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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송수천목사일반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시 126:1-6)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시 126:1-6)


  본문의 표제에 보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해방의 그 날을 회고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표제에서 보는 것처럼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르는 예배의 찬양과 기도문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가 명확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등으로 지목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에 언급한 사연들을 보면 이 시편이 바벨론 포로이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가 주제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때의 아픔과 괴로움이 너무도 컸습니다. 이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망향의 슬픔에 젖어 눈물로 회개하고 또 다짐하면서 회복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시편은 바로 그 때 지어진 시편으로서 당시의 상황과 백성들의 다짐과 믿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에 잡혀가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까?
  바로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 행위는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 정체성이 무너지고 존재의미가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자 바벨론이 와서 짓밟고 백성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할/
  그러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도 국가도 백성도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70년 간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생활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
  ▶이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까지의 전반부와 4-6절까지의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서는 포로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그들의 혀에 찬양이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은 이스라엘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고, 다른 주변 나라의 호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대사라고 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의 회복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자들의 영성을 깨우쳐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할/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①하나님의 대사(큰일)는 꿈꾸는 것 같이 이루어집니다(1).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던 날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꿈만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 꿈만 같았습니다. 정말 꿈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비벼보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갑자기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은 너무 강했습니다. 해방은 기대조차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절망 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희 나라로 모두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주어진 것입니다. 자기들이 싸워 이긴 것도 아닙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36년 만에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무려 70년 만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해방도 자기들이 강해서 전쟁을 해서 이겨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바벨론 나라의 느부갓네살에게 사로 잡혀간 그들이 그 나라가 망하고, 메대 바사 나라가 새로 서서 그 나라에 '고레스'라는 왕이 된 다음에 넓은 마음을 가진 고레스 왕이 70년만이 사로잡혀 온 그들을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해방 명령을 내렸습니다.
  70년 만에 4만 9천명, 약 5만이 돌아왔으니 그 돌아온 5만 명 돌아온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했습니다. 이 소리는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신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드린 고백입니다. /할/


  ⑴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때로는 어머니 같고, 때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할/
  ▶오래 전 우리나라에 충격적인 잘못된 관습이 있었습니다. 늙어 가망이 없는 부모를 자식이 산 속에 혼자 내려놓고 돌아오는 '고려장'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의 등에 기대있던 어머니가 '얘야, 어디 가냐?'고 묻자, 아들은 억장이 무너지지만 '모르셔도 됩니다.' 산 속을 한참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기 시작하십니다. '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네가 나중에 혼자 내려올 때 길 잃어버릴까봐.' 아들은 어머니를 산에 두고 통곡하며 내려왔답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만드신 하나님이 또한 어머니와 같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모습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도 지니고 계십니다.
  ▶오래 전에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았습니다. 마침 그 날 사자가 등장했는데, 수사자의 별명이 '백수(百獸)의 왕'이지만 알고 보니 놀고 먹는 백수(白手) 같았습니다. 폼만 잡지 아무것도 안 합니다. 사냥도, 새끼양육도, 적과 싸움도 암사자가 합니다. 수사자는 누워 자다가 밥 가져오면 먹고 가끔 폼 잡고 한 바퀴 돕니다.
  어느 날 사자 무리가 고기를 먹는데 하이에나 떼가 급습을 했습니다. 사자에게 하이에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날은 너무 많아서 암사자들이 모두 나무 위로 도망쳤습니다. 하이에나들이 남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수사자가 그 때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한 편의 중국 무술영화가 펼쳐집니다. 일당백으로 하이에나와 싸워 모두 죽이고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수사자를 구박했던 암사자가 내려와 아양을 떱니다.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그리고 해설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왕국을 되찾았다.' 평소에는 어머니다운 모습이었으나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 사자가 못하는 것을 아버지 사자가 단숨에 판을 바꿔 버립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해방도 그런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꿈꾸는 것처럼 나타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고난 가운데 버틸 수 있게 해주시고, 위로와 사랑으로 쓰다듬고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강한 힘으로 판을 뒤집고 단번에 해결하십니다.
  오늘 2절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할/


  ⑵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대사를 꿈꾸는 것 같이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십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바위에서 터뜨려 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와도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할/ 
  우리가 고난 당할 때 두 가지의 영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기의 영성'입니다. '이제 망했어, 죽었어. 돌이킬 수 없으니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여기서 끝내자.' 그런 영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회복의 영성'입니다. '나는 포기 못합니다. 이 상처 그대로, 이 죄 그대로는 못 끝냅니다.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역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70년 그 긴 포로에서 꿈꾸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건져내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할/
  ▶여러분, 아직도 생생한 88올림픽 때의 한 장면을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던 중에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불이 꺼졌습니다. 한 줄기 조명이 비취는 가운데 한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나왔습니다.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굴렁쇠에 메시지를 실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굴렁쇠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찢겼지만 원처럼 또 돌아갑니다. 제 자리에서 도는 것이 아니고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과거로 회귀되는 것 같으나 전진하고 또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굴렁쇠와 같은 회복입니다. /할/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었던 욥의 회복이 그랬습니다. 잘 지내던 욥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지, 재산과 아이들이 다 죽고, 믿었던 아내마저 떠나고 병이 와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남았던 관계마저 다 깨집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빨리 죽여주세요.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그런 욥에게 어느 날, 회복이 옵니다. 떠나갔던 재산이 돌아오고 떠나갔던 자식들이,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병도 회복되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하나님의 회복은 이러합니다. 우리에게 임할 회복은 무언가 더 큰 풍성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어령 박사님은 고령인데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십니다. 얼마 전, TV 대담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시절에, 우리말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믿고 순 우리말을 붙들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시간'에 관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과거를 말하는 '그저께'나 '어제', 현재를 뜻하는 '오늘'도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내일'은 한자어입니다. 이 박사님은 거기서 좌절했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우리 민족은 정말 미래가 없어'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봤더니 내일 다음은 '모레', 그 다음은 '글피', 그 다음은 '그글피', 모두 순 우리말이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야'
  내일은 암담해 보입니다. 가까운 미래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참고 넘기면 모레가 보이고 글피가 보이고 그글피가 보입니다. /할/
  여러분, 어떤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죽음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돌이키시는 부활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문제, 그 상처,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만 오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꿈꾸는 것 같았도다. 아멘' /할/


  ②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사를 행하시고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3).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바벨론으로부터 포로생활을 자그마치 70년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해방령이 떨어져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들이 얼마나 가벼웠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 있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해방되던 날 그랬을 것입니다. 지난 월드컵 때 응원만큼이나 거세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은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병사가 집에 휴가 가는 날 아침 기분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해방의 날은 환희의 날입니다. 통제생활에서 가장 큰 열망은 자유 함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잃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유를 오용하다가 그 소중한 자유를 유보 당합니다. 그래서 결국 힘있는 자에 눌려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36년 간 그렇게 살다가 해방을 받았습니다. /할/


  ⑴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창18장에 마므리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자 아브라함이 그 천사를 극진히 대접하니 천사들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이 소리를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창18:11-12절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런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이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0세가 다 된 노인에게 그것도 경수가 끊긴 사라에게서 생명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아멘!/
  ▶노먼 카슨슨은 웃음치료학자로 유명한 의사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강직성 척추염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현대의학의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치료했지만 환자의 병은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자에게 웃음치료법을 처방했습니다. 환자에게 집에 가서 실컷 웃어보라고 주문한 것입니다. 환자는 그의 말대로 몇 주 동안 계속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부터 노먼 카슨슨은 웃음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웃으면 엔도르핀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웃음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암세포라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유명한 웃음치료학자가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웃음은 능력이며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웃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기쁨과 웃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웃고 살뿐만 아니라 웃음의 선물을 많이 건네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
  우리는 오늘 본문의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입안에 웃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입만 벌리면 웃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이 독기로 가득 차 있으면 입안에도 독이 차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입만 벌리면 독한 말이 뛰쳐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평안하면 그 입에도 평안히 가득 차고 웃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편해야 얼굴도 편하고 웃을 여유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웃음을 읽어버린 시대라고 말합니다. 웃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웃어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키콜트'박사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 몸에 난 상처가 빨리 아문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여자의 팔뚝에 상처를 낸 다음 아무는 시간을 조사한 결과, 웃고 즐기는 사람의 상처가 훨씬 빨리 아물었다고 합니다.
  웃음과 울음은 감정의 배설작용인데 잘 울지 않는 사람은 잘 웃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여성들의 경우 웃는 것은 돈 안 드는 화장이 되지만 우는 것은 화장을 망가트리는 애물단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울고 나서 화장을 고치는 것보다 웃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은 30대 젊은 나이에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콜레라, 이질, 열병으로 쓰러져 가는 병사들과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밤 낮 가리지 않고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그는 극심한 피로로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그를 쓰러트린 것입니다. 훗날 학자들은 만성피로 증후군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이 80이 지난 화가 '피카소'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플라멩고 춤을 추는가 하면 그림, 조각, 시, 희곡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이유는 늘 웃으며 낙천적으로 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할/
  우리 조상들도 웃음에 대한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웃는 문으로 만 가지 복이 들어온다(笑門萬福來)',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성내면 한번 늙는다(一笑一少 一怒一老)'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웃느냐 입니다.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고 기뻐할 일보다 화낼 일이 더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웃음은 빙산도 녹인다'는 책을 쓴 '노사카 레이코'의 말을 빌려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습니다. '어! 감기네. 이를 어쩌지? 내일 중요한 면접시험인데 컨디션이 왜 이 모양이야. 보나마나 내일은 열이 나겠지. 이놈의 감기는 왜 나만 졸졸 따라다녀? 재수 더럽게 없군. 왜 하필 이럴 때 감기야'라고 생각하고 투덜거리는 순간 실패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락없이 그 사람은 다음날 열나고, 머리는 멍해지고 면접시험에는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습니다. '어이! 시원하다! 속이 뻥 뚫리네. 속이 시원해지는 걸 보니 내일 면접시험에 붙을 것 같구먼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며 '팽!'하고 코를 풀어버리고 준비하는 사람은 다음날 시험도 잘 치루고 일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노사카 레이코는 이것을 플러스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웃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⑵그런데 웃음을 지칭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호쾌하게 터트리는 웃음은 폭소입니다. 살포시 입술을 움직여 웃는 웃음은 미소입니다. 온통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 웃는 웃음을 파안대소입니다. 싸늘한 표정으로 '웃기고 있네'라며 짓는 웃음은 냉소입니다. 때와 장소도 안 가리고 피식거리고 헤프게 웃는 것은 실소입니다. '제 까짓게 뭘 안다고 까불고 있어'라며, 그러나 체면상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은 비소입니다.
  우리에겐 폭소, 미소, 파안대소가 필요합니다. 냉소, 비소, 실소는 좋지 않습니다. 이런 웃음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한 품은 여자가 비 오는 날 밤 소복입고 짓는 웃음과 같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웃음 그리고 그냥 웃는 것입니다. /할/


  ⑶그런데 우리 속에서 웃음을 빼앗아 가는 원인들이 있습니다.
  ㈀죄는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죄를 감추면 불안해집니다. 불안은 염려, 걱정, 스트레스를 만듭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죄는 평안을 앗아가고, 불안과 염려 걱정의 부피를 더해줍니다.
  ㈁자존심은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적당한 자존심은 그 사람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존심은 자신의 영혼과 인격을 경직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꺾어버려야 합니다. /아멘!/
  ㈂환경은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인 탓으로 환경이 열악하고, 먹고살기가 힘들고 하는 일이 어려우면 반사적으로 웃음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빌3:1절에서 바울 사도은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쁨과 웃음의 원인을 수평적인데서 찾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좋고, 기쁘고, 평안하고, 그래서 웃으라는 것입니다. /할/


  ⑷웃으면 어떻게 됩니까?
  ㈀웃으면 잠든 에너지가 살아납니다. 신체리듬이 되살아나고 엔돌핀이 살아납니다. 티 임파구가 증가합니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신체의 활동이 원활해집니다. 신경성 질환이 치료되고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의학자들의 말입니다.
  ㈁모든 분위기가 바뀝니다. 인간관계가 바뀌고, 집안 분위기가 바뀌고, 교회 분위기가 바뀌고, 나라 분위기가 바뀝니다. 분위기가 바뀌면 일의 능률이 오르고 생산량이 늘어납니다.
  ㈂내 영혼이 회복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확실하면 구태여 한숨쉬고, 낙심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의 태도가 바뀌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웃으며 산다는 것은 내 믿음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증거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듭니다. 소는 기분이 좋으면 귀를 쫑깃쫑깃 합니다.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웃습니다. 내 영혼이 기뻐하면 그 기쁨이 얼굴로 나타납니다. 얼굴은 내 것이지만 보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게 됩니다. 남이 보는 내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어떤 분은 항상 심각한 얼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초조한 얼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멍청한 얼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울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성난 얼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미소 띤 웃는 얼굴입니다.
  제 아무리 비싼 돈주고 성형을 했더라도 성난 얼굴은 예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주름진 얼굴이라도 웃는 얼굴이 매력 넘치는 얼굴입니다. 웃고 삽시다. 웃음을 주고받읍시다. 우리 사회, 우리 교회를 웃고 웃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듭시다. /아멘!/
 

  ③돌아온 자들의 기도가 무엇인가?(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그들이 비록 바벨론에서 구원받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꿈만 같은 해방을 기뻐하면서도 아직 성취되지 못한 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에는 '주님 남방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사로잡힌 우리가 다시 한 번 번영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공동 번역에는 '여호와여, 저 남방 강바닥에 물길이 돌아오듯이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 오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아직도 미완성의 해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온의 해방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포로는 반밖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 남은 자가 마저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이 기도대로 제 1차 귀환, 2차 귀환 이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할/
  또 하나는 '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진 성전과 파괴된 도성과 처절한 민생의 생활을 회복케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남방의 시내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사막과 같이 늘 말라 있는 상태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늦은 비를 내리 사, 남방 시내에 물이 흐르듯이, 시온의 포로들에게 '영과 육이 아울러 윤택한 축복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하는 기원입니다. /할/ 이 기원이 우리의 기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④돌아온 자들의 결단이 무엇인가?(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인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땅은 70년 동안이나 버려져 있었던 땅입니다. 기름졌던 땅은 잡초와 수목으로 우거졌고, 성벽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에는 들짐승들이 우글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국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이제 황무한 이 땅을 개간하려면 눈물겨운 고통을 감내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쁨의 미래를 바라보며 다짐하기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할/


  ⑴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본문은 단순한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씨를 뿌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기쁨으로 거둔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씨를 뿌리는 자가 눈물로 뿌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땀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눈물은 씨를 뿌리는 자의 열정과 정성과 수고를 말합니다. 땀도 열정이겠지만 눈물은 더 간절한 정성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인간 편에서의 최선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 좋은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열정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거두지 못합니다. 정성과 열정을 쏟지 않고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로 수고해야 모든 것은 얻어집니다. 
  ▶'헨리 클라우드'라는 학자는 '변화와 치유'라는 책에서 '가장 먼 길은 지름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빨리 가고 싶어합니다. 쉽게 가고 쉽게 벌며, 쉽게 무엇이 되고, 빨리 무엇을 이루고자 합니다. 벼락성공이나 벼락출세를 하고 벼락부자나 벼락감투를 얻고자 합니다. 
  급 발전, 고속 승진, 급성장, 고속 적인 부흥을 원합니다. 그러나 먼저 눈물과 땀을 친구로 삼고, 항상 수고해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공은 바로 거기에서 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 열정 없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할/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켜는 꿈을 가진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0세 때 공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12세 때는 왕비의 초청을 받아 연주도 했습니다.
  그는 1859년부터 연주 여행을 시작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작품을 쓸 정도였습니다. 그가 바로 19세기에 스페인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입니다. 한 유명한 평론가가 그를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천재라구요? 나는 3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14시간씩 연습했을 뿐입니다.'
  에디슨은 '영감 1%와 노력 99%로 발명왕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천재는 타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머리를 주어도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을 줘도 수고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열정과 수고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합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힘써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두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눈물을 귀하게 보십니다. /할/
  ㈁또한 여기 눈물은 열정과 수고인 동시에 아울러 '과정'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과는 기쁨으로 거두는 것이라면, 과정은 눈물로 뿌리는 것입니다.  
  사실 결과는 우리의 영역이거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부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눈물입니다. 눈물의 아름다운 과정이 기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눈물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과정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생과 우리 신앙의 삶에는 무엇보다도 과정이 중요함을 여기 '눈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눈물이 때론 아픔과 도전과 역경을 통과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눈물을 강조합니다. 땀은 수고이지만 눈물은 아픔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과정은 때론 아픔이고, 고통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평온한 과정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때론 뼈를 깎는 과정을 지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기쁨의 열매는 벅찬 감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호두 농사를 하는 농부가 하나님을 찾아 와 이렇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일 년 만 날씨를 맡겨주십시오. 딱 일 년 동안 내 뜻대로 날씨가 바뀌도록 해주십시오.' 농부가 하도 간곡히 사정하는 터라, 하나님은 그가 일 년 동안 날씨에 대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이제 일년 동안 날씨는 농부의 마음대로 되었습니다. 그가 따사로운 햇볕을 원하면 햇빛이 내려 쬐었고, 시원하고 촉촉한 비를 원하면 비가 내렸습니다. 덜 여문 호두알을 떨어뜨리는 천둥도 바람도 없었습니다. 모든게 순조롭게 되어갔습니다. 농부는 그늘아래서 그저 잠만 자면 되었습니다. 
  이윽고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호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풍년이었습니다. 농부는 기쁨에 들떠 산더미처럼 쌓인 호두하나를 깨트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알맹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농부는 철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빈 껍데기 호두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도전이 없는 것에는 알맹이가 들지 않는 법, 폭풍 같은 방해가 있고, 가뭄 같은 아픔도 있어야 껍데기 속의 영혼이 깨어나 열매가 여무는 것이란다.' /할/
  사람은 슬플 때나 아플 때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 기쁠 때, 너무 고마울 때도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흘리는 눈물은 더 뜨겁습니다. 눈물은 사람을 맑게 합니다.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면 그의 영혼엔 무지개가 피어오릅니다. /할/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경, 런던의 '하이드 팍' 공원에서 있었습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아 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한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 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뒤로 하며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잠시 후에 진정한 여왕은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면서 사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폐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폐하의 눈물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시56:8절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런 눈물도 있었습니다. '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환경미화원인 아버지와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입고 들어온 고급 브랜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며칠째 다그쳤습니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지갑을 훔쳤어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치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며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판이 있는 날 법정에서 어머니가 울먹였습니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 주세요.' 아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흑, 흑, 흑'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습니다. '불 처분입니다. 꽝, 꽝, 꽝' 벌을 내리지 않은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


  ⑵우리가 꼭 흘려야 할 눈물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바로 살지 못하고, 바로 행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복하며 통회하는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십자가 지셨는데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성하고 허물과 죄악을 눈물로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아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으며 감사 감격의 눈물을 흘린 여인입니다. 그 눈물이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부하장수인 우리야를 죽였던 다윗도, 그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 하나님은 그를 새롭게 하시고 성군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앗수르의 군대 185천명을 쓸어버렸습니다. /할/
  눈물의 기도는 죽을병에서도 살아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믿/  
  시6: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통회한 나머지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눈물로 요를 적셨습니다.
  ㈁내 가정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울어야 합니까? 흔히 가정을 위해 운다면 대개 육신의 문제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기에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울어야 할 문제는 영혼의 문제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족 구원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믿지만 아직도 신앙이 미성숙한 가족들이 성숙해지고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가족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십니다.
  한나를 보세요! 자식 없어 눈물로 기도했더니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젖을 떼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놓고 눈물로 기도했더니 어두운 사사시대에 샛별 같은 지도자로 키워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
  ㈂이웃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이웃들, 그들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부러움의 대상, 무시의 대상, 혹은 무관심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보면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장차 임할 심판을 생각하면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보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혼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자 달라졌습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눈물로 복음을 전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목회할 때 한번은 새벽종을 치다가 괜스레 울컥하며 눈물이 나더랍니다. 동네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강퍅한 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기도합니다. 그 순간 그 마음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네 눈물이 아니라 네 속에서 흘리는 나의 눈물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눈물이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아멘!/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국태민안을 위하여, 세우신 지도자들을 위하여 우리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눈물로 기도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전 성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할/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없으면 생명 있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눈물 한 방울 못 흘려보고 몇 년 다녀도 전혀 변화된 모습이 안 보인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은 성도인가를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흘려야 할 눈물입니다. /아멘!/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이젠 인생살이가 서러워서 흘리는 초라한 눈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귀한 눈물을 주님이 보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은 눅23:28절에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할/
  교회를 위한 눈물, 나라를 위한 눈물, 용서의 눈물, 중보의 눈물들이 모여 사랑의 샘을 이루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녀를 위해, 깊은 타락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땅의 청소년을 위해, 거짓과 불법으로 오염된 이 민족을 위해, 경제난으로 절망하는 백성들을 위해, 무력해진 한국교회를 위해, 그리고 고통의 언덕에서 눈물짓는 이웃들을 위해 주님의 심장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눈물이 이 땅을 살리는 생명의 강물이 됩니다. /아멘!/
  계21:4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눈물로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⑶뿌릴 때 그 단을 거두게 됩니다.

  뿌릴 때는 씨를 뿌리지만 거둘 때는 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뿌린 만큼 축복입니다. 많이 뿌렸으면 그만큼 많은 단들을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6:7-8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서 단을 거둔다는 말씀은 축복의 덩어리입니다. /할/ 여러분, 육신적인 덩어리만 탐내지 마시고 영혼 구원의 아름다움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에는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오면 결코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에게 속한 가정, 이웃들이 하나님께 함께 돌아왔습니다.
  빌립보 성의 간수가 돌아왔을 때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가 성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그 마을 전체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하나를 건졌는데 그를 통하여 5.000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할/
  우리 모두 힘써 복음을 전합시다! 영혼구원이 급합니다! 전도해서 아름다운 구원의 열매들이 구원의 곡식 단을 이루는 수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2013년 11월 10일 대예배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