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봉수목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는 법! (벧전 2:18-25)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사는 법! (벧전 2:18-25)
 
 
초대교회 시절 교회가 로마 세계에 확산되면서 생각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예들이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오면서 로마 시민과 노예가 한 교회 안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주인과 노예가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습니다. 로마가 정복 전쟁에서 포로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렸습니다. 처음에는 천한 일만했지만 나중에는 전문직과 가정의 청지기 나아가 자녀들을 위한 가정교사 모두 노예들이 맡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주인으로 놀면서 감독만 하고 모든 일은 다 노예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법 상 노예는 인간이 아니고 물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노예는 법적 권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이고 살리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많은 노예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교회 안에서 인권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동일한 피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은 모두가 동일하게 구원 받았고,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자들 모두가 동일하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노예 제도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놀라운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노예인 교인들이 노예의 신분을 거부하고 나설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노예들을 선동하여 주인들에게 반항하고 나아가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한 운동에 나서게 될 가능성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 많은 노예 교인들이 살해되기도 했고, 교회는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위험한 단체라는 평판을 듣는 곳도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커다란 장벽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장을 표명한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18절을 보면 “사환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오이케테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노예들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당시 초대교회에 발생한 심각한 신분 차이의 문제에 대해 교회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초대교회와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본문의 내용과 합치되지는 않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치관이 다르고 때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와 관행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한 마디로 말하면 일단 노예 제도를 존중하고, 자기 주인들에게 노예로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악이 관영한 세상, 패역한 세상, 멸망당할 세상, 심판받을 세상 등입니다. 도저히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실 수 없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묵인하고 계십니다. 마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가라지를 뽑을까요? 물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의 존재를 잘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심판하실 계획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될 때까지 일단 묵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죄악이 관영하고, 도저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들도 허다합니다. 당장 어떻게 해서라도 바꿔보고 싶고, 그 억울한 일들을 밝혀보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불합리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때로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을 당하더라도 일단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서 참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하나님께서 이 부당하고 잘못된 상황을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상황을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기가 막힌 상황 가운데 두신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일단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벗어던지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그냥 끝장내고 싶어도 일단 참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뿌려진 누룩입니다. 처음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뿌려질 때 밀가루 반죽에는 별거 아닌 이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누룩은 밀가루 안에 번져갑니다. 서서히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면 결국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고 아주 맛있는 빵이 되게 합니다.

초대교회에 이 심각한 노예제도 문제는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서 결국 노예제도는 폐지되고 이 땅에 모두가 동등한 인권이 인정받는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누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대처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노예로서 죄를 범해서 주인에게 매 맞고,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노예로서 주인께 칭찬 받을 정도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정말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귀한 집 사랑받는 아이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어디 한번 불평하거나 억울하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타협하거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창 39:4을 보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했다고 했습니다. 보디발이 보니까 요셉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눈여겨 지켜보니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맡겨도 될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겼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요사이 정치권의 부정부패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동안 감춰져있던 추한 정경유착의 관행들이 하나 둘씩 들춰지면서 기막힌 장면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의로운 체하며 남들에게 돌을 들어 던지던 사람들이 오늘 부끄러운 모습으로 구속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저 아프리카 하이에나 떼가 혈안이 되어 먹이 사냥에 나선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혈안이 되어 부정부패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죄악의 흐름이 거스르기 힘든 하나의 거대한 탁류를 만들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이 흐름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휘말리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일전에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분명히 제가 사려는 책이 최근에 값이 올라 18000원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확인했고 값이 오른 이유도 제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점에서는 여전히 15000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그 서점 주인이신 장로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가 전에 15000원 받을 때 10000원인가에 받아둔 책이 아직 몇 권 더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책을 13000원에 받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18000원에 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상되기 전에 받아둔 책이기 때문에 인상되기 전의 값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장로님을 통해서 정직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 작아 보이지만 위대한 정직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고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남들은 뭐라고 해도,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게 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은밀하게 유혹해 왔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하며 뿌리쳤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지금 은밀한 죄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녀와 나만 아는 죄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노예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본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노예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히 24절에서 저들이 본 받아야 할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께서 우리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예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처럼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한 변화와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 하나가 줄 서는 것입니다. 아침에 기상해서부터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하는 일이 줄 서는 것입니다. 인원 파악이 되고 나서야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줄 설 때마다 작은 실경이가 벌어집니다. 앞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앞에 선 사람들이 시범 케이스로 걸려 불이익을 당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줄 설 때 슬금슬금 뒤 쪽으로 갑니다. 또 눈치 빠른 병사들은 너무 뒤로도 가지 않습니다. 뒤에서부터 끊어 나올까봐 중간쯤에 섭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앞장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말들은 많이 합니다. 자기는 희생하지 않으려하고 희생의 열매는 먹으려고 합니다. 누군가 앞장 서주기를 바랍니다.

요 12:24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알이 죽지 않겠다고 버티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기로 하고 땅에 뿌려지면 장차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1798년 영국의 의사 제너는 천연두 백신인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우두를 주사하면 천연두에 면역성이 생긴다고 학회에 보고를 했습니다. 학회의 실험 도중 당시 영국의 권위있는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 때문에 그를 조롱했습니다. 어떻게 동물에게 실험한 것을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른다고 놀렸습니다.

그 때 제너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동물 실험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23명의 많은 사람들을 통한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게 실험을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제일 먼저 낳은 지 11일 밖에 되지 않은 자기 아들에게 제일 먼저 주사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장래가 숙연해 졌습니다. 놀라운 자기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이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몰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희생하는 삶을 사십시오. 앞 장 서는 삶을 사십시오. 의미있고 거룩한 손해를 자초하십시오. 거기서 보람과 기쁨과 나아가 하늘의 보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을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이민 왔으니 코리안은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한 미국인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가운데 정체성 혼란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 보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 이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말이랍니다. 한국인의 아름다운 전통과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간직한 채 당당하게 미국인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도 한국에도 유익한 삶을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산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철저한 세상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천국에 들어간 것도 아니어서 전적인 천국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은 이것입니다. 먼저 불의하고 용납하기 어려워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참고 견뎌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물들지 말고 이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에서 희생하여 열매를 맺으며 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