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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경공부교재

[스크랩] 제자의 길 :제6단원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square11_bronze.gif 제자의 길 :제6단원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제자의 길 :

제 1과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제 2과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제 3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①

제 4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②

제 5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우리의 자세

 

제 6단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요절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제 1과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저는 목회하면서 고민하던 두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서 열심있는 성도들이 왜 시험도 일으키는가?"하는 점이고, 둘째는 "교우들을 위하여 뜨겁게 축복기도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왜 모두 다 응답해 주시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열심은 있지만, 순종이 없는 교인"들이 많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많은 교인들이 무조건 잘되기만 바라지,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이 질문에 답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받는가는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질문> 10: 38-42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말씀묵상은 소홀히 여기고, 여러 가지 일들로 분주합니다. 말씀묵상을 소홀히 할 때, 마르다처럼 온갖 시험들에 휩싸이게됩니다.

 

<질문> 대상 13:7-13과 15:2, 12-15읽고, 다윗이 첫 번째 법궤를 옮겨 때,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 보십시오.


여호아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 오려는 다윗의 열심은 대단하였으나,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를 옮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모르고, 열심만 있는 경우, 오히려 큰 시험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비주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비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시기만 하려고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만약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갔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대화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고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 안에서 주시는 말씀들을 분별하여 듣게 되면서, 믿음의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안에 떠오르는 것이 모두 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것은 마귀의 생각이었고, 어떤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고민하고 갈등하였던 것입니다.

성도가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을 안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롯도 다윗도 기도하지 않고 결정한 것은 다 실패했습니다.

옛날에는 미운 7살이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미운 4살에 죽이고 싶은(?) 7살이라고들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안듣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마음일 것입니다.

<질문> 대상 10:13-14에서 사울 왕의 실패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롬 10:17)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권세있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고 물질을 움직이고 전쟁도 일으키고 세계를 움직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우리 귀에는 수없는 불신의 메시지가 들려 오고 있습니다. 세상의 말, 절망의 말, 필요없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이여 내 귀에 말씀하옵소서!" 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 변화와 기적이 일어 납니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살리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백만명의 영혼을 구원했다고 하는 드와이트 무디 목사님의 어머니, 베시여사는 9남매를 둔 채,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아이들을 다 기를 수가 없어서,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입양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이들은 울면서, 어머니에게 자신을 어떤 고생이라도 하겟으니, 제발 다른 가정으로 보내지는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렇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차마 떼어 놓을 수 없어서 베시여사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러면 좋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받았으며, 밤마다 예배를 드릴 때,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제 2과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질문> 사무엘 상 3:1-14을 읽고 대답해 보십시오.

사무엘이 어릴 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1

사무엘은 어디에 있을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3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 사무엘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4-5

사무엘이 왜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습니까? :7

몇번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찾아 갔습니까? :8

사무엘은 어떻게 하나님 음성을 분별해 들을 있었습니까? :8-9


삼상 3:1-14 사무엘이 사무엘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건입니다. 사무엘이 어려서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12세 쯤 되는 어느 날 밤 성전에서 자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나 보다 하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3번 했습니다. 그 때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나 보다 생각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이제 다시 부르는 소리가 있거든 그 자리에서 무릅을 꿇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당시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던 때였었는데,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성도들 중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듯이 자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알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듣는 일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전도 설교가로 유명한 래리모이어 목사님께서 처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 방법을 몰라서 무조건 성경책을 펼쳐 읽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창 20:7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와 네게 속한 자가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간절히 하나님의 뜻이 정말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한 후, 다시 성경을 펼쳤더니, 겔 18:21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릅을 꿇고 "오, 하나님 뜻을 바꾸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지고, 처음부터 온전히 분별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직접 듣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어떤 권면도 받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마음은 좋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훈련이 없기 때문에, 곧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교인이 제게 "목사님,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나 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만이라도 들어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교인의 문제는 훈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명심할 것은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위의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의 분별과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꾸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 묵상 훈련, 영적 분별 훈련, 실제 생활에서 의 실험 등에 힘쓰면, 얼마가지 않아서,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구나!' "아, 하나님께서 근심하시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뜻이 순간 순간 명쾌하게 깨달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분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이 하나는 세상을 향한 귀, 마귀를 향한 귀가 너무 예민하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유혹, 분노, 질투, 죄짓는 일, 게으름 등의 충동을 받습니다. 하와에게 마귀가 찾아 갔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 보다는 마귀의 음성을 더 크게 들었지 않습니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온 귀순자 한 사람이 남한을 다 돌아보고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주 쇼킹한 얘기입니다. "북한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미친 사회요, 남한이라고 하는 사회는 썩은 사회다"

몇 년전 무너진 서울의 성수대교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정직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무너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에 자신의 가족이 깔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만, 주님 말씀대로 살아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 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 는 것이라"

3.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전, 법궤 앞에서 자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늘 성전 안에 사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늘 교회 안에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3:16]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 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 몸이 성전입니다. 성령이 언제나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늘 의식하고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며 살 때, 하나님의 음성은 놀랍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느 교인이 성령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배운 후에, 혼자 소리처럼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도] 성령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말입니까?" 하시면서 당황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 교인에게 [그 때]가 어느 때인지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고백하기 매우 부끄러운 순간인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은 성령님의 임재를 몰랐기 때문, 성령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 3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①

 

1.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씀하십니다.

<질문> 14:26에서 예수님은 누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히 1:1-2)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그 이후에는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2.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질문> 23:1에서 바울은 무엇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육성을 듣는 것처럼 듣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육성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듣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받았다!]고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사실은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순간이 은혜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신앙, 영적인 나태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우리를 죄로 인한 징벌과 실패에서 건져내시고자 할 때,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위험한 곳을 갈 때, 소리쳐서 그 아이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죄의 뿌리 깊은 유혹에 빠져 있던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을 때마다 경고를 들었습니다. 유혹과 경고의 무서운 싸움이 벌어 졌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 음성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의 갈등이 성령님의 경고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 듣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처럼 죄 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하여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음란으로 인하여 파괴된 가정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매우 강력하게 자신에게 경고하고 계심을 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 복종하였습니다. 그에게 놀라운 승리가 찾아 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기지 못했던 죄의 유혹을 이겼습니다.

3.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양심을 통하여 주시는 경고와 책망 정도 밖에 못 듣는 수준으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양심만으로는 깊은 영적인 지식이나, 사명에 대하여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5살된 제 딸과는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가 한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남자 집사님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성경을 어느정도 읽으십니까?" 그런데 깜짝 놀랍게도 그 날 모인 집사님들 중 예배 시간 외에 성경을 보는 집사님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방의 핵심은 주님이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심방 때,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귀 기울이지 않고, 심방오신 목사님과 심방대원을 대접하는 데만 신경을 다 쓰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카톨릭교회는 라틴어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교회와 성도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질문> 24: 13-35을 읽고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㐀①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②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바로 나다" 하실 만한데, 오히려 성경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신 까닭은 이제부터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지금 내 귀에 말해 주세요"하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신비한 음성에만 의존하는 자세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미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이고, 영적 양식이고, 영적 핸드폰이고, 지도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풍성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제 4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②

 

<질문> 44:28과 스 1:2 읽고 같은 사람의 이름을 찾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는 BC 739-680대의 사람입니다. 그가 200년 후인 BC 530년대 에스라의 시대에 일어난 바벨론 멸망과 고레스라는 이방 왕,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중건할 일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믿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크게 쓰십니다. 미래의 될 일을 보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경이 신문보다 귀합니다.

오직 성경 만이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① 인류의 시작과 인류가 겪는 고통의 문제와 해답에 대하여

② 하나님과 마귀에 대한 영적 진리에 대하여

③ 인류 구원에 대한 복음과 그 완전한 진행 방향에 대하여

④ 인류 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성경을 믿어야 성경을 보게 되는데, 안 믿으니 안보게 되고, 안보니 안 믿어지고는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으십시오. 무조건 믿고 먼저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생깁니다.

① 천국등 수많은 영적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어집니다.

② 영적으로 하나님과 조율할 수 있게 됩니다. 롯이나 다윗이나, 좀더 일찍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았으면, 쓰라린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③ 마귀를 쳐 부수는 말씀의 검을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대 미혹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단이나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유혹의 자리에서 말씀의 검을 뽑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신념은 성경에 의하여 갈라집니다. 믿음은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믿음이고, 신념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말씀에 뿌리를 내린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행함에 근거하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도 체험으로 알려면, 계속하여 흔들립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분별하면, 확신에 거하게 됩니다.

4. 성령의 레마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을 레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라!'는 말씀을 듣고,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성경에 있다고, 모든 믿는 성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는 레마의 말씀이었지만, 모든 성도에게도 레마의 말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고민하고 방황할 때, 바깥 뜰에서, 아이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펼쳐서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상한 마음이 들어 집 안에 들어와, 가까이 있는 성경책을 집어 펼쳐 읽었는데, 그 말씀이 롬 13:11-14의 말씀이었고, 그는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학생 시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하룻밤은 성경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순간, 그는 자신을 항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었습니다.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말씀 그대로를 선포하라' 이때부터 그의 유명한 설교 스타일이 생겼는데, 그가 설교를 할 때면 '성경은 말하기를...'라고 시작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한 중직자가 교회 안에서 처신하는 것이 몹시 못 마땅하여, 그를 책망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그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갑자기 "그를 너무 책망하지 말라,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다른 교인들에게 그 사람에 대하여 물었더니, 한결같이 "그 분, 목사님 오신 후에 너무 많이 변했어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혈기와 판단하는 죄를 막아 주시지 않았다면 큰 시험거리가 생길 뻔 했습니다.

 

반복하여 회개할 때, "이번에도 용서해 주셨을까?" 믿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마 18:22의 말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라는 말씀을 들려 주심으로 그 죄책감과 죄에서 완전히 건져 주셨습니다.

 

5. 예배, 기도, 교회, 환경 등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예배 시간, 기도하는 시간, 교회의 목회자와 여러 성도들, 환경의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말씀과 다른 말씀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 분별 기준에 대하여는 제5과에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제 5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우리의 자세

1. 반드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들려지는 것입니다.

몇 년전 캐나다 토론토 집회 중 그 교회 교인이 아닌 한 집사님 내외가 시간 시간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25년 공직 생활 청산하고 캐나다에 이민을 갔는데, 사업을 위한 진로문제로 고민하다가, 집회 소식을 듣고 참석였다가, 집회 후에 감사 인사를 하시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로 분별할 수 있는지, 한가지만 조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어서 전해 드렸습니다. "사업의 성공보다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성공에 더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좋은 일인데도 좌절시키시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보다 성공에만 매달려 살기 때문입니다.

<질문> 6:21에서 에수님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당신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보물을 둔 곳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보물을 예수님께 두셨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질문> 7: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 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 들어 보고 그대로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식이면 들을 귀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함께 쓸 수 없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돼요, 주님"입니다. 당신이 주님께 "안돼요"라고 말하면 그 분은 당신의 "주님"이 아닙니다. 그 분이 진정으로 당신의 "주님"이시라면 당신의 대답은 언제나 "예"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현재 당신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악한 자가 당신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성도는 "가장 쉽고, 덜 고통스런 길을 선택하는거야!" 하는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쉽게만 하려고 합니다. 부담없는 교회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어떤 성도는 은연 중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대로 가는 가야지"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는 천국가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이익이 많이 생기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굶으면 굶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격 한 가지를 고치라'고 하셔도, 거기에는 놀라운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소심하고 신경질 적인 교회학교 교사인 에드 킴벌이 구두방에 일하는 자기 학생 한 사람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학생은 유난히 학력 수준이 떨어지는 아이였습니다. 킴벌은 이 아이가 부담스러웠지만, 그 날은 이 학생을 찾아 심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강권함을 느꼈습니다. 그 날 이 심방을 통하여 이 청년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가 장차 100만명의 영혼을 구원한 무디목사였습니다. 이 무디 목사님이 유럽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가 중국과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개척 선교사의 위대한 삶을 살았던 스터드선교사입니다. 에드 킴벌에게서 시작된 연쇄 전도운동을 통하여 모다케이 함이라는 사람이 구원받아 그 역시 전도자가 되었는데, 그가 어느 시골 부흥사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수줍음을 잘 타는 한 소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 하였는데, 그가 그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입니다. 이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에서 청중 맨 뒷자석에 있던 한 사람이 결신하였는데, 이 사람은 그 후에 미국 교도소 선교를 활발하게 행하는 콜슨을 회심시키게 되었습니다.

4.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어떤 응답을 기대하는 마음이 강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결혼 대상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경우, 하나님께서 "안闥다'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여관을 경영하면, 짭짤한 수입이 있다는 말에, 여관을 할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받기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만날 때마다 "목사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몇번이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안闥다"고 말씀하셨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집사님은 "그렇게 하라"는 말씀만 듣고 싶었기에 못 들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영적전쟁임을 깨닫고, 먼저 선포해야 합니다.

"사탄아 너를 결박하니, 내 생각을 훼방하지 말라!"

6.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적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판단을 통하여 최종점검해야 합니다. (이단도 성경을 이용합니다)

 

7. 교회나 가정에서 영적 일치를 통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우들과 가족 사이에 영적 일치를 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달라도 성령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성령님의 뜻을 알기 원여 마음을 열면, 성령님께서 일치된 마음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정과 교회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인들 중에 자기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기웃거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줄을 흐트러 뜨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엄청난 손해를 가져 옵니다. 결국 교회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1998년 교육관 건축헌금을 할 때, 일년 생활비 전부 드리자고 아내와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중3학년이 된 큰 딸, 지영이와도 분별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영이에게 말했습니다. "지영아, 아빠와 엄마가 일년 생활비 전부를 건축헌금으로 작정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되면 네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야! 그러니 네 허락도 필요하구나, 너도 기도해 보고, 결정해 다오" 헌금을 작정할 때가 되었을 때, 지영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아빠, 그렇게 하세요.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어요"

8. 스스로 최종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어느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실수를 해도 회복시키십니다. 반드시 배우게 하십니다.

때때로 제게 모든 판단을 의탁하는 교인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언만 하게 할 뿐, 궁극적인 대답을 주시지 않거나, 말하지 않게 하신다고 여겨질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답을 주시는 것 보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더 원하시는 경우가 그렇고, 또 하나는 사람의 말로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경우입니다. "당신이 잘못했어요!" "당신 너무 교만해요!" "당신 너무 욕심이 많아요" 등등





















제 5과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가 되려면

기도의 약속이 이렇게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기도 생활에 실패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엘리야 처럼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가 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조건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

<질문> 약 1:6, 막 11:24에 나오는 기도 응답의 조건이 무엇인지 찾아 보십시오.



기도를 많이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기도가 있고, 기도 시간이 짧아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도가 있습니다. 염려하면서 하는 기도는 열심히 해도, 몸부림일 뿐이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맡기는 기도는 기도하고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믿음의 기도입니다. 문제는 언제, 소원의 기도가 믿음의 선포로 바뀌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우가 고3인 아들을 새벽에 깨워 놓고, 새벽기도회에 와서 간절히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 후, 집에 들어가 보니, 아들이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불을 걷어 치우면서, "이놈아! 너는 어째서 그 모양이냐? 에미는 교회에 가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왔는데, 정작 네가 자면 돼니? 넌 안돼, 안돼" 이 교우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단지 소원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잘됐으면 좋겠다!"에서 "잘 될 것을 믿습니다" 로 바꾸어져야 한다.

<질문> 3:6, 9:32-43을 읽고, 베드로의 선포를 보십시오.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 8년된 중풍병자 애니아, 죽었던 과부 다비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언했습니다. 기도와 선포는 다릅니다. 기도가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질문> 다음은 기도할 내용입니까? 선포할 내용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하였다"

 

② 순종의 기도

 

<질문> 요 15:7을 읽고,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써 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나 이루어진다!" 오해말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약속은 간구하는 자의 순종을 전제로 주시는 약속인 것입니다. 만약 누구에게 인감도장을 맡길 때는 그 사람을 믿으니까 맡기는 것입니다.

 

<질문> 당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면 좋을까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임원 선출, 속회 분할, 선교회 편성 등 교회 일도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날씨는 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역경의 열매' 하지만, 사실 역경을 구해 보셨습니까? 苦盡甘來라 하지만 고난을 구해 보셨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제대로 압니까?

한 농부가 돌덩어리를 금덩어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한 후에, 눈을 떠 보니, 여전히 돌덩어리였답니다. 그가 하는 말 "내 이럴 줄 알았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있지만 순종이 없습니다.

 

<질문> 22:39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③ 의인의 기도

<질문> 약 5: 16에는 어떤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까?

한 교우의 가정에배 때 일어난 일입니다. '가장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가족을 향한 축복권이 있다'고 배운 부인 집사님이 남편되는 집사님에게 가족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해 달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가 무릅을 꿇고 기다리는 상황에서 남편되는 집사님이 마지 못해 먼저 아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였답니다. 그 다음 차례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려는데, 아들이 '킥킥' 하며 웃었답니다. 이 아들이 생각하기에는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밤 늦게 술에 취해서 오는 일이 예사고, 아빠 엄마가 늘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목사님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아빠가 아무리 해도 웃겼던 것입니다. 그 아들의 웃음에 이 남자 집사님도 그만 웃어 버렸답니다. 자기 자신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게기가 되어, 이 남자 집사님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평소의 삶이 바로 되어야, 가족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음을 너무나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열심도 좋고, 많은 헌금도 좋으나, 하나님께서 죄 위에다 복과 부흥을 부어 주실 수는 없으시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인은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죄로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십자가 보혈의 역사를 의지하여, 항상 바로 서는 사람이 능력있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 요일 1:9에서는 어떻게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이기는 기도

 

<질문> 창 32: 28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야곱이 응답받을 때까지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기도하되 응답받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안된다"는 응답일지라도, 분명히 응답받은 자와 그냥 안되는 것은 다릅니다.

 

<질문> 마 26:44에서는 예수님은 몇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까?

고후 12:8에서는 바울이 몇번 기도하였다고 했습니까?

왕상 18:41-46에서는 엘리야가 몇번 기도하였다고 했습니까?


세 번, 일곱번 기도하는 것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기도를 하지 말고, 기도의 눌림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⑤ 일치의 기도

 

<질문> 마 18:19을 읽고, 기도응답을 받는 기도의 조건을 찾아 보십시오.

 

성도는 개인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반드시 합심기도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기도한다고 다 합심기도는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전쟁이 있습니다.

마귀는 분열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기도의 역사를 위하여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엡 4:27)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파가 나뉘고 분열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금물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다 합당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어느 것이 옳으냐?' 보다 '하나가 되었냐, 분열이 되었느냐?'를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합니다. 마귀는 아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하였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일치의 마음은 없이, 옳고 그른 것만 따질 줄 아는 사람은 마귀의 도구로 쓰임받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로 의견 대립이 있었다가 다수결로 한쪽 의견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에 반대했던 교인들은 그 일이 잘 안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이고, 주님의 일인데도 은근히 그 일이 실패로 끝나고, 문제가 생기기를 원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나중에 어려움이 생기자 "그것 보세요. 제가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안이 이런 형편인데, 어떻게 주님의 역사가 교회에 나타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된 이유가 합심하는 일에 소홀히 함으로, 마귀가 틈타는 것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⑥ 사랑의 기도

<질문> 사 58:6-9을 읽고 답을 써 보십시오.

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② 그리하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가장 간절한 기도가 금식기도입니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은 생명걸고 하는 기도요, 자아가 죽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금식은 사랑하는 삶, 나누어 주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잘되기를 축복해 주며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은 외면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여 주님을 부르면, 담대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질문>요일 3:21-23에서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출처 : 믿음으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
글쓴이 : 덩울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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