까지 눈물 흘리게 할 것인가?'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아들은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게렛신학교를 마치고, 시카고대학으로 돌아와 학원 선교를 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으시지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중에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 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는 아직도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사랑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 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 왔을 때, 돼지 오물로 엉망인 그대로 끌어 안고, 더러운 얼굴에 입 맞추었습니다. 그 순간 탕자의 죄짐은 벗겨진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죄인이지만, 아들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가서 씻고 오라!"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안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알지 못합니다.

98/8/ 부산부녀복지관 부흥회, 불행의 길에 빠졌던 10대 소녀들 100여명이 열심히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소녀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열심히 찬송을 부르던 대부분 소녀들이 손들었습니다. 구겨진 인생, 불행한 가정, 무엇 하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거나, 받을 만 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권사님은 어릴 때, 학교 운동자에서 친구들과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친구가 떨어 뜨린 1원 동전을 무의식 중에 발로 밟았답니다. 친구들이 둘러서서 자기 발을 들라고 하면서, "얘가 내 돈 훔쳤다" "너는 도둑이라!" 손가락질 하였는데, 이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평생을 원인을 알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1 훔친 죄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할 때 해결되었습니다.

할머니 권사님 한 분은 17살에 시집을 갔다가, 남편은 바로 만주에 징용을 가고, 임신을 한 채 친정으로 돌아 왔는데,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나무 껍질도 벗겨 먹던 시절이라, 9 식구였던 친정 식구들의 눈이 차가왔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쌍둥이였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젖을 주지 않아, 죽였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이 죄짐을 평생 지고 살았습니다. 교회 권사가 되고서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죄를 어떻게 하나?" 그래서 기쁨없이 예수를 믿었답니다. 이 권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은 기억도 하지 않으심을 선포하노라" 하는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듣고, 그제서야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IVF 회보에 군에 입대한 한 형제가 [하나님은 사오정이더라]는 글을 썼습니다. "난 군대에 와서 하나님의 또 하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난 이제 하나님은 싫어, 아니 지겨워, 미워" 했더니, 하나님께 말씀하시기를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난 더 이상 하나님을 못 믿겠어. 정말이야" 했더니, 하나님은 "그래 나도 너를 믿어. 앞으로도 영원히 너를 믿을거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저는 구제불능의 죄인이에요. 나는 왜 이 모양이죠, 제가 미워요"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그렇지 넌 정말 사랑스러워, 너는 의로운 내 아들이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난 처음에는 이런 사오정 하나님이 참 답답했으나, 이제는 정말 좋습니다.

저는 이 형제의 고백을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정말 그렇지! 누구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눈이 열립니다. 진정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한마디 하시지 않으셨는데도, 불평했던 것도 죄요, 원망했던 것도 죄요, 낙심도 죄요, 열심없이 신앙생활했던 것도 죄요, 헌신하지 못했던 것도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 권사님, 늘 너무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다고 원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련회에서 촛불 행진을 하던 중, 십자가 지고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엄청나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야 말로 자기가 져야 할 죄값과 저주의 십자가더랍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져야 할 십자가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십자가, 비교가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사명의 십자가에 대한 불평이 사리지고, 눈물의 감사와 감사가 나오더랍니다.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완전히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회심하게 됩니다.

<질문> 당신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누리고 있는 은혜가 있습니까?






























제 4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씻는 능력입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또 하나의 아버지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씻겨 주시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돼지 오물로 엉망인 아들도 끌어 안아 주시지만, 아버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고 돌아 온 아들을 씻기십니다. 왜냐하면 잔치자리에 앉히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도 다 용서하십니다. 어떤 죄도 아버지와 우리를 갈라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하시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는 자녀가 받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양아버지 댁인 시골에 갔다가 헬리콥터가 논바닥에 내려 동생과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밀치고 달려 가는 바람에 동생이 인분더미에 넘어졌습니다.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친척들이 다 얼굴을 외면하여, 그대로는 집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생의 처지가 걱정이 될 뿐, 전혀 더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동생을 데리고 개울가로 가서 옷을 벗기고, 빨고, 목욕시키고, 같이 집으로 들어 갔습니다. 이것이 씻기는 사랑입니다.

얼마전 제가 아는 한 장로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솔직히 [경건한 신앙인]이셨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 장로님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장로님의 딸 중의 한 분에게, 장로님이 회개해야 할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단히 노여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이 일을 위해 자신들이 회개하며 전심으로 기도 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할 수는 없다"고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이 장로님께서 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부인 권사님이 무릅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무릅을 꿇어야 들으시느냐?"고 핀잔하곤 했던 그 분이, 발을 건드리기만 해도, 통증을 견딜 수 없어 하시면서도, 무릅을 꿇게 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매일 무릅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은 참으로 은혜롭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질문> 다음 성경을 읽고 답을 써 보십시오.

① 행 2:38에서 베드로는 누구에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까?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② 요일 1:9에서는 요한 사도는 누구에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까?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차원의 속죄의 역사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자가 영생을 얻게 되는 속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죄와 저주 아래 있던 자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던 지난 날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받을 때, 그의 원죄가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지 뭐,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고 했지, 예수 믿으면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잖아" 이것은 구원의 다음 단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와 능력을 회복하는 속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삶 속에서 다시 죄에 넘어져서 은혜와 능력을 상실하였을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죄를 회개하여, 십자가의 능력으로 씻음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은혜와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장로님, 권사님이셨습니다. 싸우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생들과 밥을 먹다가 장로님, 권사님께서 "목사님, 계십니까?" 하고 사택에 들어오시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동생들과 밥먹다가 말고 건너 방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서, 다들 가시기를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교회 중직자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세월은 오래 흘러, 교회의 중책을 맡았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날마다 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은혜와 감격을 잃어 버립니다. 왜 많은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을까요?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회개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죄를 그냥 넘겨 버립니다. 죄 보다 무서운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으니, 죄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장애물이 된채, 십자가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질문> 당신은 매일 매일 십자가를 붙잡고 사십니까?

이 말은 십자가를 꼭 쥐고 살라는 말도 아니고, 십자가를 옷에 붙이고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산다는 것은, 계속하여 회개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를 붙잡으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성도는 회개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씻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여기서 '죄를 회개한다고 누구나 죄를 씻음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회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구원 안에 있기에, 회개하면 씻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회개해도 십자가가 없기에 씻김을 받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사함을 받았지만, 가룟 유다는 회개했지만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죄씻음을 받는 은혜는 십자가를 붙잡은 사람만이 누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성도의 죄는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까? 반드시 ①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합니다 그리고 죄를 씻겨 주시는 십자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보혈이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여전히 있으나,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성도에게도 죄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 안에 있으나,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음란, 거짓말, 도둑질 등 죄 지은 후 겪게 되는 가장 큰 고통은 두 번째 유혹이 올 때, 이기기가 너무나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견고한 진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이기기 더욱 어려워집니다. 이처럼 한 번 죄 짓는 것이 작은 것 같아도, 엄청난 일입니다. 죄 뒤에는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죄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 했습니다. 이 때 이 진을 깨뜨리는 길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 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 번의 죄로 죄에 사로잡히듯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이 대단히 어렵지만, 한 번 회개하고 죄를 이기면 다음은 이기기가 점점 더 쉬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 더 강한 진을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끊임없이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수조건이 있는데, 회개입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십자가의 죄씻음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회개가 없는 것이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질문> "죄인"과 "회개하지 않는 자", 어떤 단어가 더 문제입니까?

1999년 5월 20일 신문마다 실린 기사, 13년 동안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장이었던 로널드 티먼교수, 학장 관사의 컴퓨터 화일 속에 수천장의 포르노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이 밝혀져서 학장직에서 사임했다는 기사입니다, 예일대학 출신이며, 평소 종교와 도덕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왔던 존경받던 신학자이자 목사인 그가 사실은 포르노광이더라! 포르노에 유혹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었던 삶을 살면, 누구나 이렇게 되고 맙니다.

제 5과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1. 정죄(징벌)과 징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 다음 성경을 읽고 답해 보십시오.

① 롬 8:1, :34 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없다고 하였습니까?

롬 8:34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② 히 12:7-8, 계 3:19 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③ "정죄"와 "징계"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가 죄를 지으면, 정죄받지는 않지만, 징계는 받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를 은혜로 자녀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물과 죄가 있다고 해서 다시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다시는 정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하여 징계를 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온갖 죄를 짓고 살아도 오히려 괜찮은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장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징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그 죄악의 생활 가운데서 내 버려 두십니다. 물론 나중에 심판하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찰이 범죄자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와 허물이 있으면 "즉시 징계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쓰디쓴 비참한 열매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대함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질문> 렘 5: 25에서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하였는지 말해 보십시오.

성도들에게 죄와 허물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살전 5:16) 기도 문이 막힙니다. (살전 5:17) 감사가 사라집니다. (살전 5:18) 마음의 평화가 사라집니다. (살전 5:23) 모든 힘을 다 빼앗긴 채, 무능한 성도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능력은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필요한 것만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성도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죄 위에다 은혜와 부흥을 부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정결하지 않으면 결국 잘 되지 않습니다. 가정, 사업, 건강 다 안됩니다. 그래야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어, 끝까지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타 무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6) 고 하셨는데,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교회와 성도가 순결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회개한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습니다. ① 회개의 열매가 맺혀, 생활이 달라지는 것이고 ② 기쁨이 충만해 지고(시 32:10-11) ③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2. 십자가의 능력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이기는 삶을 살게 합니다.

<질문> 요일 5:18에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97년 독일 유럽 유학생 수련회, 영국에서 [국제비지니스] 전공으로 학위를 하고, 세계 기업을 돌아 다니면서, 활동하는 권재민장로님이 간증을 했습니다. 이 분이 예수님을 믿고도, 한동안 포르노 영화에 빠져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유럽 각국을 출장 다닐 때, 반드시 포르노 영화관을 누비며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출장만 갔다 오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픈 것입니다. 3번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아픔을 깨달아지는 데, 말할 수 없이 회개하였다고 했습니다.

6.25 전쟁 직 후, 전남 어느 섬마을에 선생님이 한 분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진실하신 분이셨습니다. 마을 아이들의 욕하는 버릇을 고쳐 주려고, 어느날 종이 10장씩 나누어 주고, 욕할 때마다 1장씩 빼앗도록 하고는, 한 주일 뒤에 가장 종이를 많이 가진 아이에게는 상을 주고, 가장 종이를 적게 가진 아이에게는 벌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답니다. 아이들은 욕 안하려고 긴장을 했지만, 안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서로 뺏고 뺏기면서 일주일 지난 후, 아이들이 욕표를 점검해 보니, 어떤 아이는 40장을 가진 아이도 있었지만, 한 장도 없는 아이도 한 아이가 있었답니다. 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욕을 하다고 종이를 다 뺏앗겼지만, 친구들의 욕 듣고, 종이를 뺏을 재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점검하는 날, 선생님께서 이 아이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더니, 매를 10대 때리시는데, 돌아서서 세라고 하시더랍니다. 얼마나 세게 때리시는지, 3대까지 맞고 더 이상 맞으면 죽을 것 같아서, 돌아 섰답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선생님을 보는 순간, 선생님께서 울고 계신데,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 놈아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돌아 섰답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매를 다 맞았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안 아프더랍니다. 교실로 돌아와서 책상에 엎드려 울었답니다. 그러면서 혼자서 수없이 되뇌이었답니다. "나는 커서 선생님처럼 될 거야" 이 섬마을 아이가 한국신학대학 정태기교수입니다. 한 선생님의 눈물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능력이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깨닫기 전에는 죄가 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알고나면 죄 짓기 어렵습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고통을 겪으십니다. 십자가에서도 그러셨고, 지금 우리 안에 계시면서도 그러십니다.

<질문> 엡 4;30을 읽고, 당신의 삶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물이 느껴지지는 않습 니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써 보십시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어떤 교우가 자신은 같은 죄를 자꾸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 때문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했다고 여겨, 더 이상 회개하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몇번이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일용할 양식 다음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며 용서의 은총을 구하라 하셨고,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 17:4) 하셨으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계속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죄인중의 죄인이라도 490번 회개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반드시 그 죄에서 이기게 됩니다.

계속하여 회개하는 것은 목욕을 계속해야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늘 깨끗이 씻는 자가 좋은 옷도 입고, 좋은 집에서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더러워 진다고 씻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개없이 사는 성도의 영적 상태는 몸을 안씻고 사는 사람의 육신의 상태와 같은 줄 알면 됩니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한 회개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정말 죄를 미워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 회개도 있습니다.

두 어부가 자그마한 어선타고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어부가 회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술도 많이 마셨고,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노름도 했고,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면, 술도 끊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겠으며, 이 배의 고기를 다 팔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 순간 다른 한 어부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너무 많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약속하지마, 저기 배가 보인다 말이야'

참 회개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죄를 이기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① [남자들의 은밀한 전쟁] 이란 책을 쓴 패트릭 민즈목사님은 진정한 회개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죄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기꺼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울고, 금식하여도, 아직도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② 한 여집사님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상담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 집사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집사님을 거의 실족케 할 지경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의 고백을 듣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여겨, 제 아내에게 그 고백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제 아내에게 마음의 죄를 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죄에서 이김을 얻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진정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③ 한 남자집사가 음란 잡지, 음란 비디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이따금 출장을 가게 될 때면, 항상 이 일로 넘어졌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처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 주세요!. 나를 붙들어 주세요!" 그러나 그는 자신도 억제치 못할 충동으로 유흥가를 배회했습니다. 그의 의지로는 도무지 죄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그 집사님은 자신의 부끄러운 생활을 제게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고, 만날 때마다 서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죄지으러 가는 날, 술집 문이 닫혔거나, 가는 길에서 교인을 만난다거나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으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번은 회사에서 바이어를 접대하느라고 갔던 술집 호스테스가 귀에 속삭이듯이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고는 그곳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마음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던 음란죄는 사라졌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이어지는 목사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늘 모범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모범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1984년 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군목 훈련 중, 대퇴부 골두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준비할 때, 군의관은 제게 다리를 절게 될 각오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당황한 저는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방으로 찾다가, 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서 '하나님!'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 때 저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엉터리 목사였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빨리 군목을 마치고, 유학을 해서 서울의 어느 큰 교회를 담임하는 성공적인 목사가 되던지, 훌륭하다고 존경받는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이용하여 제 성공을 위하여 달려 온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한 없이 울었습니다. 저는 그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의 십자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 다리는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 잡기 위하여 부러뜨리셨음을 알았습니다. 새벽이 다가왔을 때, 저는 제 다리를 주님께 드린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제 다리를 드림으로 다시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면, 큰 은혜라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한마디만 들을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제 평생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또 눈물이 엄청나게 흘렀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는 큰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수술실로 들어 가면서도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에 난관도 있었고, 그후 3년동안 고생도 했지만, 제 다리는 온전히 고쳐졌습니다. 이후, 저 자신의 삶과 목회는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질문> 시 139:23-24을 묵상해 보십시오.

[시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 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질문> 시 51:10 에서 다윗 왕은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남에 대해서만 정직한 마음 갖지 말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내 마음을 보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즉시 회개할 준비가 된 마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보여주실 때, 회개 할 수 있고, 용서받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회복 될 수 있습니다.

은밀히 즐기는 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돈 문제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만 아는 못된 성질이 있습니까? 이 시간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믿음으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글쓴이 : 덩울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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