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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사랑하며 삽니다! (마태복음 5:43~48)

우리는 사랑하며 삽니다! (마태복음 5:43~48)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영국의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를 받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와 함께 중국 선교에 힘쓸 동역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잠시 귀국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여러 명이 중국 선교사로 지원을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과연 그들에게 중국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그 질문에 따라서 그들은 차례대로 한 사람씩 답변을 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곳에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중국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할 뿐,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흡해 하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사랑이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중국 사람의 옷을 입고, 중국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자그마한 나룻배 한 척을 온종일 세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배를 타고서 강변에 있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마을에서 전도를 마치고, 강 저편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 배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나타난 어떤 거만한 중국인 부자 한 사람이 자기가 그 배를 타야된다면서, 허드슨 테일러를 옆으로 밀쳐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허드슨 테일러는 진흙에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그의 옷은 진흙이 묻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중국인 부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 올라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뱃사공은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저는 이 배에 당신을 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당신이 밀쳐버린 저분이 세를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분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영국의 선교사님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중국인 부자는 깜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거기에는 중국인의 옷을 입었지만 분명한 영국의 신사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서 있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진흙으로 신발과 옷을 다 버렸지만 조금도 화를 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어쩔 줄 몰라하면서 당황해하는 중국인 부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몹시도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비록 이 배가 좁기는 하지만 같이 타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타시지요."
같이 배를 타고 가면서 중국인 부자는 너무나도 미안한 듯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저같이 무례한 사람에게 전연 화를 내지 않고,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도 제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답니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 부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은 중국인 부자는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악을 베풀어주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랑해야할 이웃과 미워할 원수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웃과 원수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를 오해해서 우리를 자기의 원수라고 간주하고서 우리에게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우리를 미워하며 핍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우리의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사랑해야할 우리의 이웃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웃과 원수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고 누구나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행여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될 미움의 찌꺼기가 아직도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면 이 시간 다 떨쳐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본시 이 말씀은 구약성경 레19:18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레19:18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도 여러 번 인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고,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도 역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레19:18의 말씀을 통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인 원리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물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레19:18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주어졌습니다. 친구는 친구니까 사랑해 주어야 되고,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니까 더욱더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성경 두 곳을 찾아 한 번 읽어봅니다.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두 곳의 말씀을 읽을 때 그 차이가 무엇인지 여러분 스스로 발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22:1∼4을 봅니다.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찌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다른 곳을 찾아 읽어봅니다.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23:4∼5입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여기서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신22:1∼4에서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반면에 출23:4∼5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단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같이 취급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컨대 우리의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먹이고 마시웁니다. 또 우리의 몸이 추워할 때는 옷을 입힙니다. 우리의 몸이 피곤함을 느낄 때는 재우거나 쉬게 합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25:2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이웃 사랑이란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았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죽게 된 채로 길바닥에 내버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제사장도 지나가고, 또 잠시 뒤에는 레위 사람도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나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지금 자기 동족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서 다 죽어 가는 채로 버려져 있는데도 그들은 그냥 보고서 그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들도 마음 속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은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원수같이 여길 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미워하면서 상종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당한 유대인을 그냥 피하여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는 강도 당한 유대인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룻밤 같이 유하면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해 준 사마리아 사람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레19:18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중요한 두 가지 원리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든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든지 우리는 구분 없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레19:18의 말씀을 자기들이 편한 대로 왜곡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미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예수님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마태복음 5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실례를 다섯 가지로 일깨워주셨습니다. 첫째 예는 살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예는 간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예는 이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넷째 예는 맹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예는 보상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여섯째 예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유전에 따라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러한 가르침을 레19:18에 나타난 성경적인 원리와 서로 비교해 볼 때, 그들은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레19:18에 없는 말씀을 임의대로 집어넣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중요한 말씀을 빼버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부각시키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임의대로 덧붙였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구약성경을 찾아보아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해서 자기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그릇되게 가르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시험적으로 질문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의 별명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율법을 베끼다보니까 자동적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을 다른 말로 율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은 무엇을 의도합니까? 그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따로 있고, 자기가 미워해야 할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으로 주신 것이 바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그 당시 사람들은 끼리끼리만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인 자기 동족들만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경우에는 무조건 미워해야 할 원수로 취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을 지극히 미워했습니다. 또한 본시는 자기들의 동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몸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방인의 편에 서서 일하는 사람, 예컨대 세리와 같은 사람들도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아울러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사람들, 예컨대 창기와 같은 여자들도 사랑해야 할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증오심만 쌓여 갔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겠습니까? 악해질 때로 악해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외식적입니까? 앞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말로는 "사랑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동족인 유대인이 강도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레19:18에 없는 말씀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고, 꼭 있어야 할 중요한 말씀을 고의적으로 빼버렸습니다. 레19:18에서는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잔칫집에 가서도 언제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자기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했던 기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에 긍지를 느끼며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똑같이 여기면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고의적으로 빼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시고 누구를 더 의롭다고 여기셨습니까? 하나님은 세리를 더욱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원수처럼 취급하면서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사실은 세리의 의보다도 더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레19:18의 말씀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제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은 친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원리를 우리에게 밝히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대하는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로 취급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우리는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일깨워주셨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없이 또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구분이 없이, 때에 따라서 햇빛을 내려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불의한 사람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미워하고 원수로 여긴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우리는 천국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46∼47절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어떠한 수준입니까? 자기들이 원수처럼 취급하면서 미워했던 세리나 이방인의 의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런 의를 가지고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는 당연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는 나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세리와 이방인의 의보다도 나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대상에는 아무런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은 두 번째 원리에 대해서 밝혀 주셨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셋째, 문안입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44절 하반부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 우리를 핍박한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평안이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누가 우리를 핍박하면 우리도 본능적으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Prayer is the forerunner of mercy(기도는 긍휼의 선봉이다)."
기도가 앞서가면 반드시 그 뒤에는 긍휼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절로 우리의 마음 속에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미운 생각이 듭니까? 그를 위해서 진정으로 축복하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농부에게 있어서 햇빛과 적절한 때의 이른 비 및 늦은 비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불의한 자라도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때에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농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베풀어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문안입니다. 47절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반가운 얼굴로 내가 먼저 인사하십시다.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나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못 본척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밝은 얼굴로 먼저 찾아가서 인사하십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세 가지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기도와 선행과 문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성경에 나타난 이웃 사랑에 대한 원리 두 가지를 밝히 말씀해 주신 뒤에 결론적으로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결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외식적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또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도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놓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또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온전케 하셨습니까? 예수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의가 있습니다. 이는 온전한 의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곧 온전한 의가 있기 때문에 천국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온전해 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지지 못한 의가 있습니다. 그들보다도 더 많은 양적인 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간적인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없는 의, 그들보다도 질적으로 더 나은 의, 온전한 의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이 의가 우리를 천국의 백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무엇이 더 귀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부귀, 이 세상의 명예, 이 세상의 행복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꽃피워야될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에 대한 원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날마다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베푸는 사랑을 통해서 깊은 감화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귀한 역사가 날로 더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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