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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가 사명자로 바뀌려면요나1:11~17

도망자가 사명자로 바뀌려면

요나1:11~17

2008년 11월 9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낮예배 설교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설교:

저는 지난 한 달간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요나서만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성경을 보고 기도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를 써 보았는데 이상하리 만큼 성령의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만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 여러분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지금도 계속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고집, 또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대판 요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과거 그 고집쟁이 요나가 아닌 복음을 들고 나가는 요/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 살펴본 말씀을 보면 요나는 함께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풍랑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자 하며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 정도 되면 요나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그냥 있습니다.

사람들이 네가 누구냐 물을 때 자기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을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요나에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며? 그런데 왜 그렇게 살아 가냐?”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면서, 왜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 것이냐?”

천국이 있음을 확신하면서도, 예수를 믿으면 그 천국을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 피하는 것은 현대판 요나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도망자가 아닌 사역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문제의 원인이 내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다가 점점 더 흉흉해지자 위험을 직감한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때 요나는 뭐라 합니까? 12절을 다 같이 보세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죄악으로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라는 한사람이 갖고 있던 편견과 야욕 때문에 수많은 독일 사람과 유태인이 죽었습니다. 그 한사람 때문에 전 세계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저 북녘 땅의 지도자 한사람의 잘못된 욕심과 판단 때문에 국민 전체가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일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 정복할 때 탈취한 물건 얼마를 감춥니다. 그 성은 첫 성이기에 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그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탐심에 이끌려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여리고 옆의 작은 성, <아이>성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 군대가 대패합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한사람의 범죄가 공동체 전체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보게 됩니다.

또 <사울> 한사람의 죄악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또 오늘 본문의 요나 한 사람의 도피행각으로 그 배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문제는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사람들은 그 해결책을 원인 제공자인 요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그들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제공자인 요나에게 자기 문제 해결책을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요나가 한 말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가 “문제의 해법”도 알고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겪고 있는 풍랑의 원인은 누구 때문일까요?

남들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니고 부모가 아닙니다. 운이 나쁘거나 재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책임을 다른데 전가시킵니다. 그래서 무덤에 가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잖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싸울 때 야단쳐 보세요. 아이들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먼저 때렸어요. 재가 먼저 욕했어요.”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죄상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어찌하여 선악과를 먹었냐”고 물어보았을 때 아담은 책임을 하와에게 넘깁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그 여자가 먹게 했다”고 책임을 넘깁니다.

하와도 뱀에게 책임을 넘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어릴 때 경험한 것입니다. 제 막내 동생이 걸음마를 하다 문에 걸려 넘어지면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때 뚝 그치게 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문지방을 때리면서 “떼끼 이놈, 왜 우리 아이를 넘어 트렸어!, 예끼 이놈” 하면 막둥이가 금방 울음을 그칩니다.

왜요? 내가 넘어진 것은 내가 잘못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고 저 땅바닥이 나를 넘어지게 한 것이라 엄마에게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임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를 갖고 있습니까? 자식문제입니까? 사업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인간관계 갈등 문제입니까? 그 문제의 원인은 뭡니까?

환경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은 요/나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 /요나가 문제의 원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도망자가 아닌 사명자가 되려면

2.주님이 원하시는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요나는 자기가 문제임을 잘 알기에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진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된 자기를 처리하면 재앙이 그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이 자기인 것은 알았지만 처리 방법은 잘못 알았습니다.

“내가 죽으면 된다”가 아닙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라”가 아닙니다.

정말 그것이 해결책이라면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으면 됩니다. 왜 빠지지도 않으면서 던지라 합니까? 왜 다른 사람을 살인자로 만듭니까?

 

문제의 원인이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은 알았는데 해결책이 잘못된 것입니다.

참된 해결책은 지난주 설교처럼 죽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살은 절대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결정입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기가 문제의 원인인 것을 알고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오셔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찬송280장 다같이 1절을 다시 부릅시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누가 두 손을 들 수 있을까요?

먼저는 회개의 결과를 믿는 사람입니다.

사 1:18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55:7에도 보세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그렇습니다. 회개한 사람을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사람은 두 손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 징계의 목적이 심판에 있지 않고 원상회복에 있음을 믿는 사람은 두 손 들고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입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누가 두 손을 들 수 있나요?

둘째로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요나에게 원하는 것은 뭡니까? 바다에 던져져서 죽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깨닫고 돌아서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던지라고 하면서도 돌아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죽으면 죽었지 못가겠다는 고집입니다.

 

왜 이다지도 고집이 센 것일까요? 잘못된 지식, 잘못된 신학, 그리고 그릇된 편견이 요나를 고집쟁이 요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선교를 부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선교, 북한선교, 중국선교, 회교권 선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있습니다. “왜 거길 가서 그 고생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국 땅에도 아직도 75%가 안 믿는데...” 하면서 열을 올립니다.

아프간 같은 회교권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입니다. 북한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일까요? 주님은 “모든 족속으로 가서”라고 했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라고 했습니다. 지역을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피부색을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더 더욱이 민족적인 감정을 앞세워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뜻이 아닙니다.

이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 잘못된 신학, 잘못된 편견이 내속에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요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세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도망자가 아닌 사명자가 되려면

3. 한영혼의 가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한영혼의 가치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하면서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고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를 바다에 던지질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젓습니다.

13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이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어떻게 하면 풍랑을 면할 수 있을까 무진 애를 씁니다.

 

그들이 시도한 방법은 세 가지다.

먼저 그들은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합니다 그러나 풍랑은 더욱 심하여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은 온 무리가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4절을 보세요.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정말로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마지막 최후 수단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가 아닌 일반 성도,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원조차도 한 생명을 살려보려고 별의 별 방법 다 동원하여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하는데도 던지지 않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보고 그래도 안 되니 최후의 방법으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선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갈 뻔 한 요나를 살려보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전철 길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구하려다 죽은 이수현 씨를 기념하기 위해 영화가 만들어 졌습니다. 기념비도 세워졌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려다 자기를 희생시킨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세상 사람도 한 생명 한 영혼을 소중히 여깁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 영혼을 어떤 시각으로 봅니까?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해 보입니까? 성경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면서 까지 사랑하신 영혼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요나는 니느웨 12만 명의 영혼을 소홀히 대하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고 있던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요나 한 생명을 살리려 합니다. 좀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우린 내 생명이 소중하면 남의 생명도 동일하게 소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영혼이 거듭나는 방법은 오직 예수를 영접하고 죄 사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피조물 중에 가장 무섭고 악한 것도 사람이지만 복음을 듣고 거듭나면 영생하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이 영혼을 요나보다 선원들이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영혼을 죽이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요나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중입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그것을 깨닫길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죽이지 않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가 살리십니다.

17절을 보세요.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리고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맛보게 하기 위해 예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을 보십니다. 한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주님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시하는 그 한 영혼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옆집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지옥 심판 길로 가고 있는 이웃을 위해 주님은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영혼을 어찌할 것입니까?

요나처럼 도망칠 것입니까? 아니면 복음 들고 찾아 갈 것입니까? 

여러분은 도망자입니까? 사명자입니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