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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마태복음 6:22~24)

우리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마태복음 6:22~24) 
       

마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유대인들의 속담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리면 돈은 우리의 충실한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섬기려고 하면 돈은 곧 우리의 무서운 폭군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우리가 돈을 다스려야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섬기도록 해야지, 우리가 돈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는 사탄이 어떤 청년에게 다가왔습니다. 사탄은 청년에게 병 10개를 보여주면서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이 10개의 병들 가운데 9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고, 단 하나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다. 네가 만약 꿀물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서 마시면 내가 너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 한 번 해 보겠느냐?"
물론 청년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필요했지만 자기의 목숨과 돈을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몹시도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탄은 또다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10개의 병들 가운데 9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으니까, 확률적으로 승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딱 한 번만 사탄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병 한 개를 골라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대로 사탄에게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번 돈은 언제나 쉽게 쓰기 마련입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이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또다시 사탄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사탄은 그에게 이번에는 지난번 돈의 2배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청년에게 9개의 병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마시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먼저 번보다 좀 더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쉽게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색잡기에 놀아났습니다. 급기야 그는 마약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결국 그는 마약에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급속히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청년 편에서 사탄을 불러들이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그의 눈앞에는 단 2개의 병만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돈벼락을 맞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독약을 먹고 죽을 것인가? 청년은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병 2개 중에 하나를 택해서는 꿀꺽 삼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그러니 어서 내게 약속한 돈을 내놔!"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탄은 마지막 남은 한 병을 자기의 손에 쥐더니 꿀꺽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그를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봤지? 애당초부터 독약은 들어있지 않았어!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독에 중독이 되어서 서서히 죽고 있었던거야. 너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 청춘도 잃어버리고, 영원까지 상실한 것이야. 너는 이제 곧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내가 너에게 그동안 지불한 모든 돈에 대한 대가를 하나도 남김없이 고통과 더불어서 갚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지 맙시다. 그것은 우리의 목에 맨 연자맷돌과 같습니다. 땅에 쌓은 보물은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천사의 날개와 같습니다. 우리를 위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보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과 땅에 쌓은 보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눈과 나쁜 눈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주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다 똑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성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우상시하면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나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성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2절입니다.
둘째로, 나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3절입니다.
셋째로, 두 주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4절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면서 신령한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2절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가리켜서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등불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느 소경이 자기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거니받거니 하는 동안에 밤이 깊었습니다. 소경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소경의 손에 등불 하나를 쥐어주었습니다. 소경은 친구가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아니, 여보게. 자네까지 나를 놀리는건가? 소경이 무슨 등불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이 등불을 주는건가?"
친구는 정색을 하면서 소경을 달래었습니다.
"여보게, 오해하지 말게나. 이것은 자네가 보라고 주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이것을 들고 가야지 밤길에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자네의 등불을 보고서 부딪히지 않고 자네를 피해서 갈 것 아닌가? 그러니 이 등불을 들고 가게나."
소경은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성급하게 화를 낸 것에 대해서 사과를 했습니다. 이제 소경은 친구가 쥐어준 등불을 들고서 조심스럽게 밤길을 더듬으면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한참 오다가 소경은 별안간에 "꽝!"하고서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당신의 눈에는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 소리를 들은 상대방은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나 곧 사태를 파악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소경이셨군요. 그래서 등불의 불이 꺼진 것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등불이 하는 역할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등불이 꺼져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두움을 밝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그러나 눈이 성해야지 온 몸이 밝지,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눈이 성하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걸어가시는데 길가에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요9:3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9:41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육신의 눈은 떴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은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바로 눈앞에 서 있건만 메시야 조차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의롭다고, 신령하다고 착각했습니다. 따라서 "눈이 성하다"라는 것은 신령한 눈이 감겨져 있지 않고 뜨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렸기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나쁜 눈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신령한 눈을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신령한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스데반 집사처럼 또 천사의 얼굴처럼 우리의 모습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언제나 환하게 빛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쁜 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3절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여러분, 왜 우리의 눈이 나빠집니까? 우리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황금에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중국 진나라때의 고전인 여씨춘추를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장 한복판에 금은방이 차려졌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나이가 넋이 나간 듯이 진열대 위에 있는 황금덩어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 황금덩어리를 들고서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벌건 대낮입니다. 시장에 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는 얼마가지 못해서 붙잡혔습니다. 그 뒤 관가로 끌려갔습니다. 재판관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시장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들고 뛰었는고?"
그때 그 사나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 순간 저의 눈에는 황금만 보였지,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금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웠다," "물질에 눈이 멀었다."
제가 실물교육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뒷면에는 경회루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눈앞에 대고 보면 무엇이 보입니까? 세종대왕밖에는 안보입니다. 돈밖에는 안보입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도 돈밖에 안보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도 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밑으로 쳐다보아도 돈이고, 위로 쳐다보아도 돈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에 눈이 멀었다는 뜻입니다.
그 옛날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다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예수님이 기껏해야 은 30냥 짜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돈에 눈이 뒤집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눈이 나쁩니다. 그들은 땅만 바라보면서 삽니다. 그래서 땅에 보물을 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눈을 주셨습니다. 위엣 것을 보면서 사십시다. 예수님은 23절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야 할 세상의 빛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빛조차도 어두우면 누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겠습니까? 이 세상은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신문에 나온 만화의 내용입니다. 한 아가씨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약혼을 파혼해 버렸어. 그 남자가 시원치 않아서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
그러면서도 자기 손가락에는 다이아반지를 계속 끼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이상스럽게 생각하면서 물었습니다.
"너는 파혼을 했다면서, 왜 그 반지는 그대로 끼고 있니?"
그때 그 아가씨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응, 다이아반지에 대한 내 애정은 변함이 없거든."
다이아반지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이아반지를 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교회에 참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난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청년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부모님은 자부가 될 그에게 다이아반지를 결혼반지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정중하게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남편은 지금 대학생이기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만 원짜리 상징적인 반지 하나로 나는 족합니다. 이 다음에 제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다이아반지를 선물해 주면 그때는 기쁨으로 끼겠습니다."
그러니 시부모님이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돈만 알고, 재물만 밝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달라야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사랑, 정성, 진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우리의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두 주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곳에 한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점을 치는 여종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끊어진 것을 알고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주인들"을 섬겼습니다.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 이상의 주인들을 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하신 뜻은 수의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입니다. 그 여종이 섬겼던 주인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두 주인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24절 끝 부분에 보니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이 두 주인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와 "저"입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이들 두 주인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땅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면서 땅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재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에게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며 살라고 요구합니다. 이처럼 서로 간에 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농부가 하루는 기쁜 듯이 집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암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하나는 붉은 색이고, 하나는 흰색이야. 하나님의 은혜지. 우리 이 두 마리를 잘 길러서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칩시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흰 송아지와 붉은 송아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칠까요?"
그때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벌써부터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어디에 있소? 두 마리 다 잘 길러서 때가 되면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칩시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농부는 풀이 죽어서 시무룩하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그만 하나님의 소가 죽어버렸소."
아내는 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느 소를 하나님께 바칠지 결정하지는 않았잖아요?"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흰 송아지를 드려야되겠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오늘 흰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오. 그러니 하나님의 소가 죽은 것이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행여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왜 매번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소만 죽어야 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아직도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유대인의 속담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려야지 돈이 우리의 충성스러운 종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물을 섬기고자 하면 재물은 우리의 폭군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재물에서 자유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돈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돈이 어떻게 하면 우리를 섬길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을 다스리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나라의 경제가 몹시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깨어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서 물질을 다스리는 복을 얻기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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