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격언 모음
* 하나님과 교통한다 생활이 제일 즐겁다(헨리)
* 설교를 맡은 경우에 기도를 많이 하고 기쁨을 얻은 후애야 설교를 하러
나갔다 (뮬러)
* 참된 기쁨은 불신앙에 있을 수 없다.
* 기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난 후에야 취득된다.
(러스킨)
* 부가 주는 기쁨은 허위의 기쁨이다.
연약함이 주는 기쁨
18세기말과 19세기 초반의 재능 있는 영국 시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조지 고든 바이런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탄탄히 자신의 입지를 굳혔고 냉소적이며 비장할 뿐만 아니라 낭만스런 글의 특징을 따서 바이런풍이라는 시적 경향이 생겨날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몹시 부러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월터 스코트가 바로 그였습니다.
바이런 경과 월터 스코트는 둘 다 절름발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활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 불평을 해댔습니다.
스코트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스코트는 자신의 연약함을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한 번은 바이런이 스코트를 만나게 되자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명성을 모두 주겠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장애에 대해서 서로 반응이 달랐습니다.
바이런은 그것을 빌미로 방탕한 생활방식을 탰했습니다.
그러나 스코트는 오히려 용감한 삶을 통해서 자신의 기분과 가치를
체현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음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진정한 기쁨
기쁨이라는 영어는 `JOY'이다. 이 단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첫자 J는 Jesus(예수)이다.
즉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처음에 와야 된다는 뜻이다. O는 Others(이웃들), 나의 삶에 현장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이웃이 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Y는 You(당신)을 말한다. 맨 마지막에 당신을 생각할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순서를 얼마나 바꾸고 살아왔는가?
기도할 때, 생각할 때, 대접할 때, 살아갈 때도 항상 내가 앞자리에 아니면 중간 자리에 앉아 오지 않았는가?
세상의 문법은 언제나 1인칭은 `나'이지만 성경의 1인칭은 언제나 하나님이며 2인칭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며 그다음 3인칭이 곧 `나'임을 잊지 말아야 진정한 기쁨을 알 수 맛볼 수 있다.
엄청난 기쁨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권면했습니다."목사님, 우리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혼자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니라 무척 어렵게 삽니다. 남의 집 빨래를 하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센트의 헌금을 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이 장로님은 2불씩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센트의 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장로님의 권면인즉 그 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 테니 그 집사님을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애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사님을 불러 "장로님이 당신의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하셔도 괜찮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여집사님은 앉은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왜 우십니까?"하고 목사님이 묻자 여집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5센트씩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이리하여 장로님도, 목사님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에 바치는 일 자체가 엄청난 기쁨입니다. 이것을 바침으로써 복받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나 헌금은 그행위 자체에서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기쁨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삶은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합니다.
찰스 스펄전이 주 일 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템즈 강 다리 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템즈 강의 작은 물고기가 아닐까? 내가 이 물을 다 마셔버려서 템즈 강이 다 말라 버리면 어떡하지?'
그때 하나님이 그 작은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마음껏 들여마셔라, 작은 물고기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애굽이 통치하던 시대의 작은 새앙 쥐가 아닐까? 내가 풍년이 들었을 때,
그 곡식을 이 새앙쥐가 조금씩 먹는데 이거 내가 다 먹어서 이 곡간이 텅텅 비면 어떡하지?'
그때 요셉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껏 먹어라. 이 작은 새앙쥐야. "
문득 '내가 등산하는 한 사람의 등산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의 공기가 너무 좋은데, 내가 호흡하다가 다 마셔 버려서 공기가 고갈되면 어떡하지?'
그때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껏 다 들여 마셔라, 작은 인간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우리 인생이 피곤하지만 하나님이 그때마다 우리의 하늘을 열어 주신다면 일평생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항상 내 마음이다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32세에 비극적인 유서 한장을 작성했다.그는 형제인 칼과 요한에게 유서를 전달할 생각이었다.유서에는 삶에 대한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나는 지난 6년 동안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지냈다.이제 머잖아 삶을 마감할 것이다.오,신이시여.내게 기쁨의 날을 허락해주소서” 베토벤은 당시,실연과 청력감퇴로 깊은 시름에 잠겨 유서를 작성한 것이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후,베토벤은 비엔나의 한 극장에 서 있었다.그곳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합창교향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그는 청력을 거의 상실했고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다.청중들의 우레같은 박수소리도 듣지 못했다.그러나 마음 속으로부터 큰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외적인 환경은 24년 전보다 훨씬 비참했지만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삶의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기쁨의 근원은 항상 내 마음이다.
주는 기쁨을 누리자
어느 날 임금님이 전국의 사대부를 불러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천서라는 신하도 부름을 받아 잔칫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사대부들에게 양고기국을 한 그릇씩 나눠주도록 했는데 이상하게도 이천서 차례에서 양고기국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천서는 '자기 차례에 양고기국이 떨어졌다는 것은 임금이 자기를 버리겠다는 표시'라고 오해하고 그 길로 이웃나라로 망명하여 자기 나라를 침략하게 하였습니다.
양고기국을 얻어먹지 못한 이천서의 서운함과 분노가 온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은 허겁지겁 산속으로 도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 찾기에 바빴는데, 계속해서 뒤를 쫓아오는 두 명의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대들은 왜 도망가지 않는가? 나를 따르면 적의 표적이 되어 더 위험할텐데."
임금의 질문에 두 병사는, "저희 아버지께서 길에서 배고파 죽기 직전, 임금님께서 먹다 남은 찬밥을 내려주셔서 아버지를 살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임금님을 지켜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내가 베푼 한 그릇의 양고기국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한 홉 정도의 찬밥에 두 용사를 얻었구나." 임금은 핑도는 눈을 하늘로 향했습니다. 남에게 베풀 때는 그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산울림과 같고 혹은 인간행동은 부머랭(Boomerang: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호주토인의 무기)같습니다. 1973년도의 교포 서로돕기운동의 1등 당선표어는 오 마리다 여사의 "가는 정 오는 사랑, 너 잘되면 나 잘되고"입니다. 춘원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 했고, 성경에는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것을 주고 주다가 자기 생명을 주는 예식을 거행하셨고(성만찬), 이튿날에는 십자가에서 생명 전부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인간 경험에서 보면 대개 주는 자는 폭넓은 마음, 남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마음, 남에게 주어도 살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없으면 꾸어다가도 주는 마음입니다. 주어야만 살 수 있는 갈릴리 호수같은 마음, 자기의 것을 나누어 갖고 싶은 대중적인 성격이라 하겠습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누를 끼치고 세상을 떠난 이는 반드시 그 죄가 자손까지 누적됩니다. 성 프란시스는 자기 것을 전부 남에게 준 후 지팡이와 성경을 든 그에게 누군가 구걸할 때 그는 그 거지의 손에 입을 맞춰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인가 주지 아니하고는 견디지 못하기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사랑)으로 네게 주노니"(행3:6)하는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약소민족, 저개발국가, 제3국 등 등의 이유로 주어야 할 이유보다 받아야 할 이유가 많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백년을 빚졌고, 군사와 경제적으로 유엔(UN)에 빚을 졌으며, 선배와 부모에게 빚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주다가 줄 것이 없으면 미소를 주어야 하고 따뜻한 손을 주어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아랍에는 선행에 관한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는 것입니다.
옛날 아랍의 한 왕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강가로 놀이를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마로 물이 불은 탓에 왕의 아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왕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당황했지만 어찌 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왕은 아들을 찾기 위해 강가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왕의 아들은 발견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왕의 아들이 강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있는 것이 발견되어졌습니다. 왕과 사람들은 기쁨 가운데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이의 대답은 하루에 한 번씩 음식이 담긴 푸대가 강위에서 떠내려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푸대에 쓰인 이름을 보고 수소문하여 그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왜 물 위로 음식을 떠내려 보냈냐고 물어보는 왕에게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의 속담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이 진정 사실인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왕에게 후한 사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강가에 살았던 초로의 사람이 그 속담이 진실인가 확인키 위해 실행해 본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가 확인해 보느 열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료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산재해 있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우리의 선행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여러 날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밝히 보는 그 날,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조오지 피바다라는 사람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단을 하고 내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쁨이 있었습니다."
또한 폴 투르니에도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는 일!" 당신은 얼마나 잘하고 계십니까?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줄 줄을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을 일컬어 일종의 "유아기적 고착"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유아기적 고착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 우리는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값진 기쁨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믿는 바에 따라 행동의 다른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행위가 용납되거나 용납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이러한 일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여성들은 미국 여성들의 짙은 얼굴 화장을 눈감아 주는 것이 어려웠다.
동시에 미국의 신자들은 큰 맥주잔을 들고 있는 독일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자문하였다. 각 나라마다 견해들간의 갈등이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전거를 타는 것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흡연과 음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기 사항이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기초한다.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가질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이다. 당신은 그 누군가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기꺼이 그만두겠는가? 즉 그 행동이 당신 보기에는 나쁘지 않더라도 어리거나 연약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하지 않거나 포기할 수 있는가? 자신의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이러한 일들을 행할 때 당신은 평화뿐만 아니라 기쁨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은 자신이 포기한 '잃은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베푸는 기쁨
어떤 사람이 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 얼마 전 중증장애인 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왔다가 너무 피곤해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니 저도 모르는 기쁨이 솟아나지 뭡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남을 도왔더니 제가 살아났습니다. 이 기쁨을 그동 안 잊고 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감사를 아는 사 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산다.더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사 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달라진다』
크리스천의 기쁨
언젠가 감옥살이를 하셨던 김진홍 목사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하 감옥에서 어느 겨울을 지나게 되었는데 홀로 있는 독방은 너무도 추웠다. 손발이 시린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멎고 눈물이 날 정도였고 이까지 떨려 닥닥 소리가 났다.
이런 추위 속에서의 잠이란 곧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만든 중앙정보부와 정부가 너무 미워 이를 갈았다.
이왕 잠을 못잘 바에야 기도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기도에 흠뻑 젖었다.
너무나 극한 상황 속에서의 기도는 손을 불덩이같이 뜨겁게 만들었고 온몸을 달아 오르게 했다. 너무 더워 옷을 벗고 오히려 벽을 만져야 했다.
그때 그는 주의 음성을 들었고 처음으로 성령 체험을 했다.
아마 그는 마치 로마 감옥의 바울과 같은 대환희를 맛보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크리스천의 기쁨은 "기쁘지 않은 환경"에서도 향유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또한 크리스천의 슬픔은 "보통 사람들이 슬프지 않는 조건"에서도 향유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크리스천의 이같은 기쁨은 종교의 근본적 가치이며 항구적 가치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하나이다.
기쁨의 근원은 항상 내 마음이다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32세에 비극적인 유서 한 장을 작성했다.그 는 형제인 칼과 요한에게 유서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유서에는 삶에 대한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나는 지난 6년 동안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지냈다. 이제 머잖아 삶을 마감할 것이다. 오, 신이시여. 내게 기쁨의 날을 허락해주소서” 베토벤은 당시, 실연과 청력감퇴로 깊은 시름에
잠겨 유서를 작성한 것이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후, 베토벤은 비엔나의 한 극장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합창교향곡’ 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청력을 거의 상실했고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다. 청중들의 우레 같은 박수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큰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외적인 환경은 24년 전보다 훨씬 비참했지만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삶의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기쁨의 근원은 항상 내 마음이다.
부모 된 자의 기쁨처럼
언젠가 선교를 열심히 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떤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점심식사를 잘 내고
식후에 과일까지 좋은 것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중에 한 젊은 청년이 이렇게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 않습니까? 고기 먹지 말고
그 돈을 아끼고, 이 과일 먹지 말고 그 돈도 아껴서 선교해야지, 먹고 마시는 데에 다 쓰면
언제 선교합니까?" 이렇게 한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도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고기를 주시고 이 과일을 주시는 것은, 이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선교를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어떤 기특한 마음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지금 주신 상급이니까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갖는 가장 큰 기대는 자녀가 훌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훌륭하게 된
것이 기쁜 것만큼 자녀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된 자가 누리는 기쁨 중의 큰 기쁨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복의 전부라거나, 복의
첫번째, 두번째의 조건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오늘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받을 복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는 기쁨을 누리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模本)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
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
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
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조오지 피바디라는 사람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
단을 하고 내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
쁨이 있었다." 또한 폴 투르니에도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
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는 일 !
", 당신은 얼마나 잘하고 계십니까 ?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
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줄 줄을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
는 사람을 일컬어 일종의 "유아기적 고착"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혹, 아직도 유아기적 고착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
요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로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나눔의 기쁨
순조(純祖) 무렵 경상도 순흥(順興)골에 만석(萬石)에서 1천 석이 모자라는 9천 석을 하는 황부자가 살고 있었다. 황부자의 친구로 이웃 고을 풍기(豊基)에 사는 한 선비의 사위 최생(崔生)이 대과(大科)를 치르고자 상경하려는데 노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최생이 장인을 찾아가 황부자에게 빚 좀 얻어줄 것을 간청하자 `제 아비 어미 제사에 보리 세 됫박과 밴댕이 세 마리 놓고 지내는 노랭이인데 어림없는 일'이라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노자 빌릴 길은 그 길 밖에 없다고 판단, 최생은 황부잣집을 찾아갔다. 예상밖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최생은 황부자로부터 그가 살아온 일생 이야기를 듣는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지들에 얹혀 눈칫밥을 먹고 살다가 안동으로 장가들었는데, 안사람이 워낙 부지런하여 한길가의 돌무더기 묵정밭을 개간, 구덩이를 파고 옥수수를 심어 밤이면 주막집 소매를 퍼다 걸우어가며 수족이 닳도록 치산을 했다. 치산하는 동안 장인이 말했듯 보리밥과 밴댕이를 놓고 제사를 지낸 것도 사실이라 했다.
그렇게 9천 석을 일구어 놓자 인생살이에 회의를 하게 되었다.
잘 먹고 잘 입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다는 것이 묵정밭 개간하여 소매 퍼다 걸게 하던 시절보다 재미도 없고 희망도 없으며 살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석을 채우지 않고 살맛나게 쓰는 재미를 찾기로 했다면서 하인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는 것이었다.
`이분에게 노자로서 곳간에서 50냥을 꺼내드리고 말 한 필을 내어 행차하시도록 하여라. 그리고 집안 걱정으로 과거를 설칠 수가 있으니 벼 30섬을 최생댁에 보내드려라.'
이렇게 황부자는 9천 석 재산을 과거 치르는 빈한한 수백 명 서생들에게 나누어주고 혈육인 두 아들에게는 땅 한 뙈기 남김이 없이 죽었다. 최생이 대성해서 경상감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무덤의 소재까지도 없애고 죽었던 것이다.
십수 년 전 베티 그린이라는 미국 할머니가 적지않이 9천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 할머니 평생 찬 물과 찬 오트밀을 먹고 살았다던데, 데우면 연료비가 들기 때문이라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밤을 세워가며 무료병원을 찾아다녔다던 할머니다. 8백억 원이나 되는 그 유산 목록과 유언이 담겨진 그릇도 녹슨 통조림 깡통이었다. 이 노랭이 유산은 베티 그린 문화기금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김밥 말아 번 돈 50억 원을 학교재단에 희사한 70대 할머니가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김밥 50억 원어치면 그 길이를 한반도에 깔면 3천 리에 이르고, 우리 국민이 한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막대한 분량이다. 김밥 마는 손수건만한 대발 하나만 가지고도 그토록 큰 일을 해낼 수 있는데 수백만 평의 땅에 수억여 원의 돈을 깔아 놓고도 김밥 한 덩이 사회에 되돌리지 않는 가진 자의 누더기 윤리가 그 더욱 너덜거려 보인다.
기쁨을 갖는 첫째 조건 - 기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4-5).
기쁨을 갖기 위한 조건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조거는 기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면 당신에게 기쁨을 주신다. 그러나 당신은 먼저 그가 당신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 - 예수 - 사랑을 어떻게 믿고 있나 적어보라. 또 시편 기자의 기록을 보라. 당신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라. 그것은 가능하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평안과 기쁨이 있는 교회
본 문: 잠언 9장 1∼6절
현대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유행하는 말이 ‘일맛 나는 직장생활,꿀맛 나는 가정생활,신바람 나는 건강생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가 활력소를 불어넣어 재미있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소속한 교회는 항상 생기가 넘치고 평안과 기쁨이 떠나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집을 짓고 연회를 베푸는 자로 묘사되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지혜의 집은 하나님의 집,오늘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럼 성도의 현주소인 교회는 왜 평안과 기쁨이 있는 곳이어야 하나요?
첫째, 교회는 견고하고 완전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의 일곱은 완전수를 상징합니다.완전한 일곱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으니 지혜의 집은 견고하고 안전한 집이란 말씀입니다. 인간이 지은 집은 불원간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교회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이 보호해주심으로써 영원불멸하며 안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마음에 안정을 얻고 평안을 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회는 허물어지는 법이 없는 안전한 곳,사탄의 유혹과 결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인 까닭입니다.
둘째, 교회는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5절에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라고 했습니다.옛날에 잔치를 하면 짐승을 잡아 함께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기쁨을 나눈 풍습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이처럼 잔치하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죄인들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음미하며 흘려주신 보혈의 능력을 찬미하는 희락이 가득한 집이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들은 남의 허물을 들춰내기보다 칭찬하기를 좋아하며 남이 자기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므로 항상 하늘의 평화와 기쁨과 환희의 샘물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생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자들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소생하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려면 생명을 공급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구원받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부모와 자녀,이웃과 함께 영생의 기쁨을 향유하길 원하십니까? 교회로 데리고 나오십시오. 영원한 새 생명이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정 신나는 교회생활을 바라십니까? 우선 내가 과연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믿을 때 나의 신앙태도는 달라집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평안이 함께 하며 기쁨이 넘치는 교회를 더욱 사모하는 성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베푸는 기쁨
어떤 사람이 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 얼마 전 중증장애인 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왔다가 너무 피곤해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니 저도 모르는 기쁨이 솟아나지 뭡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남을 도왔더니 제가 살아났습니다. 이 기쁨을 그동 안 잊고 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감사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사 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달라진다』
땀으로 얻는 기쁨
밀레의 명화중 '만종'이 있다. 이 그림의 원제는 '안젤루스'인데 그 뜻은 '기도'이다. 농부가 교회의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태양광선이 비치는 곳은 농부의 머리나 교회의 종탑이 아니다. 광선은 농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다. 밀레는 이 그림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을 표현했다. 그래서 농기구에 밝은 태양광선을 비춘 것이다. 밀레는 '만종'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의 소중함을 담고 싶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노동은 하늘의 준엄한 명령이다. 땀으로 얻는 기쁨이 참 기쁨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노동을 통해 얻어진다. 땀과 수고가 없이 얻어지는 것들은 보통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다.
기쁨을 얻으려면
미국의 세계적인 가수 마이클 잭슨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무대에 설때마다 신적 존재로 열광을 받은 인간의 대스타이다. 그는 지금까지 천만 장의 음반을 팔았고, 그 수익금만 해도 288억원이나 된다.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신들린 사람처럼 관중을 열광시킨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떠나버린 빈 무대에 서서 그는 고독한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그의 웃음은 돈을 벌기 위한 위선이었고, 그의 광란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불행한 몸부림이었다. 그가 무대 뒤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무대의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가 그에게로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돈은 인간을 파멸시킬 뿐 소망을 주진 못합니다. 진정코 당신이 참 기쁨을 얻으려면 주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청소부는 휘파람을 불면서 행복한 모습으로 무대를 떠났다. 마이클 잭슨은 태풍과 같은 소용돌이가 지난후 찾아온 고독을 가슴에 안고 조용히 교회당의 문을 토크했다. 진정 그곳에는 화평과 소망과 기쁨과 승리가 있는 곳이었다.
기쁨을 갖는 셋째 조건 - 믿는 것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 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8:5-6).
세번째 조건은 믿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기대했고 그를 영접했던 이제 순전히 믿기만 하라. 사도행전
에 나타나 있는 초대 기독교도들의 현실생활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생활은 기쁨이 충만했다.
자신들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면 기쁨 또한 시든다.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가. 그 의심들을 구체적으로 알라. 그리고 그것을 확신으로 바꾸라. 그리하 면 기쁨이 되살아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로마서 15장 13절에도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셨다.
목회자의 기쁨
목회자에게는 괴로움도 있지만 기쁨도 많다. 사도 바울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지만 또한 많은 성도들 때문에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는 "너희 얼굴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고백했다. 나는 목회하는 동안 사람들 때문에 거의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지난 몇일 동안에도 목회자로서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것을 여기 함께 나누고 싶다.
(1) 지난 주일 한 동안 방황하던 이혜원이란 사람이 친구의 인도로 강변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고 새 가족 반에까지 참석했다. 예배에 참석한 소감을 물었다. "손수건을 모두 적셨다는 말로 대신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으며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한 영혼을 바라보며 나는 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기쁨을 누렸다. 화요일 오후 전화로 격려했더니 너무 좋아하며 다음 주일에는 남편과 함께 교회에 나오겠다고 말했다. 감사한 일이다.
(2) 지난 주일 새 가족반 성경공부를 마친 후 한 새 신자의 요청으로 그 분의 친구인 말기 암 환자 한 분을 방문했다. 오랜 동안 주님의 품을 떠난 사람이었다. 한길범씨는 살이 많이 빠져 있었고 심한 고통 중에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에는 주님을 사모하며 회개하는 영혼의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나눈 후 그 분의 등과 손을 잡고 기도했을 때 그 분은 눈물과 콧물을 내 왼 손위에 쏟으며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 분의 눈물과 콧물이 너무 귀하게 여겨져서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지 까지 왼 손을 물로 씻지 않았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전화로 그 분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했을 때 그 분은 여전히 눈물의 기도를 함께 드리곤 했다. 나는 기쁨과 감사를 가슴에 가득히 담았다.
(3) 월요일 밤에 수지 열린문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 거기 모인 80여명 신자들이 나의 제자인 충성스런 담임 목사님과 함께 은혜를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고 화요일 오후에는 동두천에 가서 한전 북부지역 신우회 연합감사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전했을 때 신앙심이 돈독한 지사장과 지점장들을 비롯한 믿음의 직원들이 그렇게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한번 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기쁨과 감사를 누렸다
(4) 오늘 수요일 새벽, 개인기도를 마친 후 내 앞에 어느 성도가 놓고 간 감사의 글을 읽으며 나는 또 다시 감사와 기쁨을 누렸다. 지난 10월 29일 감사의 편지를 놓고 간 성도였다. 그 때 한 페이지의 감사의 글 가운데는 "새벽에 저를 깨워주셔서 아침 이슬 같은 말씀을 가슴으로 듣게 하시고 온 종일 은혜를 주십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 한 페이지의 감사의 글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새벽마다 저에게 회개의 눈물을 주시고 결단의 눈물도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 '이 후에 목사님 주를 뵈올 때 상 받게 하소서'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목사님 헌금을 드리오니 기쁘게 받아 주세요." 너무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목회자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만 목회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와 같은 분들을 위해 사도 바울의 기도를 드린다. "원컨대 주께서 000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딤후1:16).
기쁨을 갖는 넷째 조건 - 구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 가 없느니라(요14:6).
네번째 조건은 구출이다. 당신 자신을 모든 소극적인 생각들에서 구출하면 기쁨이 생긴다. 공포, 미움, 의심, 혐의, 질투, 불신... 이러한 소극적 세력들은 당신의 기쁨을 앗아간다. 믿음은 이러한 소극적 감정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과감히 그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구출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당신이 당신 자신을 소극적인 생각에서 구출한다면 당신에게 기쁨이 생긴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이해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 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이 성구를 암기하라. 당신에게 소극적인 생각들이 밀려오면 당신이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확신할 때까지 이 성구를 반복하라.
고난 중에 참기쁨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 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을 기쁨으로!
시계가 벽에 걸린 채로 똑딱똑딱 하며 잘 가다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매일 매초마다 똑딱을 각각 한번씩 하고 있으니 일분간이면 120번을 똑딱 해야만 하구나! 그렇다면 한시간에 7천 2백번을 똑딱거려야 한다는 말인가? 하루를 내가 똑딱거린다면, 아이쿠! 나는 무려 17만 2천 8백번을 해야 되는 것이네! 일주일을 똑딱거려야 한다면 이게 웬일인가? 자그만치 1백 20만 9천 6백번을 똑딱거랴야 하고, 1년 동안에는 6천2백89만9천2백번을, 나는 항상 같은 일로 똑딱거려야만 된다는 말인가? 아이구 맙소사!" 여기까지 생각해보던 시계는 하도 기가막혀서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신경 쇠약으로 쓰러져 버리게 되었다. 시계는 병원으로 운반이 되었다. 의사는 고장난 용수철을 갈아 끼고 시계를 고쳐 놓았다. 그리고는 시계에게 물어보았다. "왜, 어쩌다 이렇게 되었소?" 그러자 시계가 눈물로 설명을 하며 대답을 했다. "글쎄, 내 사정 좀 들어보세요. 내가 일 분 동안을 가려면 120번을 똑딱거려야 하고, 한 시간을 가려면 자그만치 7천2백번을 똑딱거려야 하고···." 이때 의사가 시계의 말을 막으며 물어보았다.
"도대체 당신은 한 번에 똑딱을 몇 번이나 하기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거야, 똑이던 딱이던, 한 번만 하지요."
"그렇다면, 내가 좋은 비결을 일러줄 터이니 그대로만 하세요. 그저 한 번 똑이든 딱이든 한 개 씩 정성을 들이겠다는 생각으로 사세요. 그러면 병도 들지 않고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계가 매일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늘 할 일이 중첩되어 있어서 항상 압박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현명한 지혜를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아닌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닥쳐오는 많은 일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속박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며, 또 우리 생활의 의미없는 듯한 맴돌이 나날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번에 한 가지씩, 정성스럽게, 그리고 기쁘게 해나간다면 행복한 시계처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기쁨과 슬픔
그대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그대의 슬픔. 그대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의 눈물로 채워지는 것. 그대가 기쁠 때, 그대 가슴속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그대가 슬플 때도 가슴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가 지금 울고 있음을. - 칼릴 지브란의《예언자》중에서 - * 기쁨과 슬픔은 한 짝입니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쁨과 슬픔은 함께 오고, 함께 갑니다. 진정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기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의 맛도 압니다.
기쁨
유대 상점의 주인이 마누라에게 하는 말.
"내 말 알아 듣겠어? 매상이 없는 날은 가게를 닫은 뒤 전등을 환하게 켜구 시끌시끌 즐겁게 법석대라구. 그리고 매상이 좋았던 날은 촛불 하나만 딱 켜 놓구 쥐죽은 듯이 하구 있으란 말이야."
마누라가 참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여보, 그건 반대가 아니요?"
아이구, 요런 맹추야, 하는 듯이 주인이 하는 말, "그러니까 여자들이란 소견머리가 좁다고 할 수 밖에. 우리 집 장사가 잘 안된 날은 이웃에서도 시름없이 지내게해야 한다구. 전등을 환하게 켜놓으면 남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매상을 많이 올린 줄알구 배가 아플 거란 말야. 하지만 촛불 한 자루만 딱 켜 놓으면 장사 다 망친 줄알고 시원해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기쁠 때는 이웃도 함께 기뻐해 주게 될거란 말야. 알아 듣겠어?"
행복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기쁨 없는 교회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인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 박사는 현대 크리스찬을 이렇게 비유하였다.
"아프리카에는 물 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찬들도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
참 성공의 기쁨
어느날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찾아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버님은 은퇴하셨는데 전과 다름없이 늘 화가 나 계신 것 같고. 또 우울해 하십니다.”나는 웬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 말에 놀라 차근차근 이유를 캐물었다. 청년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늘 '일에 중독되어' 살았던 아버지가 늘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했다고 계속하여 설명했다.
아버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줄곤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목회를 하는 사람들를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내가 만났던 목사는 이 경우와 얼마나 대조적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섬기는 교회는 마을 공용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고. 그의 차는 털털거리는 낡은 차였으며. 트레일러를 개조해서 만든 그의 집 역시 낡아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좋은 아내가 있고, 섬길 교회가 있고, 또 햇빛 비치는 일 년 365일의날들이 있으니까요.
” 그리고 그는 그날 하루 종일 일 주일간의 전도 여행에 나선 나를 도와주었다.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역자들은 제 아무리 많은 일들을 이루었어도 결코 참 성공을 알지 못다. 그들은 늘 “했으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 속에서 살고 또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자연히 시기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부러워하게 만들거나 그들의 불운에 쾌재를 부르게 만든다. 이런 가련한 유형의 사람은 성공을 체험할 수 없다.
헌 운동화가 주는 기쁨
파웰은 지금은 좀 나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래 전에는 꽤나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가을 학기가 되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아들과 딸 하나에게 새 운동화를 사 주어야 했다. 특히 두 아들은 궤짝으로 만든 손수레를 타고 언덕 비탈길을 내리달리면서 발로 문지르기 때문에 늘 신발이 빨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또 아내는 세탁기가 고장나서 빨래를 할 수가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파웰씨는 신문 광고란을 뒤져 중고품 세탁기를 파는 집을 발견해 그 집을 찾아갔다.
막상 집을 찾아갔지만 대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크고 훌륭한 저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웰씨는 초인종을 눌렀고 주인 부부는 친절히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파웰씨에게 아주 싼값에 세탁기를팔았다.
파웰씨는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주인 부부와 대화를 나누던 끝에 무심코 자기의 아이들 얘기를 꺼내게 됐다.
두 녀석들이 손수레를 타면서 신발이 다 떨어졌고, 딸은 줄넘기를 해서 신발이 다헤졌는데 학교 가기 전에 새 운동화를 사줘야 하기에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 글쎄 그 녀석들이 애비의 주머니 사정을 더욱 악화시키지 뭡니까?"
그러자 갑자기 부인 얼굴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방안으로 급히 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파웰씨가 언뜻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파웰씨가 대단히 미안해하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이 실수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우리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한번도 걸음을 걸은 적이 없지요.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한 켤레만 닳게 해서 못 쓰게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겁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이 한번은 텔레비젼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
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제비꽃의 기쁨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임금님은 날마다 행복했다. 어느날 정원에 나간 임금님은 꽃들과 나
무들이 모두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임금님은 근심에 쌓여 키가 작은 참나무에게 먼저 왜 그렇게 죽어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저기 멋진 전나무처럼 키도 늘씬하지 못한데 살아서 뭐하겠어요"
그래서 임금님은 다시 전나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넌 왜 힘이 하나도 없느냐?"
"임금님, 난 포도나무처럼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답니다"
이번엔 포도나무에게 물었다.
"임금님이 아끼시는 장미나무처럼 아름다운 꽃을 저는 피울 수가 없답니다. 장미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포도나무가 힘없이 포도잎을 떨구며 말했다.
임금님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발밑에 키가 짤막한 제비꽃이 동그란 봉오리를 맺고 싱글싱글 웃는 것이 보였다.
임금님이 그 제비꽃을 보고 왜 너만은 그처럼 힘있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임금님이 나를 여기에 심어준 것은 제비꽃으로 잘 자라기를 바래신 거죠. 그래서 나는 키도 작고 예쁘지 않지만 열심히 꽃을 피워 임금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나도 기쁘게 살거예요. 이것이 어찌 즐겁지 않을까요"
생산의 기쁨을 가르키자
극심한 수해 뒤에도 가을은 오는가? 논두렁 콩포기도 누릇누릇 물이 들고, 논 배미마다 제법 황금빛이 물렸다. 이제 곧 타작이 시작되고, 한 해의 보람을 거두겠지. 그런데 왜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걸까? 가을걷이의 기쁨으로 출렁거려야 할 때가 아니던가?
농림부는 올해 우리나라 쌀 수확이 5백만석 이상 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50년이래 최악의 폭우와 일조량 부족 등 기상이변의 영향 탓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세계 곡물생산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 지역이 기상이변 피해를 입었다. 최근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올해 41개국이 홍수를 겪었고 22개국에 가뭄으로 곡물수확량이 사상 최악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이와 같은 불길한 현실들은 식량자급률이 30퍼센트를 밑도는 우리 나라에 식량안보론까지 들먹이게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이자 마지막 무기가 바로 식량과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구제금융시대를 맞아 달러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실직 감산 기업 도산 수출부진 등 경제불황의 암울한 터널을 어렵게 지나가고 있는 터에 세계곡물시장까지 교란된다면 이 어찌 심각한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아직 우리 나라 국민들은 생산활동보다는 소비 활동에 비중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150만 명의 실직을 염려하는 가운데서도 3D 현장의 구인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3D의 대부분이 생산현장이고 보면 생산활동에 대한 기피와 천시 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 2세들의 성장과정과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생산의 중요성을 깨우치거나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희박하다. 농어촌에서 자라는 일부 청소년들 외에는 땅에 곡식을 심고 기르거나 고기 잡기나 해조류 양식업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직업교육에서도 생산직의 선호도는 매우 낮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생산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들이 소비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교육받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 손에 이끌리어 주말마다 공휴일마다 볼거리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먼저 길이 들고 있다. 그러니 언제 생산의 깊은 뜻과 생산 능력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제라도 생산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심고 가꿀 밭이 없는 도시에서는 마당 귀에 채소 몇 포기라도 심고 아파트에서는 베란다에 콩이나 고추 등을 심은 화분에 물을 주며 생산의 기쁨을 가르쳐야 한다. 아무 노력도 없이 먹고 마시고 노는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근로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배려해야 한다. 일손부족으로 묵어 나자빠져 있는 농토를 경작하고 쉬고 있는 생산라인이 가동되도록 교육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부패를 막고 경제불황의 어둠을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되기 때문이다.
피난처에서의 기쁨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때 우리는 그분의 위로하심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알게 될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넘쳐흐르는 삶」이라는 책에서 영적인 법칙의 역작용을 말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성령의 샘은 하늘나라와 대조가 되는 지상의 환경에서 가장 힘차게 솟아오른다.” 고난 중에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음으로 기쁨을 얻은 여인이 있다. 그는 34세에 낭창으로 죽은 젊은 부인이며, 어머니이기도 한 에디스 류스이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삶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십자가조차도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기쁨이다. 기쁨은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관여하신다는 것을 알고, 영혼의 깊은 평안함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할 때 기뻐하시며,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궁극적인 기쁨이 된다. 그것은 죽음이나 우울함, 의심, 그리고 낭창의 화염으로도 약화시킬 수 없는 강한 것이다. 그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는가?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탄복하며 전율한다.”
죽음에서 소망을 보는 기쁨
성경: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데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을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피지 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관습 가운데는 죽은 사람을 부르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초혼제의 절정은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나무나 절벽에 올라가 "돌아와요! 돌아와요! 돌아와요!"라고 슬피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들 원주민들은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열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하여 오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슬픔은 곧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단지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 기도: "주님,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청난 기쁨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권면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혼자 살면서 어린아이 다섯을 키우느라 무척 어렵게 삽니다. 남의 집 빨래를 하는 등 고생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일날이 되면 꼭꼭 5센트의 헌금을 합니다. 큰 액수는 아니겠지만 그 여집사님한테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이 장로님은 2불씩을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센트의 2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장로님의 권면인즉 그 여집사님의 몫까지 자기가 대신할테니 그 집사님 불러서 헌금하지 말라고 얘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사님을 불러“장로님이 당신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줄 알고 매주 헌금하는 것을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다음 주일부터는 헌금 안하셔도 괜찮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여집사님은 앉은 자리에서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십니까?”하고 목사님이 묻자 여집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남의 집 빨래를 해가며 고생스럽게 살지만 하나님께 5센트씩 바칠 때에는 더할 수 없이 기쁘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이리하여 장로님도, 목사님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할 때에 바치는 일 자체가 엄청난 기쁨입니다. 이것을 바침으로써 복 받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나 헌금은 그 행위자체에서 기쁨과 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심으면 기쁨이 됩니다
“야구는 9회말 투 아웃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를 말리는 게임이 마지막 순간에 역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즈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를 9회말 투 아웃에서 역전을 시켰습니다. 그것도 2번이나 말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역전을 허용한 투수가 바로 우리나라의 김병현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역전을 한 팀은 통쾌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역전을 허용한 팀은 한 순간의 방심을 후회하면 한탄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운명 역전 드라마가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시편 126편에서도 우리는 운명 역전 드라마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자신의 죄와 조상들의 죄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인 이스라엘이 사명을 망각하고 이방인들처럼 살아가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이라는 세월을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그들은 고국의 소중함과 더불어 지난날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온 부분을 되돌아보며 회개의 눈물을 흐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이러한 상황은 바로 조상과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알고 회개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짓지도 않은 조상의 죄를 마치 자신들이 지은 죄처럼 알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본문의 시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상황을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가 자식을 대하듯이 징계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주전 537년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선물..그리고 기쁨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날마다 선물을 한아름씩 받는 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겠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루'라는 포장속에 많은 선물들이 내 앞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하나씩 열어 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선물꾸러미를 열어 보고 있을까요?
보내 준 사람의 마음도, 선물에도 별 관심없이 습관적으로 열어보고는 별 신통한 것이 없다고 한쪽으로 밀쳐듭니다.
혹은 값비싼 선물만을 잔뜩 기대하고,
그렇지 않을 때 몹시 실망하여 주신 분을 원망합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이 적당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요.
나의 삶은 선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어떤 선물을 받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선물을 받는가, 곧 나한테 달려 있습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노동은 기쁨의 샘
`만성 피로'를 호소하는 현대인들이 많다.최근 일본에서 `가로시'라 책이 출간됐다.가로시는 우리말로 `과로사'라는 말이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쓰러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사람이 일하다가 피곤을 느끼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성취감을 갖지 못했을 때다.
발명왕 에디슨은 “몇시간 일을 했다거나 월급이 얼마라는 것은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노동의 목적을 성취하는 기쁨에 두면 훨씬 효율적이다”라고 말했다.일은 가능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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