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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엎드러지는지라 / 요한복음 18:1-11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엎드러지는지라

말씀: 요한복음 18:1-11

 

오늘은 1997년 첫째 주일입니다. 이로써 1996년은 벌써 묵은 해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전의 그 숱한 날들이 모두 묵은 날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묵었다는 것은 지나가버렸다는 말입니다. 지나가버린 것은 다시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껏 까지 있었던 모든 해들과 날들이 온통 묵은 해 묵은 날들로 다 지나가버렸을지언정,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나가 버린 모든 세월은 오늘의 삶이란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는 법입니다.

 

인간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지나간 모든 세월은 사라짐이 없이 그대로 남겨진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제껏 진리와 등지고 살아온 사람의 삶이 의의 모습일 수가 없고, 진리와 벗하며 나아온 자의 삶이 불의의 모양일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이전의 모든 해 모든 날들이 다 지나가버렸다 해도,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어제의 또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새해와 새날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해와 새날은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자에 의하여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젊디젊은 청년이 언제나 묵은 인생으로 일관할 수도 있고, 황혼이 깃든 백발 노인이 마치 청춘처럼 날마다 새날을 누리며 새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란 오늘의 새 이름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제목의 시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대의 청년보다 60이 된?/FONT>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인간이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 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졇幣磯?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속으로 침몰할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60세든, 16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희열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소망, 희열, 용기,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나이가 비록 20세라 할지라도, 그는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소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세일지라도, 영원한졗뼙燒?소유자로 남을 것이다.

 

이 시가 강조하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젊었다고 해서 반드시 새 날을 갖는 것이 아니요, 늙었다고해서 필히 묵은 인생을 사는 것도 절대로 아니란 겁니다. 세월은 단지 흘러갈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오늘 내 삶의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살아 남는다는 사실, 새해 새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는, 비록 20대라 할지라도 묵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해, 지금 행해야 할 것 조차 알지 못하는 그와 접하는 모든 시간은, 그와 부딪치는 순간 묵은 시간으로 추락해 버리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나간 모든 어제를 담는 그릇이요, 내일이란 오늘을 올려놓는 쟁반임을 아는 자는 팔십 노인이라 할지라도 매일 새 해, 새 날, 새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이듯이 내일은 오늘의 결론이기에,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을 새로이 가꾸므로 자신의 전 인생이 영원히 새로울 수 있음을 아는 연고입니다.

 

미디안 광야의 모세는 몸도 늙고 마음도 늙은 영락없는 80세 노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후회스럽고 한스러운 묵은 날들, 묵은 인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새 날, 새 인생은 남의 이야기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어느 날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모세의 인생이 새로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120세가 될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키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 언저리까지 인도하는 청년 같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도 하기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쓴 시편 90편의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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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80년 인생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의지했던 지난 80년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의 허망한 삶으로, 고통스러운 현실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한탄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시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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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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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한, 80세 이후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기쁘고도 즐거우며 영광된 새 날, 새 삶이 시작되더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할 때, 그 이전의 고통스럽고 잘못 되었던 삶들까지도 모두 합력 하여 선을 이루며 전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 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진리요 생명이신 주 하나님께 오늘 엎드린다는 것은 비단 오늘의 의미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결과인 내일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전 인생을 새날로 새롭게 가꾸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제 밤 12시가 오늘 새벽 0시 이기에 어제와 오늘은 단절되지 않고, 같은 이유로 오늘과 내일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서로 동기와 결과로 언제나 맞물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 홀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새 날, 새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늙고 쇠하고 끝내 죽어버릴 인간 속에서 모든 시간은 온통 묵은 시간으로 전락해 버릴 터인데 어찌 새로운 것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결코 쇠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 절대 변함이 없는 참된 진리를 힘입을 때에만, 마치 모세의 인생이 80세 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날,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의 위인이란 실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시작하므로 그 인생이 영원히 새로워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한번 엎드리고 그친 것이 아니라, 매일 엎드렸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엎드림은 보다 새로운 내일을 예비하는 것임을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지금 엎드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내일을 위한 예비책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전 인생을 영원히 새롭게 얻는 자요,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인생을 송두리째 의미없이 버려 버리는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그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로부터 은 30냥을 받는 댓가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로 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넘길 최적지로 겟세마네 동산을 지목하고서 지금 예수님을 생포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고 있는 바,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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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대제사장들의 하속들, 이를테면 예루살렘 성전 경비원 같은 사람들만 동원된 것이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되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군대란 두말할 것도 없이 로마의 군대를 의미합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자기 군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두명의 군인이라면 군대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군대란 상당한 군인들의 집합을 뜻합니다. 로마의 군대라면 당시 천하무적의 군대였습니다.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후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세계 최강의 군대가 무장도 하지 아니한 예수님 한 사람 체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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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4~6)

 

 

예수님께서 당신을 잡으로 온 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찾는 자가 바로 나다' `내가 곧 예수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가룟 유다와 대재사장들의 하속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로마의 군대까지, 그 곳에 왔던 체포조 전원이 뒤로 물러서며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 앞에 자발적으로 엎드렸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의 권능 때문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을 향해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를 위한 마지막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시작하므로 새로운 내일, 새로운 인생을 예비하라는 주님의 메세지였습니다. 그러나 본문12절로 13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들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어리석게도 주님 앞에 엎드렸던 그들은 곧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여 끌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을 진리와 대등한 존재로, 아니 진리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결과였습니다.?/FONT>

 

모세와 그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신앙의 위인들 역시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엎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엎드렸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엎드린 이상 그 삶을 지속한 반면, 가롯유다와 그 일행은 한번 엎드렸다가 이내 일어나 버렸습니다. 더이상 엎드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새 삶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매일 새 날을 맞고, 30일 마다 새 달을 맞고, 열두달마다 새해를 수도 없이 맞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일생은 쓰레기보다 더 못한 하잘 것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FONT>

 

지난 8년 반 동안의 통계를 보면 1년 12달 중 교인들의 출석률이 가장 높은 주일은 언제든지 신년 첫째 주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도 이변이 없는 한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신년 첫째 주일의 출석률이 년 중 가장 높다는 것은 두가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새해가 진정 새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자가 많다는 것이요 두번째는 안다고 해서 1년 12달 계속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고 새해, 새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란 연례행사가 아니라 중단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이미 신년 예배에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누가복음 3장 4절에 근거하여 `예비하라'로 정했습니? 우리에겐 1997년이란 한 해의 기회가 또 다시 주어 졌습니다. 올해에는 정신여고 강당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내년 6월이면 창립 10주년을 맞게 됩니다. 향후 새로운 10년을 이끌어 갈 목사님을 이제부터 찾아야 합니다. 불과 3년 후면 대망의 2,000년대가 시작됩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우리에게는 지금부터 예비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예비는 있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1년 12달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리와 생명의 법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해가 새해, 새 삶으로 엮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여고 강당이, 어떤 경우에도 사람 사이의 불화의 불씨가 아니라, 새 역사의 전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가 한마음으로 새로운 목사님과 더불어 새로운 10년을 일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이천년대가 정녕 새로운 가나안으로 우리 앞에 펼쳐 질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생포하러 나아갔던 가룟 유다 일행 역시 주님 앞에 엎드렸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 엎드리는 것으로 끝난다면 올해 나의 삶이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묵은 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삶으로 남습니다. 새해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란 결과로 나타납니다.주님앞에 엎드릴 때에만 모든 것이 진정으로 새로워 집니다. 참된 새로움과 새롭게 하는 능력은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안에만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또 다시 1997년 한해의 기회를 더 주시고, 이 아침 주님 앞으로 불러 주시고 주님 앞에 엎드리므로 이 한해를 시작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한번 엎드렸다가 작은 욕심과 유혹 때문에 일어나 버리는 가룟 유다가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세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어제를 담는 그릇이요, 오늘의 결과는 반드시 내일이란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 엎드리므로 우리의 내일, 우리의 전 인생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새로워진 우리로 인해 우리의 가정과 일터가, 주님의 교회가, 이 사회와 민족이, 온 인류가 날로 새로와지게 하옵소서. 아멘.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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