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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직분론

[스크랩] 제직훈련학교8주과정입니다.









제직훈련학교


TURNING POINT
TRAINING SCHOOL























































T.P.T.S

제직/임원 훈련학교

Turning Point
training School
























1. TPTS의 목적
움직이는 교회( Movement church )
활동하는 교회( Activity church )
살아있는 교회( Living church )가 되어야 건강한 교회이며 뻗어나가는 성장형 교회가 됩니다.
이러한 교회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교회의 핵심 Group인 제직임원들이 1차 적인 책임과 사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내의 대부분의 제직/임원들은 고정관념과 타성의 지배아래 묶여 전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거나 절대적 변화의 필요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늘 교회의 현실입니다.

"TPTS"는 교회 제직들을 8주 동안의 훈련과정을 통해 믿음을 새롭게 확인하고 진정한 교회의 헌신자, 사역자, 봉사자로 서게 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제2의 전환교육 훈련학교입니다.

2. TPTS의 전략

"TPTS"는 핵심적인 7단계 전략을 중심으로 한 훈련 과정입니다.
신앙의 기초에서 헌신에 이르기까지 제직/임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될 필수 과정들을 단계별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1. TPTS란 집중적인 성경적 영적 생활을 확인하고 점검하게 합니다.
2. TPTS란 문제 풀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 게 합니다.
3. TPTS란 개인기도와 공동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준비된 영 적인 지도자가 되도록 체험하게 합니다.
4. TPTS란 서로 섬김을 기초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게 합니다.
5. TPTS란 실천과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구 체적으로 찾도록 합니다.
6. TPTS란 헌신을 통해 궁극적인 교회의 일꾼이 되도록 합니다.
7. TPTS란 기신자를 변화시켜 먼저 된 자가 일하는 교회를 만듭니다.


3. TPTS의 설명과 개요

"TPTS"란 무엇인가?
Turning Point Training School의 약자로 [전환점 훈련학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두 번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꾼으로 세워지는 날입니다. 이것은 초신자이든 기신자이든 누구에게나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하는 동안 변화에 대한 의식의 부족과 안일함으로 인하여 어느새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로 인해 먼저 된 기성교인들이 교회에서 본을 보이며, 교회를 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줘야 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지 헌신에 대한 열정과 믿음이 점점 부족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 결과 교회생활에 지쳐 의례적으로 효과 있는 헌신된 일꾼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TPTS"란 이런 교회의 핵심 Member들을 깨워 참된 교회의 일꾼을 만들고 "신앙의 최우선 실천신앙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성경에서 가장 첫째 되는 제직/임원들의 영적 생활과 직분 감당을 위해 변화되어야 할 우선 순위를 확인하며 다시 새로운 결단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4. 8주 과정의 교안
1주/ 제1과 인생의 T.P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가?"
요한복음 12:36-43

2주/ 제2과 교회의 T.P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16:16-20

3주/ 제3과 복음의 T.P
"복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9:11-22

4주/ 제4과 성령의 T.P
"성령의 사역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2:31-47

5주/ 제5과 의식의 T.P
"창조적 의식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5:35-49

6주/ 제6과 기도의 T.P
"기도의 사람이란 누구인가?"
에베소서 1:15-23

7주/ 제7과 부름의 T.P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21:15-23

8주/ 제8과 신자의 T.P
"신자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디모데후서 4:9-18


5. TPTS의 운영방법

1. 교회의 모든 GBS(Group Bible Study)를 중단하고 제직 전원을 대 상으로 "TPTS"를 실시합니다(행사점검).
2. 일정의 등록금을 정하여 단기학교를 운영합니다(각 강좌 5,000원).
3. 매 시간 출석을 확인하고 끝난 후 시상제도와 수료증 제도를 실시 합니다.
4. 철저히 과제물을 제출하고 매주 확인합니다(수료전 제출/검사).
5. 자원의 공동체 식사를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간단한 식사).
6. 숨은 동역자와 헌신자를 찾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5주부터).
7. 이 과정을 거친 제직을 다음 해의 제직 임명의 자료로 활용합니다.
8. 시간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약 1시간10분).
9. 별도의 경고제도를 통하여 효과적인 결과를 얻게 합니다.
10.개인헌신표를 사용합니다.(뒷면)
11.하나님의 참된 일꾼 자기 체크표를 사용합니다.

6. TPTS의 활용범위

"TPTS"는 이러한 경우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교회의 지도자 Member Group들인 장로, 권사, 집사를 대상으로 실 시 가능합니다.
2. 교회학교 교사들의 Training School(훈련학교)로 실시 가능합니다.
3. 각 구역장과 권찰의 Short Training School(단기훈련학교)로 실시 가능합니다.
4. 새로운 교회의 일꾼들을 위한 집중 훈련과정으로 실시 가능합니다.
5. 목요일 저녁 헌신자를 위한 집회의 특강으로 실시 가능합니다.






7. Program의 순서

1. 나눔의 식탁 / 봉사자
2. 찬양으로(5분) / 평신도 leader
3. 목사소개(사랑의 노래)
4. 은혜 나누기 Ⅰ / 지난주 복습 / 1명 정도 발표(5분)
5. 공동 기도제목에 의한 한마음 기도 / 개인기도(5분)
6. 기도 / 학생 중에서(1분; 과목 앞부분 기도문)
7. Session(50분)
문제풀이(OHP)자료준비(교역자) / 과제물 / 정답자 /
수석졸업자 / 개인상시상
8. 은혜나누기 Ⅱ / 오늘의 Study(5분)
9. 찬양
10. 목사기도




















하나님의 참된 일꾼 자기 체크표



*공부시작 전에는 연필로 마친 후에는 빨간색으로 표시하세요.

제1과 인생의 T.P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가?
요한복음 12장 36절-43절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
어두운 시대를 보고 계시며,
흔들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며 아파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오늘 저희들이 세상의 일들을 멈추고 겸손히 당신 앞에 나와
온 맘으로 제직/임원 훈련학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와 가정과 우리의 자신을 치료하시고,
새로운 은혜를 공급하시어
제직/임원으로서 저희들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는
축복을 체험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곳을 향한
순종의 모습을 갖고 살도록
저희들을 바르게 고쳐 주시길 소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제직/임원 훈련학교 8주 동안 함께 하시고,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제목은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가 입니다.
사람은 동기(Incentive)에 의해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말 하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보다 왜 그것을 하고 있느냐 가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유형의 동기에 의해 살아갑니다.
하나는 옆도 볼 겨를 없이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다른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그 사회는 삭막하고 썰렁하기에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따뜻하고 정이 있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자신을 위해 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결혼도, 가정도,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친구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의식들을 갖고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길 "내가 살고 봐야지!" "내 코가 석자인데...!"
정말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잘되는 것을 보면 얼마든지 그 길을 가겠다는 마음! 내 코가 석자가 아니라 내 코가 없어져도 괜찮으니 당신 코가 더 높아지라고 마음먹는 사회가 좋은 사회요 살만한 세상인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신자도 동기(Incentive)가 잘 되어있어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제직/임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43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신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신자중의 괜찮은 신자라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 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율법에 능통한 자로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대로 산다는 즉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자부하는 사람들이고, 밤낮 기도하며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기도를 잘하며, 경건하며 하나님의 법대로 산다고 했지만 궁극적인 삶의 Incentive, 즉 삶의 동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가장 강조한 부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행하여지는 것이 제일 큰 목표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기도의 목표도 능력이나 축복이나 기적에 대한 응답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동기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간절했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날마다 부르짖던 기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했던 내용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28절을 보십시오.


다시 요한복음 16장 32절-17장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삶의 동기와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이냐, 하나님의 이익이냐, 자신이 죽는 쪽이냐 사는 쪽이냐, 내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냐 라는 손익 계산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이익 쪽으로만 살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며 그분의 목표였습니다.
당신이 얼마든지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만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자꾸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걸고 싸우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고 내가 기분 좋아야지, 네가 영광 받으면 그날 밤은 억울해서 잠을 못 잡니다. 내게 득이 되고 내 손에 뭔가가 들려져야 하고, 뭐 좀 알아줘야지 만족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 영광, 내 자신, 내 것을 찾는 순간은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면 예수가 떠난 사람입니다.

신자들이 실수하는 언어 생활 중에 "그래도 인간인데!" "사람인데!" "섭섭하고 기분 나쁘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선 안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보다 더 중대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합니까?
표적을 보고도 왜 믿음이 살아나지 못합니까?
그렇게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표적들을 주셨는데 왜 믿지 못합니까?
다시 39절과 4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것은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담을 쌓았습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좋은 것들을 주어도 그것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성을 쌓으니 이제는 어떤 것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데 무엇을 더 주시며, 은혜를 모르는데 무엇을 더 허락하시고, 깨달음이 없는데 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엎드려 몸부림치는 데 믿음도, 응답도, 기쁨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목회자나 신자들이 무서워해야 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당신 마음이 아직도 감사치 못하고, 은혜를 모르는 쓴 뿌리들인 억울함, 불평, 불만, 고집, 교만 등과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과 복, 그리고 하늘의 귀한 것들을 포함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인 줄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동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로 두려움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 아이들이 아프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가슴이 덜컹합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야! 너 또 일 저질렀구나!
목사야! 너 또 딴 짓 했구나!
그 때는 더 이상 다른 말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무릎 꿇고 하는 한 마디, 하나님! 이 죽일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나면 아이들이 건강합니다.
어렵던 일들이 사라집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될 때 문제는 사라집니다.

목사나 제직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문을 막으시면 하루, 아니 한 순간도 답답해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루를 굶어도 속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한 끼라도 먹지 못하면 불안하고 속이 쓰려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제직/임원 여러분!
좋은 믿음이란, 적은 것을 보고도 감사하고 감격하는 깨닫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꼭 폭탄이 날아들고,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져야만 정신차리는 수준이라면 상처가 아물 날이 없을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믿음이 병이 들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신자라면 그는 분명히 고쳐야 할 병이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영력 있는 신자, 능력 있는 신자, 믿음이 살아있는 신자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와 섭리로 보고 소홀하게 넘기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신자에겐 모든 것이 필연이며 하나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사사로운 것이라 할 찌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100:3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고 죽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가난과 부함의 권한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건강하고 병들게 하는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신자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의 삶 그대로가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닙니다.
모두가 내가 뿌린 씨앗이며 내가 거두어야 할 운명입니다.
당신의 오늘 환경, 당신의 문제, 당신의 가정사, 당신의 사업, 당신의 교회의 일들 모두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당신의 일이며, 당신이 풀도록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싫어도 해야 될 것들이고,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시어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아보십시오.
당신이 꼭 해야 될 것을 발견하고자 몸부림치시고, 하나님이 그 일과 그 문제 속에서 무엇을 내게 요구하고 계시는지 밝히 보여달라고 매달려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면 그대로 희생하십시오.
고생하라면 고생하십시오. 짐을 지라 하시면 지십시오.
제멋대로 여러분의 판단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후회를 만들어 낼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르면 알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루를 기도해도 안되면 이틀을 기도하십시오. 삼일을 했는데도 무소식이면 30일을, 그래도 아니면 3년을 그래도 아니면 30년을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당신이 기도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렇게 희생하고, 기도하고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동기가 무엇 때문인지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아픔도 뒤로하고, 잠도 못 자며, 매 맞고, 욕먹으면서도 성경책 들고 교회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바울의 신앙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쪽을 늘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평판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못한 적은 없습니까?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교회 오면 잘 믿는 신자 같은데 집에 가면 영 딴 판인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서는 괜찮은 신자 같은데 운전대만 잡으면 영 아닌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편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할 때도 하나님 편입니다. 회의를 할 때도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하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든지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하나님 편에 서서 기도해 보시지요. 지금은 어렵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래야 좋은 신자입니다.
그런데 "집어 쳐요, 죽어도 않데요. 당신이 밥상 엎고 국그릇까지 쏟았는데 뭐가 잘 되겠어!"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말 한마디도 신자답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해야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면 하나님도 당신 편이 되십니다.
언젠가 당신이 답답하고 힘이 들고 지쳐 있을 때 당신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처럼 하나님 또한 당신 곁에 오셔서 격려자로, 위로자로, 그리고 축복으로 당신 편이 되어 당신을 높이고 당신을 위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39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목적 있는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있고, 반드시 이루어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높이고,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의 영광을 위하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시오
.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1절)

그러면서 세 가지 예를 들어주십니다.
구제할 때 나팔을 불면서 하지 말라.
기도할 때 성전 어귀에서 하지 말라.
금식할 때 창백한 얼굴을 하지 말라 하시면서 이런 행동들을 가리켜서 [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이란 (휘포크리테스)라는 말인데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를 의미합니다.
가면을 쓴 신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연기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신자가 무엇을 할 때는 [ ]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무엇이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믿음이 없는 행동인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속마음까지 읽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어렵습니까? 교회 봉사하는 일이 벅차십니까? 남편 때문에 살기 힘이 듭니까? 은밀히 기도하십시오.
아이들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까? 은밀히 기도하십시오.
사업이 어려우신가요? 은밀히 기도하세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은밀히 하십시오.
목사님을 위해서도 은밀히 기도해 보십시오. 심방도 은밀히 하십시오. 당신의 은밀한 그 행동은 당신의 기대 이상의 열매를 맺으며 흡족한 하나님의 일 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자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는 살고있다'는 의식이 철저해야 합니다. 신자란 조명 받으며 박수 받으며 연기하는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닙니다.
신자가 제일 많이 넘어지는 시험거리가 이것입니다.

'신자'란 이미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은 사람이요. 나는 죽었고 예수 이름만 높여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없어졌다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사십시오.
제발 나 좀 알아주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니 내 이름은 빼주십시오.
이게 우리의 싸움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얼마나 했든, 헌금을 얼마나 드렸든, 헌신을 어떻게 했든지, 기도를 얼마나 했든, 전도를 얼마나 했든지 내 이름보다는 주의 이름을 높이는 신자를 하나님이 크게 쓰신다는 하늘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A. B. Bruc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감추어야 할 때 나타내고 나타내야 할 때 감추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될 때 우리는 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될 때 우리는 도망을 갑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이렇게 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위해선 언제나 앞장선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선 목숨걸고 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은 발 벗고 뛰어 가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신자입니다.

또한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수평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창조자이시며 심판주이신 유일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삶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행동해야 합니다.

당신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임을 모두가 알도록 사십시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예수 잘 믿는 것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십시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당신의 가정을 축복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제직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전처럼 당신 자신을 앞세우는 제직이 되시겠습니까?
당신이 결심을 하셨다면 이제 기도하십시오.
오늘의 결심이 결코 때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를 고치도록 무릎을 꿇어보십시오.
당신을 제직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동기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제2과 교회의 T.P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16:16-20





"살아 계신 하나님!
가치관의 혼란과 목표 상실의 위기 시대에
바른 신앙 인으로써 오늘 이 시대를 극복하며,
분명한 삶의 목표와 분명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제직훈련학교를 통해
저희들을 다시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말씀으로 새롭게 서는 기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셨으니
교회를 세우는 일에 먼저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소중한 시간도 성령께서 강력하게 일하시길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제목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는가?
교회를 세워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적어도 제직이면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우리의 교회생활과 교회 안에 허락된 모든 것들을 누리는데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한 두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에베소서 2장 20절-2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요약한다면 예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는 원리 때문에 교회를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척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아주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 ]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설명한다든지, 교회를 말할 때 서로 연결이라는 단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신앙을 말할 때 개인적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를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하지만 서로 연결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나를 중심으로 하지, 서로 은혜 받는 것을 위해 애절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나의 기도의 필요만큼 다른 지체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서로 세워주고 서로 짐을 지는 일들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곳에 필수적 단어는 개인이 아닌 "서로"라는 'Together'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온전한 자기 신앙의 완성을 위하여 "함께"라는 훈련과정이 필요한데, 교회가 바로 그 일을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신앙에서의 실력이란 혼자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결심하고 열심 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혼자 도를 닦는 것도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결코 수도사를 만들어 내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도사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이란 머리나 마음으로 이해되고 생각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만큼 함께 하는 곳, 즉 교회에서 믿음을 발휘 할 수 있느냐가 평가 기준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빛이며,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의 빛이며 세상에서 소금이어야 당연합니다.
어둠을 밝히고, 부패하는 것을 막는 것이 이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 된 삶과 소금 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개인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실천되고, 확인되는 1차적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빛 되기 전에 먼저 내가 빛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밖에 나가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먼저 당신이 사랑의 사람임을 나타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그 일을 못하면 세상에 나가선 입도 벌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 훈련 때문에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당신 곁에 붙여주시고, 당신이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자꾸 그렇게 하도록 당신을 끌고 갑니다.

교회라는 곳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구태여 우리를 교회라는 이름으로 묶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모두가 겸손하고, 모두가 낮아지고, 모두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이면 좋겠지만 어느 교회도 그런 교회는 한 곳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교회를 그렇게 하십니까?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훈련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법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교만한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하며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하고, 믿음 없는 말들로 어지럽히는 사람을 보면 나라도 입다물고 믿음 있는 행동을 해야지 하며 꾹 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른 것입니다.
또한 믿음 좋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뒤를 잇겠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 교회라는 이름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면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눈물로 씨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아픈 마음을 마다하고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교회라는 목적이 " "라는 'Together' 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훈련과 나의 깨어지는 훈련에 실패하면 세상 어디에 가서도 당신의 신앙은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란 서로 연결됨이 핵심이며 함께 지어져 가는 훈련 Center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같은 뜻으로 교회의 본질을 설명한 다른 한 부분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교회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성령강림이 있은 후 오순절 때부터였습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 시대부터 교회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뿌리를 찾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이해시키기 위해 끌고 가시는 예수님의 방법을 관찰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교회를 말 할 때면 왜 베드로가 등장해야만 하는가?
만일 베드로의 우위권을 강조하면 천주교가 돼 버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겁이나 베드로를 빼버리면 교회는 설명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가분의 관계인 교회와 베드로 문제를 풀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무엇을 근거로 했습니까?
무조건 이스라엘 백성이면 됩니다. 이방인은 안됩니다.
이스라엘 국적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그러던 구약의 개념이 신약에 와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앙고백뿐입니다.
국적의 문제에서 고백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구약의 배경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를 찾고 있던 그 시대에 신앙 고백만 하면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간다고 선포했으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겠습니까?

또한 제자들에게도 이 내용은 과거의 모든 기초를 흔들어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신앙고백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선포입니다.
제자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선 절대적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제자라도 신앙고백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6절-8절을 보십시오.


놓치지 마십시오.
제자들도 신앙고백이 필요하고,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태어났어도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구원에 관한 신학적 용어가 바로 [ ]와 [ ]를 비교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생물학적 방법인 육신으로 낳는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해산 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족보의 문제도, 국적의 문제도, 권위의 문제도, 성직의 문제도, 교육의 문제도 아닌 하나님의 개입만이 진정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16장 17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16절)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자신의 의지나 결심이 있기 전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알게 하심과 믿게하심과 깨닫게 하심의 개입으로 인해서만 신앙고백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롬10:11-13).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 ]이 있어야만 됩니다.

왜 이렇게 교회를 설명하면서 주님은 신앙고백을 강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교회의 본질을 다룬 것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란 신앙 고백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건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함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필요하고 시설도 있어야 하지만 온전한 교회란 그 이상의 가치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야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의 교회는 "Together"라는 목표로 무리들이 모여 진리를 훈련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신앙인으로 성숙되어 가는 훈련 장소로서의 의미이고, 개인이 곧 교회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신앙고백을 기초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교회 건물이 거대해도 구원받은 신앙고백이 없거나, 소수에 불과하다면 그 교회는 부실한 교회요 생명 없는 빌딩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죽기 위해 로마로 가기 전 성도들을 모아놓고 간절하게 눈물로 전했던 마지막 Message 가 바로 교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어떤 가치가 있다고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교회라는 이름이 얼마나 영광되고, 하나님이 가지신 목표와 뜻이 얼마나 크셨으면 교회를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교회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교회에 있고, 하나님의 모든 열정도 교회에 있고, 하나님의 모든 힘이 교회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 되는 일을 위해 한 방울의 남김 없는 피를 쏟으셨고 그 피 값으로 교회는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 건물을 위해 피 값을 지불하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피 값을 지불하셨다는 의미는 교회는 곧 구원받은 그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위한 지불이었다는 원리입니다.
당신 한 사람을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투자한 가치를 계산해 보신 적이 있는 가요?
당신을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지불된 값을 셈하여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를 파악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무너지면 이미 당신의 교회는 무너지고 있는 것이며 당신이 바로 세워져 가면 당신의 교회가 바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건물이 무너지고, 교회가 태풍에 날아가는 것은 그렇게 큰 고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교회인 신자들이 교회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면 얼마든지 새로운 건물은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물이 아무리 좋아도 그 안의 교회 즉 구원받은 신자들이 병들고 썩어있으면 그 고통은 건물 무너지는 아픔과 비교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교회 됨을 지키는 것이 곧 교회를 지키는 것이며, 당신이 영적으로 건강한 것이 곧 교회가 건강한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 그대로가 우리 교회의 모습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회를 끌 고가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개인이 다 교회라고 하니까.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개척 나가겠다고 대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2절-2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당신은 교회이지만 교회들이 제멋대로 활동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Head' 즉 '머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른 교회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그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기형적입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입니다.
머리(주님)에서 시키는 지시사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시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는 행동들이 기형적으로 뛰쳐나옵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노출됩니다.
주님이 반대하는 내용들이 여과 없이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바울이 교회로서 신자가 가야할 길을 제시한 말씀이 에베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27절을 보십시오.



교회 된 신자가 머리되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밝히 알며, 온전히 따를 수 있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보라. 전도를 하라. 구제를 하라. 봉사를 하라는 어떤 일을 위한 부름이전에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려면 거룩한 자가되고, 흠이 없는 자가되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세탁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라 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라 입니까? 중요하지만 아닙니다.
교회란 존재(Being)에 관한 문제이지 일(Doing)의 문제는 2차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답게 되는 것이 먼저요 일을 하는 것은 다음입니다.

당신이 영광된 교회로 세워지기 원하십니까?
머리되신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먼저 되십시오.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의로운 신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성결한 신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주름잡힌 것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티없이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싸움이 필요한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 ] [ ] [ ]이 있을 때 그분의 뜻에 순종도 가능하고 그분의 지시사항들이 막힘 없이 나타날 때 교회다운 교회, 제직다운 제직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숨어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분의 잘못된 의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는 의식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산다는 의식으로 말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일을 너무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교회의 일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며 바쁘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바쁠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이하며 일이 많을수록 하나님과의 교제권을 튼튼히 하십시오.
당신의 영혼이 풍성하고 충만해야 교회의 일과 봉사도 풍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 중독자가 되기 전에 당신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성숙되어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고, 깨어있는 영성을 위하여 깊
은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교회라고 부르신 목표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이 되도록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해야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 못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18절).
사탄이 일할 수 없는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요, 힘있는 교회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당신 자신이 교회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당신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생각이나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이 지시하는 것과 다르거나 할 때에 나의 의견과 판단은 얼마든지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최종 결정자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서로라는 교회 훈련 센터에서 교육 중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일을 맡기셨는지 이해되지 않아도 기다려 보십시오. 오늘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참아보십시오.
나의 힘으로 되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일들이 없을지라도 참아보십시오.
나의 능력이나 힘에 부담을 주는 일거리가 맡겨져 있을 때 조금 만 참고 그 일에 순종해 보십시오.
나의 모습을 보고있는 나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을 먼저 제직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당신은 신령한 흠이 없는 교회와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당신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진리의 길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서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며 주님이 이 땅에 보고싶어하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의 표정,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삶 그리고 나의 교회생활이 우리 교회의 신자들과 우리 교회를 향하여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닮고 싶어하는 건강한 제직으로서 쓰임 받기를 기대합니다.










제3과 인생의 T.P

복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9장11절-22절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온전한 교회를 향하여
저희들을 사용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말씀을 대하면서 영적으로 깊은 깨달음을 허락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진정한 복음이 무엇이며
어떠한 신앙생활이 바른 길인가를 알고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공급하여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제3과의 제목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최근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단의 세속화입니다.
둘째는 강단의 타락화입니다.
셋째는 강단의 비복음화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염려되는 것이 구원에 대한 메시지 부족인 강단의 비복음화입니다.
기독교의 참된 복음이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하게 선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세(침)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부르짖던 첫 복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 ]과 [ ]입니다.
기독교는 윤리나 도덕을 강론하며 교양과 수양을 쌓도록 훈련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라. 용기를 갖고 살아라. 도와주면서 살자는 원리를 가르치는 곳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정수는 죄사함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살리는 문제를 다루는 생명의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거듭남이나 죄사함을 통해 생명운동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큰 한줄기의 강으로 흐르는데 궁극적으로 생명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상징은 불타는 가시덤불도 아니며 십계명이 새겨진 두개의 돌 판도 아닙니다.
또한 일곱 기둥의 촛대도 아닙니다.
죽은 후에 찾아오는 후광도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은 [ ]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은 [ ]입니다.

로마시대의 무서운 형벌의 십자가, 그리이스 사람들이 지적했던 형틀의 십자가, 마리아의 마음을 찢었던 비통의 십자가, 바울이 고백했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 바로 이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며,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정의하여 복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중심인 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6:14)

왜 십자가만을 자랑할까요?
예수 믿고 갖가지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이 다른 자랑거리가 없었을까요?
죽을병이든 사람을 살린 것이 자랑거리가 아닙니까? 아시아 지역에 교회를 여럿 세운 것은 자랑거리가 못됩니까? 옥문을 열리게 하는 지진을 일으킨 것은 자랑거리 아닙니까? 삼층천을 본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까?
바울은 이러한 수많은 체험과 감동적인 기적들을 경험했지만 십자가 은혜와 체험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왜 바울이 십자가만을 고집하고 자랑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체험한 십자가는 [ ]이였습니다.
바울이 자랑한 십자가는 [ ]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 보다 더 자랑할 것이 없음을 확신 있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직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독교의 자랑거리를 말하라고 할 때 십자가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고 제일 감동적인 사건 하나를 간증하리라고 할 때 십자가 사건이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떠한 체험도 십자가의 체험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계시하고 있는가?
구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내용부터 풀어보십시다.
구약 시대의 사형제도는 돌로 치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20절-2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 처형합니다.
그런 다음 죽은 시체를 나무나 기둥에 매달았습니다.


구약의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다시 신명기 21장 22절-2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하고 죽은 후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 ]입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정해진 형벌이 있습니다.
죄인은 모두가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죽음으로 선고된 것입니다. 만일 죄가 없다면 그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또 거쳐야 할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뭘 압니까?
이생 관리도 힘든데 무슨 사후 관리를 합니까?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짧은 이생의 삶보다 거기서 살아야될 영원의 날이 훨씬 더 길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은 후에 당신의 영혼이 저주받은 곳에서 계속 고통을 당한다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무서운 말씀이지만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죽음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기에 이 길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능력과 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14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완벽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까?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보다 법을 지켜야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부터 거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이 당해야될 죄의 심판과 죽음의 형벌을 없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해 놓으신 방법이 이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저주받은 자로 삼으셔서 인간이 당해야 될 죄의 형벌을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드신 완벽한 구원의 파노라마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해 놓으신 구원의 여정을 아십니까?
이보다 더 완전하고 더 완벽한 구원의 계시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바울은 이렇게 확신된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5절-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가 그리스도인을 죽음의 율법이나 형벌의 법 앞에 끌고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최초의 죄인에게 내려진 법인 죽음과 저주 앞에 그리스도인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과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인이 받을 형벌과 심판을 다 이루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어느 곳에서 살게됩니까?
[ ]입니다.(롬6:14절)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최고의 축복이며 죄의 율법을 이룬 최대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주고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 히브리서 9장 19절-22절을 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 ]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사람이 범죄하고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곧 [ ]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피의 제사란 생명의 제사이며 사람을 살리는 제사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한 인류의 제물이 되셔서 생명을 구원케 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제물이 되어야 마땅한데 예수께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내가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께서 대신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께서 매달리셔서 죽었다는 의미보다 인간 구원을 위해 완전한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 ], [ ]을 확증케 하는 선언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실은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으심으로 인간은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한 다른 희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능력이며 가장 큰 은혜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란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절정이며,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사람은 구원받는 근거가 되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곧 구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의 근거임을 확신하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가장 완전한 복음은 십자가의 원리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십자가를 자랑하며 그 능력을 힘입어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갑시다.

당신은 진실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깨닫고 그 은혜 아래서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죄의 문제는 언제부터 해결되었습니까?
당신은 죄인입니까? 자유인입니까?
당신은 죄의 종입니까? 예수의 종입니까?

만일 당신의 죄가 처리되지 않았든지 분명한 죄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여전히 당신은 죄 아래에 얽매인 신자에 불과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해 놓으신 구원의 과정을 바라보며 '은혜를 입은 자' '사랑을 입은 자' '용서를 받은 자'로 확신한다면 그 어떤 죄의 형벌도 당신과 무관합니다.

이제 당신이 구원을 위해 해야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다만 그 구원의 감격과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입은 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를 전하십시오.
당신이 체험한 그 축복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에게 내려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이 길을 위해 당신을 먼저 그리스도인 되게 하신 이유가 있고 당신을 제직으로 세우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주 오실 그 날까지 계속해서 전해야될 한마디의 언어는 '예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당신의 가족들에게 전하십시오.
아직도 예수를 모르고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십시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그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 일을 기쁨으로 해야합니다.
그런 감격과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이며 빛을 나타내는 교회입니다.
그 축복된 일을 제직 여러분이 먼저 실천하시길 기대합니다.


















제4과 성령의 T.P

성령의 사역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2:31-47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는
교회를 섬기도록 사랑의 마음과
헌신의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적은 일까지도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자세를 갖게 하옵소서.
그리고 성령께 사로잡힌 자로 먼저 세우시고
그 분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맑은 영적인 눈과
그 분의 말씀 앞에 겸손히 실천할 수 있는
힘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길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오늘 제4과의 제목은 성령의 사역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새 시대를 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서 교회가 시작되고, 땅 끝 복음 전파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건에 못지 않게, 오순절 성령강림은 초대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을 변화시킨 영적인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마치 성령이 역사 하면 모두다 방언을 한다든지, 화끈하게 행동해서 새 술에 취한 모습처럼 얼굴이 붉어진다든지, 이상한 모습들이 나타난다라고 말한다면 오순절 성령 역사의 본질을 잘못 다룬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서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고, 어떻게 변화된 것입니까?
바로 이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이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는 성령이 활동하시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된 결과들에 대해서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면서 이해되어야할 부분은 성령강림의 경험을 통해서 나타났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선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 31절-3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요엘의 예언을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21절을 보십시오.


또 다시 다윗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 25절-2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계속해서 성령강림 후 나타난 영적인 변화에 특이할만한 것이 [ ]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내세관의 변화이며,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령 역사로 인하여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마치 성령강림을 통해서 마음이 뜨겁고, 사이다 같이 튀는 것,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생의 목적이 예수를 위하여 사는 변화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부활신앙이 있기 전에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언제나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는 도망 다니며, 자기에게 유익 되지 않을 때는 서슴없이 예수까지도 부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큰 가치로 보고 제1 소중하게 여깁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근거로 살아갑니다.

베드로가 팔레스틴과 수리아에서 증거 하는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사도행전 10장 38절-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설교는 그 어떤 설교보다 능력이며 완전한 내용입니다.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체험하게 하여 무엇이 진정한 성령의 능력인가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 하면서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궁극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 ] [ ] [ ] [ ]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부활신앙이 중요합니까?
부활신앙이란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고난과 질고를 이기는 승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을 불어넣어 줍니다.
[ ]이 됩니다.
[ ]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의 신자들이 연약한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져야 할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닮자고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경험한 사람은 약한 신자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가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고, 초대 교인들이 자신 있는 신자의 삶을 살았던 비밀입니다.

부활신앙은 죄 의식과 죽음에의 공포로 떠는 사람, 절망과 비통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신자가 당하는 고난이나 삶의 고통과 문제들로부터 싸워 이길 용기를 갖게 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이 신앙을 근거로 했습니다.

제직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교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도피하고 싶을 때,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가 너무 버거워 힘이 들 때, 믿음으로 사는 것에 소망이 없을 때, 교회의 봉사와 사역에 대한 열정과 감격을 잃고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을 때 여러분에게 용기와 믿음 그리고 소망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는 말입니다.
당신이 당한 고통을 주님이 당하신 고통과 비교해 볼까요?
나의 아픔이 쓰린들 주님의 심정 만큼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직 한 가지 부활신앙으로 모든 것을 이기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말 할 때면 부활신앙을 언제나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2절-19절을 보십시오.


바로 베드로의 변화는 이런 부활신앙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예전의 그의 생활은 부활신앙을 경험한 후 완전하게 달라졌습니다.
베드로가 인생의 황혼기에 자서전 적으로 쓴 베드로 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3절-7절을 보십시오.



이제까지 성령강림으로 나타났던 제1의 변화는 부활신앙을 통한 목적의 변화, 인생의 변화, 믿음의 변화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구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난 성령 강림에 의한 변화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하는 삶을 통해서 고난에 동참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 전서 2장 20절-2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성령강림이 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Load) 되심을 고백합니다.
유일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진리의 절대성 안으로 들어 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흔히 다원 주의, 다원 종교라는 것이 기독교에 침투해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구원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불교나 유교나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고 그들과 같이 예수도 하나의 대표교주로 보는 종교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무의미한 것으로 보며 성경도 하나의 도덕경 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기독교인이든, 카톨릭이든, 불교이든 한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맞대면 인간 구원이 가능한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끔 여러분이 TV를 보면 목사, 교수, 스님, 신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같은 맥락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낸 문제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결코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 전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 신관이며 절대 권위입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논하면서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식으로 말하며 불교도 괜찮고, 공자도 괜찮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용납하면 기독교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1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령이 없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의식과 원칙에 분명해야 바른 신앙관을 갖은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구원과 생명을 말씀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유일한 구원주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주되심을 확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일신앙이란 메시아 사상, 메시아 신관, 메시아 신앙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메시아 신앙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고백은 다릅니다.
주님의 다스림과 지배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서 그분의 뜻을 앞세워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성령체험이란 전인격적으로 그의 중심 이동이 이뤄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메시아란 용어를 살펴봅시다.
메시아란 [ ]라는 말과 같습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마샤흐)인데 '기름을 붓는다'라는 데서 파생된 말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예언자인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6절 주의 영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출애굽기 28장 41절, 29장 7절 성별 되었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사사기 9장8절, 사무엘상 16장12절-13절 왕권과 위엄을 뜻합니다.

이렇게 메시아 사상이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활동하시고 승리자, 구속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메시아 사상이 없습니다.
구속주가 되시기 위해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주님을 마치 주문을 외우듯 쉽게 그 사실을 현대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구속의 힘임에도 고난을 피하는 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습관적인 세태를 풍자해서 주님의 고난을 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도신경을 라면신경으로 각색한 풍자적인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라면신경
구수하사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여 주시는 라면님이시여, 라면님을 내가 믿사오며, 그의 자매품 소고기라면을 믿사오니, 이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인들의 손을 거쳐 ,식순이의 손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사, 끓는 물에 죽으시고, 끓인지 3분만에 상에 오르사, 유능하신 젓가락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심이라,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위 속에서 소화된 것과 항문을 통해 나와 거름이 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면

참으로 웃을 수 없는 물질적인 세계관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 신앙인들! 주님의 고난이나 십자가의 사건을 잊고 눈에 보이는 것에 정신을 두고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주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서 부활신앙과 메시아 사상을 갖는 내세관, 가치관, 인생관, 신앙관의 대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얼마나 끓게 하고 폭발시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사건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생명, 부활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향한 시작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주되심이 성령 강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3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삶의 목적을 바꾸어 놓은 것이 성령의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방향이 분명해 졌습니다.
성령의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이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고 주를 의지하며 삽니다.
이것이 신앙의 최고 핵심입니다.
또한 성령 강림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고난받는 것을 기쁨으로 믿었습니다.
단순히 성령 받았다는 것이 어떤 외적인 표시로 등장하는 것보다는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성령받은 것이 얼굴 색으로 표현되고, 눈에 보이고 안보이는 문제로 해석되고, 특별하게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평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귀중한 것입니다.
잠깐 눈에 보이는 것과 진리를 따라사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성령의 열매들을 말할 때 화평이니 인내니 자비니 사랑이니 절제라(갈5:22-23)는 표현은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신자의 눈에 보이는 쪽보다 훨씬 다른 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기도하여 능력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며칠 금식하는 일보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며 절제하는 것은 더 힘이 듭니다.
며칠을 은혜받고 가슴이 뜨겁게 사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고 참는 것은 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 하면 신자는 목표가 변합니다.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꿈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른 것 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철저하게 예수를 나타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바르게 체험한 사람의 가치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당신의 주위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았다고 뛰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 믿음이 약하구나 생각하며 오히려 내적인 변화, 인생의 목표의 변화, 삶의 내용의 변화를 위해 나는 성령받은 자로 살겠다고 결심을 하셔야 올바르게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사랑하며 사는 모습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며 사는 모습을 보이고 세상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정직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고 종으로 사는 모습을 보이는 일에 먼저 증인이 되고 그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중 믿는 신자들이 당신을 닮아가고 싶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능력있는 신자입니다.

베드로가 달라진 모습은 이러한 삶의 목표와 원리에 의해서 부활 신앙과 메시아 사상을 기초로 증인된 생활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인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고,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을 중심으로 사는가에 대한 바른 길을 안내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초대 교인들의 변화나 베드로의 변화가 이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충만한 제직이라면 당신의 삶의 목표는 달라져야 합니다.
성령께 의지하며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령께 붙들린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을 위하여 부름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은 성령의 충만함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면 언제나 인간의 본성이 먼저 튀쳐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유일한 방법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변화된 모습 속에서 성령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해 주십시오.
성령의 강림 후에 나타난 그의 전격적 변화의 모습처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제5과 의식의 T.P

창조적 의식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5:35-49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들을 제직으로 부르셔서 주님의 가장 고귀한 교회를 섬기는 일꾼으로 세우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제직훈련학교를 통해서 우리들의 연약한 부분들이
말씀으로 세워지는 기회가 되게하시고
좀더 나은 모습으로 쓰여지는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며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그 소중한 하나님의 사역들을 바르게
감당하고 힘있게 일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고쳐야될 부분들까지 우리의 전부를 드립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제5과의 제목은 창조적 의식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는냐에 그대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좋은 정보를 듣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말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원리입니다.
행복한 메시지를 듣고, 행복한 것을 생각하고, 행복한 것을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의 행복에 대한 원리를 듣고, 우리 가정의 행복을 생각하고, 우리 가정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면 점차적으로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만일 교회 성장의 원리를 듣고, 교회 성장을 날마다 생각하고, 교회 성장을 쉬지 않고 말하면 교회 성장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취적인 인간형, 긍정적인 사고의식,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사람이나 조직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행복을 만드는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불행을 생각하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후회를 먼저 하면서 안 되는 쪽을 생각하면 후회될 사건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이런 남자 만나서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산다라고 생각하면 그리 후회 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 만나서 무슨 호강이냐. 내 팔자는 배추저린 팔자라고 한탄하는 부인은 결혼은 해봤자 손해야, 안 하는 게 났었다는 부정적이고 불행한 결혼생활이 되버립니다.

결혼 생활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되고, 못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못살게 될 이유만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입니까?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불행을 생각하고, 미운 생각을 하고, 나쁜 쪽을 생각하는 편입니까?
이미 당신의 삶과 운명은 당신의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현명한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은혜는 대리석에 쓰고 미움은 냇물에 흘려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되도록 좋은 쪽의 생각을 품고 살라는 마음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것은 되도록 빨리 잊어 버리십시요.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몸을 지치게 만들었던 말이나 일들, 가정을 싸늘하게 만드는 언어들과 생각들, 교회를 어둡게 만들고 성도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 ]입니다.

어떤 의식을 기초로 하느냐, 어떤 의식으로 사느냐가 모든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의식이 바로 되어 있으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잘못된 의식으로 살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의식과 피해의식으로 살게되면 인생은 고달픈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하고 자신만이 잘난 것처럼 살게되면 고립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식을 소유한 존재인가?
어떠한 의식을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가?
어떤 의식들이 교회나 직장이나 집안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오늘 여러분들은 신앙인으로써 확실한 의식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좋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열심히 주일 성수를 하고,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 있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벌써 세상 속에 기독교의 영향력이나 교회의 위신과 권위가 지금보다는 훨씬 높게 나타나야 당연하겠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힘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깨끗한 나라로 만들 수 있는 힘이있고, 사람이 살기 좋은 최고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한국 교회는 너무나 많은 병이 들어있고 목회자와 성도들 또한 신앙 회복과 의식 회복이 절대 필요한 시기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어떤 총체적인 변화의 불씨를 붙이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판하니까 속상해 하는 분도 계실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잘못했다는 것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는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이 우리 교회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깊이 알자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나 좋은 밭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백 년이 약간 넘었지만 1/4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축복해 주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금도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열심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성도들에게 비교를 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의 10대 교회 중에 4개가 한국교회 입니다.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한국 교회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이 몰려옵니다.
이렇게 세계에 알려진 한국 교회지만 이제는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교회 간판만 걸어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의 옛 기억에 교회 부흥회를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갈 곳이 없어 창문으로 설교 듣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회에 대한 경외심이나 목사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땅에 떨어진지 오래며, 장로님이나 집사님의 이름이 예전처럼 존경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의식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모두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깡그리 몰아 붙입니다만 믿음의 본질은 [ ]에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인격과 성품의 변화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던 습관과 주장이 어느새 상대방의 유익을 위합니다. 자기의 몫과 이득을 챙기기에 바빴던 모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런 달라진 생활을 [ ]라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만일 하나님과 나와는 관계없다는 의식,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극대화시킨다면 바른 신자는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하지 않았는데도 즐겁다면 큰 일 아닙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해야 바른 신자이지 오히려 뻔뻔하면 못된 신자입니다.
이왕에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을 하려면 바르게 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시험 봐서 백 점을 맞았는데 커닝해서 백 점을 맞은 학생과 밤잠 안자고 공부해서 백 점 맞은 학생과는 보람이 다른 것처럼 이왕이면 바르게 신앙 생활해야 진정한 믿음의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바르게 신앙생활 하시길 부탁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의식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확인되어야 될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을 누가 교회로 부르셨습니까?
교회 차가 문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오신 것입니까?
누가 여러분을 썩을 세상에서 불러 예수를 믿게 했으며 구원을 받게 했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주인공입니까?
여러분을 예수 믿도록 부르신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신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반드시 부모님이 있어야 하듯이 혼자서 주님 앞으로 나왔든지, 스스로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셔야 신자가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사실을 입증하는 야곱의 부르심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3절을 보십시오.



누가 야곱을 불렀습니까? 야곱을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왜 물이 침몰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불 속에서도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더 실감나는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45장 1절-7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까?
야곱을 부르신 그 하나님은 [ ]이십니다.
목사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것이 아니요, 선교사만 부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목사든 집사든 신자든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것은 같습니다.
일의 역할만 다를 뿐 부름 받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보다 부름 받았음의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름 받은 의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의 존재는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뿐이지 내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부르심의 의식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습니까?
가문도 별 것 아니요. 학식도 별것 아니요.
물질도 별 것이 못됨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보입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기 전에는 자아 도취, 자기 우월, 자기 교만에 사로잡혀 살다가 주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9절-10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깨달음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을 엎드리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 ]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에는 아직도 현대판 옛 바울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일을 막고 어지럽게 합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연고로 누가 부르셨고, 누가 직무를 맡겼는지를 모르고 마음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하고 편을 가릅니다.
마치 내가 잘나서 내가 아니면 교회 역사가 멈출 것 같은 어리석은 의식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의식으로 어떤 주의 사역이든 감사와 열정으로 더 수고할 뿐입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할 뿐입니다.

이런 의식 때문에 바울은 다시 고린도 전서 15장 30절-31절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본 장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부활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신자에게 부활이 절대적인 축복이며 은혜입니까?
사람의 노력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사람이 도울 일이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빼면 기독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떤 체질을 갖고 어떤 의식으로 살겠습니까?
본문 38절-44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떤 체질과 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 하늘의 육체와 땅의 육체,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자는 모두 신령한 영적 사람들의 모습이고 후자는 썩을 육신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전자는 신자가 추구해야 될 의식이고 후자는 세상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전자는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이고 후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48절-4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도 계속해서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 ]와 [ ]입니다.
그러면 [ ]은 어떻습니까?
짐승의 체질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21절에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한결같이 육신적인 짐승의 체질은 자기 유익만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짐승은 주인도 모릅니다.
짐승은 절대로 받은 은혜에 대해서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먹지 못해도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선 죽는 길을 택합니다.
아무리 육신이 요구하는 것이 위대하다 할지라도 썩을 것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유익 없는 손해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치 있는 길을 택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자가 바른 신자입니다.

바울이 육체를 설명하면서 첫 번째 등장시키는 것이 '음행'입니다.
왜 사람들이 외도를 합니까?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은 생각지 않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가족이나 다른 이들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입히는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약간의 만족에 이끌린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아픔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고통입니다.

그 외에 분쟁이나 시기나 분내는 것이나 모두가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찾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런 체질과 의식이 신령한 의식과 신령한 체질로 바꿔져야 합니다.

[ ]은 어떤 모습일까요?
썩을 것을 심고, 욕된 것을 심고, 약한 것을 심고, 육의 몸을 심는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체질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영광을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이익 되는 길을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신령한 삶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길이 우리가 굳게 지키며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는 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축복과 행복이 올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변화가 교회를 다르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찾고 있을 때 당신이 주님의 몫을 향하여 사는 모습을 보일 때 우리 교회는 달라집니다.
당신이 묵묵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습을 실천하는 그 순간부터 교회는 놀랍게 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의식의 제직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있을 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기분이 좋다든지 마음에 들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가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몫이 없고, 그렇게 자존심 버려가며 하지 않아도 될것같은데 바보처럼 보이며 주의 길을 가고있는 사람은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려고 애통해 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눈물 흘리고, 겸손해 지려고 자기를 버리는 신자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의식으로 살고 있는가요?
주일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 아침 교회를 향하며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 아니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생각을 먼저 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오늘은 주일이기 때문에 그래도 주일은 지켜야 마음이라도 편안하다는 생각은 아닙니까?
우리의 사람의 목표나 예배의 목적과 의식이 누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까?
받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나를 중심으로 한다면 여전히 당신의 믿음은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는 바꾸십시오.
주일 예배란 은혜 받으러 교회를 향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 그대로 참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문제도, 유익의 문제도, 이득의 문제도 아닌 벌써 내게 주신 그 큰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해서 예배의 말씀, 기도, 찬양, 봉헌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본적인 신앙 행위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기다려 지고 사랑하게 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예배 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기도 제목이 다릅니다.
주일을 위한 마음 가짐이 다릅니다.
나는 은혜를 이미 받았으니 오늘 예배를 통해서 저분이 주님을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많은 분들이 굳은 믿음으로 세워지고 치료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니 교회오면 다 보기 좋고, 다 식구같고, 다 형제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축복된 교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교회이고 주께서 보고싶어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그 시대의 모델로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실천해야 될 분명한 의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을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의식을 의식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고 분명한 비전과 의식으로 교회생활을 하신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쓰시고 축복할 것입니다.

창조적인 의식 개발이란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통해 예수를 닮아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도 실망이나 좌절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천국의 여행을 위해 한 배를 타고 주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긴 항해를 하게됩니다.
어떤 파도가 일어나도 우리 선장 되신 주께서 잠잠케 하시면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라보던 의식으로 사십시오.


예수께서 목적하셨던 의식으로 사십시오.

앞의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보며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하나된 모습으로 자기 것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열매있는 사역을 위하여 뛸 때 교회는 신령한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로, 건강한 교회로 세워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제6과 기도의 T.P

기도의 사람이란 누구인가?
마태복음 7:7-11






살아 계신 하나님!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는 신앙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그 위대한 능력으로
힘있게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를 위한 우리들의 믿음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늘 첫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겸손히 하나님을 향하며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제6과의 제목은 기도의 사람이란 누구인가 입니다.

신자들에게 영적인 무기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정도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신앙 법칙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성경을 봐야겠다는 부담과 현재보다는 더 기도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긴장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어느새 일 년이 지났고, 일 년에 성경 한 권도 아니 성경 한 장도 보지 못한 채 보낸 시간들을 후회 할 때가 있습니다. 고작 예배에 참석할 때나 설교 전에 본문을 읽는 순간에만 성경을 펼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가 싸워야 될 군인의 칼이 무뎌졌으니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며 승리를 맛보겠습니까?
성경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만일 성경 말씀을 멀리하든지, 듣지 않거나 볼 수 없다면 어떤 싸움에서도 패하고 말 것입니다.

주의 종 디모데는 성경에 대한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을 보십시오.



성경 말씀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감을 잡으셨지요.
구원을 알게 하는 지혜가 성경에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길을 가도록 성경이 교훈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길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느낍니다.
신자의 행복을 결정하는 나침반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성경 말씀을 듣고, 보고, 읽고, 묵상하지 않고는 그 소중한 가치들과 원리들을 체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이 신자들에게 생명의 양식이며 삶의 꼴이기에 말씀을 사랑하는 것과 체험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의미에서 신자가 반드시 체험해야 될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속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 6, 7장을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산상설교는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내용을 위하여 쓰신 것이 아닙니다.
산상설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5장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다루며 물질의 복 이전에 영혼의 복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참된 가치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6장은 외식하는 사람들을 비유로 하나님 앞에서 사느냐, 사람 앞에서 사느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7장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선다는 필연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한 번은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우리 자신도 비판받을 날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7장 2절을 보십시오.


다시 3절의 더 강한 경고를 보십시오.


이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참 비판은 나쁜 것이구나 이제부터는 비판하지 말자. 이런 식입니까?
아니면 남을 욕하면 벌받으니까 이제부터 욕하지 말자는 것입니까?

본문의 말씀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건너편에 기다리고 있는 천국의 예비학교가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의 의미는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다가 저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매력을 갖고 살던 사람이 저 세상(천국)에서도 매력적으로 살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즐기며 살던 사람이 저 세상에서도 즐기며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만일에 신자의 종말이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니 절대로 안심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뿌린대로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주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말씀하시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5장 11절-12절을 보십시오.



이 땅에 살면서 주를 위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주께서 기쁨으로 나를 안으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실 날이 있습니다.
신자가 당한 그 고통의 무게에 대한 분명한 보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예수도 헛되고, 기독교의 복음도 쓸모 없을 것입니다.(고전15:14)

주님 편에서 살려고 애쓰고, 주를 위해 수고하고, 예수님 때문에 희생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내려 주실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능히 오늘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소망이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의 말씀과 경고의 말씀을 하시다가 돌연히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7절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 구하는 문제 즉 기도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지요.
돈이 모자라니까 돈을 구하라. 몸이 약하니까 건강을 구하라. 사업이 잘 안되니 형통하기를 구하라는 내용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리라는 것입니까?
분명히 이 말씀은 [ ][ ] [ ] 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강조한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기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한 기도!
영적인 삶에 대한 기도!
신령한 것에 대한 기도가 최우선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신이 부르짖고 기도하는 내용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일 큰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까?
혹시 땅을 몇 평 늘리고, 나의 가족이 좀더 혜택을 누리고, 내가 좀 고생없이 사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진실로 내 영혼이 성공해야 된다는 절대 필요성 때문에 기도의 줄을 붙드는 것입니까?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영혼이 죽으면 나는 죽는다는 절대적인 진리 의 길을 가기 위한 기도입니까?

예를 들면 신자들의 병을 진단할 때 내리는 병명 중에 흔히 나타나는 [ ]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 나오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신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영혼의 뜨거운 열정이 없는 사람이 요한 증후군에 걸린 환자입니다.

주를 위한 열정이 없습니다.
이미 싸늘하게 믿음이 식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열정이 식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가 미지근해 졌습니다.
주를 위해 살겠다는 정열이 차가워 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꿈과 희망이 사라저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요한 증후군에 감염된 신자라고 합니다.

현재 나의 상태를 진단해 보십시오.
얼마나 뜨겁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정열적으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9절-11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 ]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달라하면'과 '구하면' 입니다.
기도할 때에 얼마나 간절하게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느냐는 것을 묻습니다.
간절하게 구하면, 정성을 다해 찾으면, 힘을 다해 두드리면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과 열정을 다하는 마음의 기도를 해 보셨습니까?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끈질기게 찾아 보셨습니까?
시험과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열망해 보셨습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몸부림 쳐봤습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동일한 기도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집주인은 한 밤중에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을 두드립니다.
결국 그 끈덕짐과 열심 때문에 친구는 문을 열고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8절-10절)

한 예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끈덕진 과부의 내용이 있습니다.
도시에 원한을 갖고 사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에게 가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타게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혼자 사는 그 여자를 무시하고 원한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부는 끈질기게 매달려 재판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 비유를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눅18:6-8)

이런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끈질기게 생명을 다해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부르짖는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영혼의 풍성함을 위해 원한을 풀겠다는 심정으로 밤낮 부르짖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애타는 마음에서 영혼의 메마름을 호소하고 갈급해 하며 하나님을 찾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 믿음의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진 신자가 점점 줄어듭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살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현재 믿음 위에 열정을 더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의 믿음 정도로는 불안한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좀더 기도해야될 필요성을 요구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속사람이 부요해 지고 강건한 사람으로 세워지기 위하여 기도해야될 절실함이 있지 않습니까?

영혼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끈덕지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결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적이며 끊임없는 열정과 집중적인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며 삶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항구적인 의욕을 갖고 영적인 욕심을 부리며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보다 좀더 높은 영적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분명한 영적 목표를 갖고 세상 사람같은 생각과 생활을 벗기 위해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불의함과 교만 그리고 혈기, 강해져가고 악해져 가는 성질을 다듬기 위한 애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세상이 부럽게 느껴지는 그 모습들을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기도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기도의 내용들이 빈약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기도의 불이 희미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바뀌고, 기도하는 모습이 바뀌고, 기도의 목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간절하게 구하는 신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1절에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는데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필요한 것에 대한 응답이 좋은 것입니까?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이 해답이 누가복음 13장 13절에 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기도하면 [ ]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입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란 말입니다.

돈이 잠시 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정도라면, 성령은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성령은 내 영혼에 활력을 불어 넣어줍니다.
성령은 하나님께 향하도록 나를 이끕니다.
성령은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영혼이 잘되도록 만듭니다.

왜 성령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아시겠지요.
영혼이 잘 되어야 모든 것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먼저 영혼이 잘 되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영혼이 병들면 가정이 병들고, 교회가 병들고, 사회가 병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혼이 잘되면 모든 것이 새롭고 달라집니다.

요한 3서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충만하면 생활이 충만합니다.
영혼이 살면 주변이 삽니다.
영혼의 축복 다음에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과 사업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영적 질서 이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영혼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간절하게 영혼을 살찌우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끈덕짐과 강청 함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부터 목적 있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저를 사로잡아 주시어 당신의 도구로 쓰십시오.
주여! 당신의 나라에서 상급 받는 사람이 되도록 이 땅에서 주의 일을 충성스럽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영적인 눈을 열어 나의 영적 시선이 좀더 높이 보고 좀더 높이 날 수 있는 믿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주의 심장을 가지고 불타는 세상을 보며 간절하게 기도하셨나요?
얼마나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메달려 보셨나요?

이제부터 주의 일을 말없이 감당하기 위해 힘을 얻는 기도를 하십시오.
주여! 말씀에 꿀맛을 느끼도록 나의 영혼의 악한 영을 몰아내 주시길 간절하게 기도해 보십시오.
지금도 세상의 물결에 파도를 타듯 흘러가는 교회와 민족을 보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런 간절함과 애절한 마음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신자가 반드시 체험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통해 구원을 체험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체험 있는 신앙이 있을 때 믿음의 확신과 자신감이 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간절한 체험이 있기 위해 이렇게 사셔야 합니다.
반드시 실천해 보십시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8절)





















제7과 부름의 T.P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21:15-23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를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소중한 사역을 위한
교회의 일꾼들로 세우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저희들의 신앙과 인격이 주를 닮아가게 하시고
생활의 본과 믿음의 본을 보이도록
우리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옵소서.
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주의 쓰임 받는 제직들로 세워졌는지를 깨닫고 영광된 사역을 위하여 날마다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제7과의 제목은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입니다.

세계적 신학자인 화울러 교수는 심리학자인 쟝 피아제의 이론과 윤리학 교수인 로렌스 콜벅의 이론을 기초해서 '신앙이란 6단계로 성장해 간다'는 신학이론을 발표했습니다.

1단계는 원초적 단계로서 징계와 벌을 피하는 방식으로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라 했습니다.
2단계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단계로 물질적인 혜택이나 물리적 혜택을 받는 것이 목표로서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이득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입니다.
3단계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애정을 받는 단계로 자기위치를 확인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4단계는 법을 지킨다는 의식의 단계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입니다.
5단계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근거해서 행동하는 단계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중요시여기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6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단계로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단계를 나누면서 화울러 교수는 말하길 '대부분의 신자들은 1에서 4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하나님과의 계약된 관계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얼마나 성숙되고, 성장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벌이나 징계가 무섭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영적인 수준이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에서 멈춰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열 두 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 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새로운 이름인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름 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자주 흔들렸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종말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쓰라린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평생을 두고 후회하며 잊지 못할 지난 날의 실수에 대해 회개하며 살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평생을 닭이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지난 날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고 전합니다.

어찌해서 주님의 수제자로써 예수님 곁을 늘 따라다녔던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을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물을 던져버리고 부모까지 버리면서 주님을 좇았던 사람입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내놓겠다고 장담했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십니다.
(15절)
(16절)
(17절)

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21:6)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고 큰 것만 153마리 였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될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 왜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주님을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몰아주기 위해서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때때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에는 [ ]이 언제나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왜 예수를 부인했을까? 왜 예수를 버리고 옛 생활로 되돌아 왔을까?
주님의 제자의 길로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지난 세월은 모두 무엇이었는가?
지난 3년 반동안 예수를 좇았던 그때는 무엇이 그를 사로잡았었는가?
이 문제가 언제나 베드로의 숨통을 막고 있었으며 이 문제를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그 해답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기 환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큰배를 몰며 물고기 많이 잡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웠다고 해서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닙니다.
어떡하면 예수를 부인했던 나의 신앙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예수를 버리고 옛 직장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그 행위의 치료가 최대 소원입니다.
신자가 당하는 가장 가슴 아픈 통곡이 무엇입니까?
돈이 벌리지 않아서 원통합니까? 직장에서 진급 안된 것이 분합니까? 남편이 넉넉하게 쓸 돈을 벌어다 주지 않아서 속상합니까? 남보다 덜 가진 것이 분합니까?

신자들이 언제 분합니까?
내 신앙이 고작 이 정도 뿐이 안되는가 하고 느낄 때 분한 것입니다.
참아야 될 때 참지 못하고, 결심했던 것이 깨지고, 주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믿음과 결심이 시들어 버릴 때 분한 것 아닙니까?
이것을 [ ]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고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다면 신앙에 병든 것이고, 내가 마음먹고 그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깨졌는데도 기분이 괜찮다고 느낀다면 중병에 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데도, 설교가 들리지 않는데도 어떤 안타까운 마음이나 반응 없이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이라면 큰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버리고, 제자의 길을 포기했을 때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만 제 정신이겠습니까?
만일 목사가 어떤 어려움 때문에 목회를 포기하고 낚시를 하며 쉰다고 할 때 정말 속이 편할까요?
집사가 은혜 생활도 안된고 믿음이 뒤숭숭할 때 머리를 식힌다고 드라이브한다면 그 바람이 시원할까요? 아닙니다.

옛말에 손발이 따로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따로 손 따로 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영적인 현주소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런 원한에 사무친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찾아오셨으며 고기 잡는 사건을 통해 근본적인 그의 아픔과 고민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는 지난날 베드로의 실수, 실패, 예수 부인, 제자 됨의 포기라는 문제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 ] 때문에 너는 나를 부인했고, 나를 버렸고, 나를 포기했다는 진단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면 예수도 부인하게 되고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아무리 확실한 믿음 위에 서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오늘의 사랑이 부족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수고도 있다. 인내도 있다. 거짓을 용납치 않았다. 부지런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에베소 교회를 겉으로 보면 완성된 지상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열심 있는 교회며, 진리를 고집하는 교회며, 충성스럽게 수고하는 교회이니 본받을 만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교회가 되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에베소 교회는 회개할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고 책망을 합니다.
원인은 다른 것들이 아무리 풍성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졌거나 시들었을 때 어떤 수고와 진리를 수호하는 일 조차도 헛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든 예수를 따르는 일이든 기초는 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꼭 특별하고 희한한 일이 일어나야만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정말 예수 잘 믿는 것이란 [ ]입니다.
첫사랑이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며 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능력 받아라! 축복 받아라! 기도를 하라가 첫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첫째라고 하는 의미는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버리고 부인하게된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에게도 [ ](syndrome:증후군, 증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을 사랑하는 깊이와 농도에 비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회복 되야 할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마치 과거의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뜨겁게 사랑하던 그 믿음이 어느 날 인가 식어지고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그 믿음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디베랴 바다로 찾아오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베드로의 무너진 믿음, 배신의 믿음, 잃어버린 믿음을 치유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접근방법을 기억하십시오.
지금도 우리의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허탈하게 사랑의 결핍에 의한 환자가 된 베드로에게 조용히 물으시던 그 음성이 지금 이 시간 주님의 세미한 소리로 우리들에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질문 속에는 놓치지 말아야 될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현재성을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과거에 네가 나를 버렸다 그러니 오늘은 제자가 될 수 없다가 아니라 과거의 실수보다는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오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잘못을 저지릅니다.
은혜를 받았다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순종을 잘하다가 들이받기도 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일하게 묻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에 사랑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내가 무조건 쉽게 '주를 사랑합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을 끄집어내서는 안됩니다.

21장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가파스 메 플레온 투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각주를 보면 [ ]라고 되어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이 됩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지금 잡아온 물고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지금 잡아온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의 그 어느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들보다 더 주를 사랑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주님이 필요한 것인가요?
물고기 잡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헛수고하며 밤이 새도록 던졌던 그물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좀더 속시원하게 물어볼까요.
돈 벌고, 평안 얻고, 만사가 잘되는 것을 위해 온 것 아닙니까?
그런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신자들이 하는 것 보면 얻는 것이 없으면 교회 안 오실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받기만 하려고 오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고기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온 것이지요.
나에게 이득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밤을 새우면 어떻고, 손에 피가 나며 고생한들 어떻습니까? 주님 만나기 위해 기다린 것이지요.
이런 [ ], [ ], [ ]이 있어야 좋은 믿음 아닙니까?
베드로는 드디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그가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15절)
그런 심정에서만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얼마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만난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 3:6)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현재 은과 금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생애의 전부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높입니다.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보입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베드로를 쓰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고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나는 쓰임 받지 못하고 능력이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를 향한 뜨거운 고백이 없기 때문이고,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마16장).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칼을 뽑아 귀를 자른 사람이고, 모든 일에 발벗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심만 있다고 주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나의 중심이 주를 향하여 불타고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이때부터는 죽음도 문제가 아니며 어떤 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본문 19절-20절을 보십시오.



이제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주께서 확인하신 다음 예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 ]과 [ ]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가야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는 죽지 못합니다.
사랑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가장 고귀한 순교가 사랑의 절정이요 사랑의 폭발이라 부릅니다.

베드로에게 죽음이란 반복해서 듣기 싫은 혐오스런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고통 당하실 때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미 비겁한 행동을 한 과거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죽음의 자리라도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인생 황혼기에 고백했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벧후3:8-13)

그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았고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했고, 희생의 자리에서는 도망자였고, 배신자였던 과거의 베드로!
그러나 이제는 죽음을 사모하고 희생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이런 믿음을 승화된 믿음, 제자된 자의 믿음, 성숙된 믿음이라 정의합니다.

'TPTS'를 공부하는 사랑하는 제직/임원 여러분!
예수를 따른다면서 고생은 없었으면 하십니까?
주의 일을 쉽고 편하게 하시려고 생각하셨습니까?
너무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무겁다고 느끼십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사랑하지만 희생만은 싫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고생은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헌신 없이 주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각오 없이 면류관은 없습니다.
이제라도 그 길을 가십시오.

[ ]가 있다면 찾아가십시오.
[ ]이라면 서둘러 가십시오.

내게 이득을 따지기 전에 희생을 따져 보십시오.
내게 편한 길을 선택하기 전에 주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언제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첫째 순위에 두십시오.

베드로는 실패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휘청휘청 거리며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화려했습니다.
결혼식 보다 장례식이 더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날 목사로서, 장로로서, 집사로서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뀐 후부터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길을 걸었던 베드로처럼 사십시오.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주의 일을 뜨겁게 하다가, 주의 나라에서 만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22절을 보겠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주께서 베드로에게 죽음을 말씀하니까 베드로는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보다는 지금 자신의 결심, 자신의 영혼상태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달란트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전에 내 달란트에 신경을 몰두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내게 맡겨진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름 받았는지를 먼저 깨닫는 것이 우선 입니다.
내 영이 먼저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라고 믿어지고 확신이 있으면 그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을 하고 계십니까?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주를 따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쓰실 것입니다.
어느 교회, 어떤 자리에 있든지 주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은 쓰십니다.
그러나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영광된 쓰임을 받는 자리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네가 주를 사랑합니다. 주여 쓰시옵소서!
이것 때문에 주님은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제8과 신자의 T.P

신자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디모데후서 4:9-18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시고
또한 예수께서 세우신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일꾼으로 삼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을 더욱 굳게 사용하시어
당신께서 맡기신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주의 종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시간을 주셨으니
마지막 시간도 최선을 다하게 도와주시고
우리의 의지와 결심이 곧고 굳어져 열매를 맺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마지막 제8과의 제목은 신자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입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중에서 바울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는 변함없는 투철한 신앙으로 언제나 역동적인 생을 살았던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졌던 무신론 철학자 니이체는 말하길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한 것은 바울의 천재성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바울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에는 어느 마을이든, 어느 도시든 그 순간부터 그 마을 그 도시는 바울의 영향권을 피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로마제국이 바울의 복음 앞에 항복을 선언했으며 전세계를 교구화 한 사람이 바울이며 작은 거인 바울만큼 세계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람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위대하고 기독교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려는 인물은 바울이 아니라 그런 위대한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던 데마 입니다.
바울의 믿음의 친구는 어떤 사람들이고 바울은 그 친구들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바울의 동역자이며 친구인 데마를 추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그 때, 같이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동역자가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생애의 마지막까지 곁에 머물면서 수고한 동역자를 말할 때 사랑을 받는 누가와 데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의 거리를 걸을 때 오른편에는 누가가 있었고 왼편에는 데마가 함께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데마는 바울 가까이서 바울을 느끼며, 바울의 심장을 알며, 바울의 영혼 속에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며, 복음의 찬란한 꽃을 피우기 위해 같은 목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있는 곳이라면 데마도 언제나 함께 한 믿음의 동지였습니다.
바울이 왕성하게 주의 일을 하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데마와 같은 헌신된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데마를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10절)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데마를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들이 데마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바울과 헤어졌기 때문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입니다. 헤어진다고 모두 나쁘다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바로 [ ]가 나빴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로마의 거리에서 보냈습니다.
로마 복음화가 바울의 최대 관심사였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열정과 청춘과 에너지를 로마에 다 쏟았습니다.

6절-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기력이 쇠진해지고 늙어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로마 복음화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해야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할 일은 많고 해는 짧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해서 이일을 계속해 준다면 편하게 죽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절박한 때에 바울의 동역자이며, 믿음의 동지며, 형제인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 버렸습니다.
바울이 죽게되니까. 늙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지니까 가차없이 버립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옳은 일이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되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가장 심한 고통입니다.
여러분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을 때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기쁨으로 계속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옳은 일을 따지기 전에 몫을 따집니다.
사람들은 바른 일을 따지기 전에 손익 계산을 먼저 따져 봅니다.

데마에게 바울은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 사명의식을 갖고 좇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데마를 유식하게 표현하면 기회주의자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배신자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묘사하면서 지옥 가장 밑바닥에 들어간 인물로 두 사람을 꼽는데 가롯유다와 부르터스입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배신자라고 했습니다.

데마는 상황 판단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바울을 따르는 것이 더 이상 자신에게 이득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서슴없이 버렸습니다. 신앙의 의리나 동역자 의식(Partnership)은 없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데마가 바울을 버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데마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세상!
믿음의 동역자인 바울과의 관계를 갈라놓게 했던 세상!
데마를 유혹했던 세상이란 어떤 것입니까?

헬라어에 세상이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세상이란 창조된 땅 단순히 지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세상이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셋째, 세상이란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한 생각과 사상과 흐름, 제도를 가리킵니다.

데마가 바울을 버리게 만들었던 세상은 바로 하나님을 거스리고, 주의 길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악한 생각이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주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나의 생각을 빼앗아가게 만드는 것을 [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 세대란 세상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정욕 적으로 살도록 유혹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며, 예수님의 교훈을 대적하고, 예수를 따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 세상은 악한 영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절-1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들이 경건 생활을 위해 나의 희생을 결심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 예배를 드린다. 기도를 한다. 말씀을 듣는다라는 것이 축복이나 은혜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습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경건 생활과 절제의 생활을 힘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그대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세상 사람이 되 버립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향수 공장에 있다면 이미 여러분의 몸 전체는 향수 냄새가 날것입니다.
아카시아 꽃이 피어있는 곳에 있으면 아카시아향 냄새로 채워집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자라 해도 세상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세상 냄새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 묻혀있으면 언젠가는 그 순수하고 소박한 인간의 그 아름다움을 잃고 세상이라는 공기 속에서 세상을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주로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나의 이성과 생각과 언어와 신앙과 행동은 이미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갈 자리, 안 갈 자리를 구분 잘하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고, 있어야 할 곳 없어야 할 곳을 구별 잘하는 사람이 [ ]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주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여기까지가 데마에 대한 추적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 아닙니다.

왜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1세기 역사 문서의 의하면 데마가 예수를 잘 믿다가 어느 날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생활을 포기한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에 가서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등장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은 니느웨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어디를 향했습니까? 살기 좋고 화려한 도시인 다시스로 갔습니다.
사람은 도망을 간다든지 피할 때 아주 반대되는 곳을 선택합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도망을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 냄새 나지 않는 살기 좋은 곳, 고생 없고, 희생도 없는 돈벌이도 괜찮은 도시를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는 바울 당시에 가장 믿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불과 바울이 6개월을 머물면서 전도를 했는데 도시 전체가 복음화 되는 전도물결이 일어난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니야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믿음의 소문을 각처로 다니면서 소문낸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입니다.
더 이상 바울은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초점은 그런 데살로니가로 왜 데마가 갔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아예 할 생각이 없었다면 로마의 작은 마을에서 살면 편할 텐데 꼭 데살로니가로 가야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마가 로마로 가든 데살로니가로 가든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아닙니다.
데마의 행로는 오늘의 신자들이 걷고 있는 신앙의 행로이기에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기독교가 아주 왕성한 도시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몰래 도망갔던 곳이 데살로니가 입니다.
그 곳에 가면 박해나 고난이 없이도 얼마든지 믿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이 데살로니가를 선호하고 이주를 했습니다.

바로 이런 행렬 속에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기로 약속을 했고, 주의 일을 위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했던 데마가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마가 불신앙으로 옮겨갔다는 의미보다는 희생적인 신앙을 포기하고 안이한 신앙의 길로 갔다는 의미입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박해의 위험성을 실감했습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바울도 죽는다고 하니 더 이상 로마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데살로니가를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를 평가한다면 신자들이 희생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을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굳게 세우고,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기 위해선 교회의 핵심 member들인 제직들의 희생은 필수입니다.
누군가 먼저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하고 주춧돌을 놓는 헌신된 사람이 있을 때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이런 희생과 썩어지는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신자들이 귀하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치 나만 희생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여론이 교회 안에 물들어 있기때문에 어느새 신자들의 행렬은 로마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쪽으로 가고있다는 것입니다.
편하게 예수 믿는 것을 선호합니다.
부담 없는 교회 생활을 원합니다.
희생하는 길을 외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행렬에 끼어 있습니까?
땀을 흘리며 주를 섬기는 신앙에서 방관주의로 흐르는 것, 주를 위해 희생을 미루고 이타적인 신앙에로의 이동, 이것이 데살로니가로 가는 행렬 아닙니까?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선택의 기준이라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이득이 안되면 사람도 버립니다. 이혼도 합니다. 교회도 버립니다. 예수도 버립니다.
그런 후에 아무런 가책 없이 뻔뻔스럽고 쉽게 데살로니가로 가는 행렬에 묻혀 버립니다.

교회에 누가 많아야 합니까?
기독교에 어떤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까?
구경꾼입니까? 일꾼입니까?
오늘의 교회의 얼굴을 보십시오. 신자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일꾼들이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며, 생명을 다해 일하는 진지한 얼굴보다는 데마의 얼굴을 하며 슬슬 숨을 곳을 찾아가는 거북이형 모습들이 아닙니까?

고난의 자리로부터의 후퇴, 희생의 자리로부터의 도피, 주를 향한 헌신으로부터의 도망은 바로 세상 적인 의식들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희생이 없는 교회는 세상이요, 희생이 없는 성도는 세상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4:26-27)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아야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이 마음놓고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제발 나 좀 들어갑시다. 전도할 때 그것 나 좀 주시요.
이렇게 돼야 마땅한 것인데 오라고 해도 안 오고, 갔다 앉혀 놓으면 재미없다고 도망가고 하는 모습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희생을 거절하려는 마음을 먼저 깨뜨려야 교회도 살고 나도 삽니다.
이제는 기독교나 교회가 회복되려면 보통 노력 없이는 안됩니다.
오십시오라고 한다고 옵니까? 십자가 붙였다고 옵니까? 아닙니다.

신자들이 데마처럼 봉사를 거절할 때, 희생을 거절할 때, 섬김을 거절할 때, 내 육신적인 평안을 위해 주를 위하여 바치는 시간을 줄여갈 때 여러분은 지금 데살로니가로 가는 행렬에 끼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데살로니가로 가면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부담도 느끼지 않고, 극도의 어려움 없이 사람들 틈에 끼여 색깔도 드러내지 않고 얼마든지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은 어떤 신앙의 성숙도, 진정한 승리의 맛이나 쾌감도, 주의 일에 대한 보람도 느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살후1:3-5)

믿음이 어떻게 자란다고 했습니까?
성경공부 하라 입니까? 훌륭한 목사 만나라는 것입니까? 특별하게 어떤 일을 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려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으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공부해서 얻는 것이나, 설교로 얻은 것은 모두 지식적인 것으로 잠시 그렇구나하고 동의하고 깨닫게는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라게는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라도 체험을 한 것은 약이 됩니다.
감기에 걸린 아이가 기도해서 기도의 맛을 느꼈다면 기도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보고도 기도응답 한 번 받지 못한 박사보다 더 성숙한 신앙을 갖게됩니다.
성경을 많이 본 것과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체험하고 적용한 것과는 천당과 지옥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라려면 고난은 필수이며 고난을 이겨내면서 믿음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의 꽃과 희생의 꽃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성숙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 때문에 교회에서의 어려움이 신자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교회라는 훈련 센터를 통해 자꾸 부딪치며 깨어지고, 울고불고 하면서 믿음의 질을 높여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생각지 않은 일들이 터지고, 내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나는 이긴다. 이것을 이겨야 내 믿음은 자란다.
그런 사람은 성숙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의 이득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과 축복의 영역까지도 포기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한 부분을 담당하는 희생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을 주께서 찾고 계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희생이 있는 곳이 교회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데살로니가로 향한 데마는 세상을 사랑한 사람, 희생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로마를 택한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 17절-18절을 보십시오.



로마로 향하는 사람의 신앙은 주를 바라보고 사는 신앙입니다.
주께로부터 힘을 얻고 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을 목표로 하는 신앙입니다.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리에 서고 주를 위하여 희생하며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바울은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에 의하면 바울 곁에 "누가가 나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 비록 왼팔은 잘렸지만 경건하고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진 신앙의 동지누가라는 오른팔이 곁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동질성이 중요합니다.
고향이 같은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같은 사람, 목적이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울과 누가는 같은 믿음으로,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일을 하는 동지입니다.

이제 정리해 보십시오.
신앙의 길은 로마로 가는 길과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누가가 가는 길과 데마가 가는 길이 있습니다.
로마는 박해와 희생과 고통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데살로니가는 고민도 없고, 고통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누가가 가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기고 가는 길이며 데마가 가는 길은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득을 먼저 계산하며 도피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데마입니까? 누가입니까?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로마입니까? 데살로니가입니까?

로마에서 데살로니가로 가고 싶은 유혹 속에서 어쩔 줄 몰라했던 베드로가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격렬해지자 베드로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데살로니가로 향하는 언덕에 올라 로마를 떠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늙어서 이 고통을 당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은 대답하시길 '나는 네가 등지고 떠나가는 로마로 가서 너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는 발길을 멈추고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는 로마로 가서 주를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순교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께 저는 묻겠습니다.
앞으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로마입니까? 데살로니가입니까?
[ ], [ ], [ ], [ ]가 있을 때 거절하거나 후퇴하지 마십시오.
그 길로 가는 것이 장차 축복의 길이며, 영광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천국에서 만날 그날까지 계속해서 로마로... 로마로... 로마로... 향하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참된 일꾼 헌신서



하나.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헌신을 약속합니다.
하나. 맡은 바 교회의 직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신 목사님을 위하여 협력목회로 돕습니다.
하나. 성도를 온전히 섬기며 돌보는 일에 헌신합니다.
하나. 교회의 성장과 풍성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합니다.
하나. 교회의 비전(Vision)을 위하여 힘을 다합니다.
하나.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주의 본을 따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교회의 일꾼으로서 온 힘을 다해 교회와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섬기며 헌신하기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년 월 일



서약자








출처 : 전도종합/3700만명의 영혼구령카폐
글쓴이 : 하나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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