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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22-25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수지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여식아이였습니다. 하루는 수지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맛있게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수지가 보게 되었습니다. 수지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무엇을 만들고 계세요?"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응, 옆집 아주머니에게 갖다 드리려고 볶음밥을 만드는 중이란다." 수지는 어머니에게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어보았습니다. "왜 갖다 주시는데요?"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수지야, 옆집 아주머니가 사랑하는 딸을 잃어서 가슴에 큰 상처가 나셨단다. 지금 아주머니는 매우 슬퍼하고 계시거든. 그래서 우리가 당분간 아주머니를 좀 돌보아 드려야 할 것 같구나." 수지는 어머니에게 또 다시 물었습니다. "왜 우리가 돌보아 드려야 되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응, 사람은 매우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 쉽게 하던 일도 하기가 어려워지거든. 음식을 만드는 것도 힘들고, 빨래하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도 쉽지 않단다. 우리는 이웃이니까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되지 않겠니? 그러니 우리 수지도 옆집 아주머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렴." 수지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자기 힘으로 옆집 아주머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잠시 뒤에 수지는 옆집으로 갔습니다.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한참 뒤에 옆집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눈이 퉁퉁 부어있었습니다. 아마도 울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수지를 보더니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수지구나! 어쩐 일이니?" 수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아줌마.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줌마가 딸을 잃으셔서 가슴에 상처가 나셨대요. 그래서 매우 아프시대요." 그러면서 수지는 자기가 가져온 것을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지의 손에는 일회용 반창고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아줌마, 이것을 아줌마의 가슴에 난 상처에 붙이세요. 그러면 금방 나을 거예요." 옆집 아주머니는 수지의 말을 듣고서 목이 메었습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서 수지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래 수지야, 정말로 고맙구나! 네가 가져다 준 반창고가 틀림없이 아줌마의 가슴에 난 상처를 금방 낫게 해 줄거야." 수지가 가고 난 뒤에 옆집 아주머니는 근처 가게로 갔습니다. 거기서 열쇠고리 하나를 사왔습니다. 그 열쇠고리 끝에는 작은 유리구슬이 달려 있어서 그 속에 작은 사진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그 유리구슬 속에 수지가 준 일회용 반창고를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아플 때마다 반창고를 바라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든든히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우뚝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떠한 상처라도 깨끗하게 치유해 줄 것입니다. 오늘 뜻깊은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든든히 세워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예식인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광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성찬의 내용이 무엇이고, 성찬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언제까지 성찬을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첫째로, 성찬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성찬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입니다. 본시 유월절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딱딱합니다. 포도주도 평소 마시던 포도주에 물을 많이 탔습니다. 거룩한 예식이 술기운으로 인해서 경건에 지장을 입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찬의 내용물은 조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이 지극히 거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여러 가지 동작들이 나옵니다. 누가 떡을 가지셨습니까? 누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까? 그것을 떼신 분이 누구십니까?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받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이 모든 동작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잔을 가지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그것을 사례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에게 주신 분도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성찬을 제정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찬을 집례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떡을 받고, 또 잔을 받을 때에 예수님의 손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신 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찢기신 손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y Gagarin, 1934∼1968)의 이야기입니다. 1961년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약 1시간 30분을 걸쳐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소련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그를 초청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번에 지구 밖을 돌고서 돌아왔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나를 우주비행사로 삼아준 나의 조국에 감사했습니다. 나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신과 구름 타고 올라갔다는 예수와 천국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하늘에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주선 위에는 해와 달과 별들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선 밑에는 아름다운 지구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서 기독교의 모든 주장들은 거짓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모든 학생들과 선생들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박수 소리가 멈추어질 즈음 한 아이가 용감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가린 동무, 동무가 찾지 못했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천국은 그 때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무가 그것들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습니다. 1968년 유리 가가린은 비행기를 타고서 평소와 같이 지극히 일상적인 비행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해 버렸습니다. 그 사고로 그는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신이 없다고 오만한 소리를 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떤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업을 쉬는 시간에 칠판에 백묵으로 이렇게 크게 썼습니다. "God is nowhere(신은 아무 데도 없다)!" 그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는 어떤 다른 대학생이 조용히 칠판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를 이렇게 고쳤습니다.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성찬식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성찬식에 임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떡을 떼어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시요, 우리에게 잔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손, 피흘리시는 손,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떨리는 심정으로 경건한 심정으로 떡과 잔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크게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성찬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성찬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떡과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엄청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떡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22절 끝 부분 말씀을 보십시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떡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찢어주신 예수님의 살입니다. 예수님의 몸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에 언제나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왜 그들이 유월절에 누룩이 없는 떡을 먹었습니까? 본시 누룩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애굽에서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그들은 누룩 없는 떡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떡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떡을 먹을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찢어주신 살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잔에 담긴 포도주는 무슨 의미입니까? 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에 담김 포도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흘려주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을 때, 언제나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습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승을 잡았습니다. 피를 흘려야만 되었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의 피로서 죄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뜨거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한꺼번에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히9:22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죽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반드시 피를 흘리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히셨습니다.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으로 허리를 찔리셨습니다. 그곳에서도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채찍으로 등을 맞으셨습니다. 갈라진 틈으로 피가 나와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피를 흘리셔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흠뻑 적셔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잔에 있는 포도주는 바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입니다. 조셉 스크리븐(Joseph Scriven, 1819∼1886)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난폭했습니다. 그는 누구를 보든지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상대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전날 매우 사랑했던 그의 약혼녀가 호수에서 수영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기 싫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원망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하면서 스스로 학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서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결심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방황했습니다. 살기가 싫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괴로운 마음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울면서 원망했습니다. "오, 하나님! 왜 나의 사랑하는 약혼녀를 그냥 데리고 가버리셨습니까?" 그리고서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약혼녀를 호수에서 잃었지만, 나는 나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잃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피흘리고 죽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너를 사랑했단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빛나는 십자가 속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흘리시면서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파도처럼 진하게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감격의 눈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부질없었고, 잘못된 것이었는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가슴 벅차 오르는 감격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 487장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더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오늘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근심, 걱정, 모든 무거운 짐에서 온전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찬의 기한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성찬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그 날까지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구약의 유월절 예식이 종료된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 곧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우리는 구약의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로운 예식인 성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된 우리는 성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성찬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입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공중으로 끌어 올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계19:9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는 성찬을 지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해서 새 것으로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까지 교회는 예수님이 명하신 성찬예식을 거룩하게 계속해서 지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정작 죽었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대신 살아나게 된 정말 운 좋은 사나이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강도 바라바였습니다. 1950년 스웨덴의 작가 라게르크비스트(P. Lagerkvist, 1891∼1974))라는 사람은 살인강도 바라바의 회심을 다룬 작품 "바라바"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그 작품으로 인해서 그 다음 해인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바라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군중들에게 섞이지도 못하고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자기가 마땅히 거기에 매달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살인강도 바라바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그가 흉악한 죄인이었지만, 자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회한의 정이 그의 마음 속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몇 일이 지났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금 살아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바라바는 그 사실을 좀 더 파악해 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접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까이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라바는 다시금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도적질을 했습니다. 때로는 강도 짓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골고다 사건의 충격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금 로마 병정들의 손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로 팔려갔습니다. 거기서 바라바는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그에게서 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즈음 로마의 황제 네로는 반정신병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네로는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바라바도 스스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도 기독교인입니다. 나를 잡아가십시오!"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라바는 스스로 체포를 당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 안에는 수많은 십자가들이 서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소망을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라바에게만큼은 말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바라바는 살인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흉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바라바는 끝까지 고독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밤이 깊었습니다. 구경군들도 다 지나갔습니다. 어두움을 밝히고 있던 횃불도 하나 둘 씩 꺼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는 사람들도 숨이 다 멈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살인강도 바라바만 홀로 생명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라바도 기운이 진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면서 바라바도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바라바가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바라바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대신 산 것입니다. 바라바의 마음 속에 있었던 고통, 아픔, 회한의 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주어도 괜찮습니다. 일생동안 고독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 좋습니다. 하나님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예수님만 알아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임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라도 "오,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길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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