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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경공부교재

[스크랩] 설교자와 설교 준비

설교자와 설교 준비

 

 

 

곽선희 목사

 


이 시간은 "설교자와 설교준비" 라는 주제 아래 설교란 무엇이며, 설교자는 누구이며,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설교란 무엇인가?

 세계적인 목회자이자 학자인 스미스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목회를 하다가 부흥이 안되어 목회를 그만두셨던 분입니다. 그는 목회시 출석 성도 250명의 교회로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17년 동안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나 결국 250명의 교회로 성장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실망한 그는 교회를 떠나 건축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일만 되면 그의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집에서 가족과 친구 등 25명을 모아놓고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 공부 모임은 17년 만에 교인 수가 25,000명인 교회로 성장하였고, 그 교회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교회는 300교회가 되고 그 가운데는 교인 수가 8,000명이나 되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폭발적인 교회 성장의 주인공이 된 스미스 목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목 설교의 반대입니다. 제목 설교는 성경과 관계없이 설교자가 다루고 싶은 분야 등에 대해 강연하는 것이므로 결코 설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운동의 반대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운동은 무엇이든지 모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이라 하여도 운동은 인본주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도 반대합니다. 스미스 목사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올바로 전했다면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누구를 '전도해 오라,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러한 것은 복음과 말씀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닏. 성경 말씀 그 자체로도 능력이 있는데 운동을 하는 것은 인본적이므로 어떤 운동이든 운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강한 행정력에 대한 반대입니다. 이것은 일반 경영학을 교회에 도입한 세속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행정 중심의 목회, 프로그램의 목회를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교회는 처음도 마지막도 말씀이고 말씀 외에 인간적인 조직과 행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주장한 스미스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는 교인 등록 절차나 어떠한 조직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조금 지나치기도 합니다 만은 조직적인 현대 미국 사회에서는 매우 신선한 자극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연 설교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등의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는 성경 자체 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어로 현대인에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설교를 학술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현대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재해석된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 해석이란 성경이 의미하고 있는 논의를 찾아내는 것이며 재해석은 그 뜻을 우리의 문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목회자의 설교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순도에 달렸습니다. 즉 말씀의 순수성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는 하지만 그 말씀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예화나 설명을 덧붙이다 보면 나중엔 말씀인지, 만담인지, 옛날이야기 인지 그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에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의 순도가 몇%가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설교(말씀)의 전문화

 현대는 점차로 세분화, 전문화, 과학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과거의 설교는 종합 예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등을 교육했습니다. 당시에는 계몽 사회이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가 전부 계몽적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성도 가운데 서울대학의 철학과 주임 교수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은 특정한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다니면서 20년을 다녔는데 그 이유는 어느 한 교회를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얼마 동안 다니다가 보면 목사의 얄팍한 철학적인 설교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가 소크라테스의 책 한권을 제대로 읽고서 설교를 했겠습니까? 어쩌다가 '너 자신을 알라' 라는 한마디를 알았지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키에르케골이 어떻고, 헤겔이 어떻고 하며 설교를 하는데 철학을 전공한 자신이 볼 때 목사의 말씀이 어설프고 무식하게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교회를 옮기고 이렇게 계속 옮기다가 저희 교회에 와서 등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등록을 했습니까? 계속 교회를 돌아다니시지요" 라고 했더니 이 교회는 철학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고 성경 말씀 중심으로 설교를 하기 때문에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설교도 강연식과 교육식, 계몽식 설교가 아닌 전문성을 요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는 언제나 복음적이어야 하며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만을 전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다른 이야기까지 할 수 있습니까?

 복음도 넒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말할 수 있습니다. 넒은 의미로서의 복음은 예수 믿으면 형통하고 복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이고, 좁은 의미로서의 복음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교인들이 전도할 때에는 '예수 천당'이라고 했을 뿐 길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속에는 '예수 믿어 죄 사함받고 구원 받으라'는 내용이지 그외 다른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복음의 순수한 내용만을 전하면 '비과학적이다, 재미가 없다'는 등의 말들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순수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설교와 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은혜로운 설교를 서로 비교하여 보면 핀트가 서로 상반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목사와 성도가 한 방향으로 수고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반된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인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목사님께 더 좋은 설교, 더 은혜로운 설교를 위해서 신학을 더 연구하도록 밀어드렸더니 연구하면 할수록 설교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은혜는 더욱 떨어집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설교의 정의부터 잘못내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설교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며 더불어 설교의 정의를 올바로 내려야 되겠습니다.

 

2. 설교자는 누구인가?


1)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설교자'라고 하면 사회 제도에 따라 대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고시를 통하여 목사로 안수를 받는 사람을 말하지만, 원래 설교자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제도입니다.

 중공에서는 목사를 세울 때 우리 나라와는 전혀 다릅니다. 중공에선 선정된 사람을 지하 깊은 밀실에 격리시켜 놓고 아침과 저녁에 옥수수죽 한 그릇씩을 주면서 4개월 동안 성경과 신학, 명상 세 가지만을 강의 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마치면 그 즉시 안수해서 목사로 세워 설교자로 만듭니다. 중국이 1950년에 공산화될 때 기독교인이 30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정부 통계에 의해 확인된 기독교인의 숫자는 5천만 입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엄청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4개월간 성경과 신학과 명상을 통해 교육받은 목사가 중공과 몽고를 다니면서 선교하였기에 오늘날과 같은 중국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자의 수를 교단적으로 제한을 하고 정상적인 제도에 따라 그 과정을 수료한 후에야 설교자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만 원래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입니다. 소극적으로 보면 그의 과거나 경력, 지식을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과거와 경험을 하나님께서는 이용하여 쓰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좋은 재료로 쓰셨습니다. 모세도 소명을 받았을 때에 "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뇨" 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쓰시고자 하시면 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부나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첫째는 하나님의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말씀을 모두 주십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을 사랑하는 사람이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목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에 의하면 "요즈음 목사님들의 설교는 양들을 사랑하여 양들을 위로하고 양들에게 은혜를 주고 축복을 해주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마랳서 목회자들이 양들을 사정없이 책망하고 난도질을 하여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이 황폐하여져 사막같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목회를 하면 안됩니다. 설교자는 양을 사랑해야 하고 양을 살려야 합니다.

 한 성도가 어느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른 목사님은 교인에게 책망이나 비판하는 설교도 하시는데 왜 목사님은 하지 않습니까?" 그 목사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도 그런 설교를 하고 싶은데 교인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부정과 부패 속에서 시달리다가 교회에 나왔는데 교회에서 마저 저들을 책망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괴롭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내심 이번에는 책망을 해야되겠다고 생각했다가도 못하곤 합니다." 이와 같은 목사님의 행동은 양을 사랑해서, 양을 아끼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라야 설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에게 유식한척하고 독백이나 하는 사람은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유식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순간부터 이미 그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여 저들을 구원할까? 은혜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그 목회자가 진정한 설교자 입니다. 우리가 조금 실수하면 어떻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그때부터 목사는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 양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설교자의 조건

 

(1) 설교자는 소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에게 제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소명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에 스펄전 목사는 다음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목사라는 직분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 목사로 부름받은 자이며, 둘째 자신에게 있어선 목사의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쉽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라 설교하기 힘들면 안됩니다. 철야 기도나 금식 기도를 통하여 열심으로 기도한 후에도 설교가 계속 힘이 든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로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목사로 소명을 받은 사람은 설교가 제일 쉬워야 합니다.

 예를 들면 화가로서 소명받은 사람은 그림 그리는 것이 쉽고, 피아니스트로 소명받은 자는 피아노 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음대 교수가 피아노를 하루에 5시간씩 치는데 이 사람은 기뻐도 치고, 슬퍼도 치고, 심심해도 칩니다. 만약 피아노를 보고 진저리를 친다면 그 사람은 음악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목사는 설교하는 것이 제일 쉬워야 합니다. 감기로 몸이 불편하다가도 강단에만 올라서면 감기는 간곳없고 언제든지 기쁨으로 설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목사로서의 일이 가장 즐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복음 전하는 일을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인생을 바로 사는 사람들은 휴식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일이 휴식이요, 휴식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카소 같은 예술가는 휴가를 별도로 가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좋아도, 슬퍼도, 몸이 병들어도 그림을 그리노라 밤을 새우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기 때문입닏. 음악가는 음악을 직접 연주하면서 즐기기도 하고 다른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목사도 자신이 직접 설교를 하기도 하지만 방송이나 책, 테이프를 통하여 남의 설교를 듣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가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설교집을 몇 권이나 읽었습니까?" 그는 "남의 설교집을 내가 왜 읽습니까?" 그래서 제가 "당신은 매우 건방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작가가 소설을 쓰려면 최소한 소설 200권 이상 읽은 후에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듣지도 읽지도 않고서야 되겠습니까? 설교자도 다른 분의 설교를 많이 듣고 설교집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한 편의 설교를 읽고 한편의 설교를 하려니까 어렵지 설교집 한권 다 읽고서 설교 한 편을 만든다면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사는 신학과 설교에 관계된 서적을 많이 읽고 들음으로 설교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설교가 쏟아져 나올 정도가 되어야 바른 설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면 최소한 설교15편은 읽어야 합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만큼 사용하지 못합니다. 백을 알아야 하나를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를 알아서 하나를 말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많이 듣고 읽으면서 즐겨야 하며 또 남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 나 자신도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설교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자들 가운데 잘못된 생각을 지닌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옛날에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보충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성경은 여전히 진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진리요, 계속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3)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는 가운데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너희가 내 말을 말로만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으로 들은 것을 감사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살전1:2~5)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씀이 바르게만 전해진다면 구원의 능력, 중새으이 능력, 성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라는 확신 하에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4) 설교자는 교인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요리사와 같고 설교는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은 원래 재료가 중요하지만 지혜로운 어머니, 살림을 잘하는 어머니는 변변치 않는 재료를 갖고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먹음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는 좋은 재료를 갖고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면 그 재료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요리사인 어머니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요리사인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주어야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설교는 독백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교인들이 졸면 설교를 잘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나 강의라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잘 들어야 강의요, 설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설교를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그 교수법의 제 1조가 '재미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설교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졸고 있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인 설교, 정치적인 설교, 지식인을 향한 소리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설교 중에 졸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하기 위해서 주석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설교를 기록하는데 성경의 어려운 내용을 풀이해주는 것은 하나도 적지 않고 있다가 자신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하면 그 즉시 기록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 볼때 은혜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설교가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릴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문제의 해답을 원하고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듣지 않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설교가 너무 어려우면 듣지 않습니다. 설교는 누구나 알아들을수 있도록 쉬워야 합니다. 설교자가 완전히 이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할 때에는 쉬운 말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어려운 말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설교자 자신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설교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표현하되 내용은 깊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되려면 요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입맛을 알아서 그 입맛에 맞도록 요리를 해야 합니다. 여기 교인들이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이 있는데 교인들이 이 음식에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렇듯 교인들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교인들이 즐겁고 기쁘게 먹는지 이 방법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설교자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기탄 없이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카리스마 적인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카리스마적 권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설교자가 자기 극복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높이 우러러보면서 그에게로 모여들자 베드로는 "우리의 경건이 이 사람을 일으킨 것처럼 왜 우리를 쳐다봅니까? 우리를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때 베드로가 자신이 한 것처럼 행동했다면 그는 자기 극복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며 완전히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때는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로 말미암아 수제자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이제는 3,000명의 유대인 앞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자기 극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아들이 가출하여 방탕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교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항상 서로 사랑하며, '우리처럼 믿고 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교리요, 성경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참된 설교자의 자세는 조금 전 부부싸움을 했어도 '아내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설교자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고 교인들에게 성경 읽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가 게으르다고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식이 가출하였어도 모르는 척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교인들에게는 '자녀를 잘 교육시켜야 합니다'라고 설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오늘은 성령이 충만하여 강단에 서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3,000명 앞에서 외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설교자인 것입니다.

 

3.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1) 항상 성경 연구를 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를 하기 직전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성경 연구는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루의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같이 성경과 주석을 보면서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한 노트가 가득히 준비되어 있어서 언제 어느 때든지 설교 제목이 척척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 준비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회를 위해서도 나름대로 계속 성경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요즈음 무슨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요즈음 시편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평소에 성경 연구가 없기 때문에 토요일만 되면 설교 준비하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또 설교 준비의 가장 좋은 시간은 새벽 기도 후부터 아침 식사 전까지 입니다. 그 시간에는 절대로 쉬지 마시고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새벽 기도를 마친 후에 쉬지 말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한다면 몇 년 안되어 말씀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말씀이 없으며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를 위해서는 계속적인 성경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2)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목사는 성경 외에 정신적인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독서는 오늘의 우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삽니다. 좋은 설교는 표현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쓴 수필집을 사다가 매일 아침마다 소리를 내어 1시간씩 1년만 읽으십시오. 그것은 그 내용을 알자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구사력과 표현력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수필을 많이 읽게 되면 혀가 풀어집니다. 그러면 몇 가지 내용만 가지고도 마음대로 구사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갇혀서 신학적 용어레 완전히 속박되어 일반적인 언어를 상실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3) 타인과 친교가 많아야 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도 교제를 잘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도 우리는 설교의 좋은 재료를 얻게 됩니다. 목사들에게 큰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일단 이야기를 시작했다하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설교는 강단에서만 하시고 더구나 믿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아는 첫도 마시고 잘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설교에 대한 많은 재료와 소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4)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에게 어려움을 주십니다. 때로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주셔서 자기와 더불어 싸우게 하십니다. 이런 싸움을 하면서 설교자가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에 어려움을 주신 것도 그런 문제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어려움을 준 것도, 모세의 가정에 어려움을 준 것도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점점 인생의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미안한 말이나 설교자치고 부부관계가 좋고 자녀들도 공부를 잘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신학자, 설교자가 된 사람은 드뭅니다. 어떤 설교자이든지 무엇인가 말 못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을 견디면서 기도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설교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설교를 잘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목사님께서는 어떻게 하여 설교를 잘 하십니까?" 그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이 3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왔을 때는 사회 정의, 세상등 이런 주제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사모님이 자궁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3번 수술하면서 그 동안 생사를 헤매시는 동안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 일을 당한 후부터 목사님의 설교 주제들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시험이란 무엇인가' '인간 실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으로 바뀌는 등 깊이 있는 설교를 하시니까 부흥이 되더군요"라고 하면서 "사모님은 돌아가셨고 현재는 목사님께서 데이트 중이신데 새 가정을 이루었을 때는 무슨 설교가 나올까? 그것이 궁금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목사에게 있어선 특히 자기와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5) 타인에 대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고 하여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고 불쌍한 사람을 심방해 보아야 합니다. 성남에 가면 소경 부부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38가정이나 됩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서는 그 소경 분들에게 식량과 연탄을 계속 대어 주는데 가끔가서 만나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몸으로 직접 봉사할 때 설교 준비에 도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명상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는 많이 하는데 명상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상하는 시간을 조금 더 많이 가져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설교자들은 대개 1시간 명상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읽었던 책을 모두 치워놓고 성경책만 앞에 놓고 1시간 동안 명상하고 설교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설교를 하려면 깊은 명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맗씀을 전하도록 택함받은 설교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를 위해서 철저한 연구와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연구와 독서, 타인과의 친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김, 타인에 대한 봉사,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좋은 설교가 될 때에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신앙이 성장하게 될 뿐 아니라 교회도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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