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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는 다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6~6)

우리는 다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6~6)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주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시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습니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습니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의 복장하고서 어떤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의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 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영원토록 종식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관계를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제는 고후5:18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거룩한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화목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故한경직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절로 부흥하기 마련입니다. 보이게든 보이지 않든 속으로 싸우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되기만 하면 절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갈5:15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싸우고 다투면 결국은 피차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다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짤막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마7:6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5:9에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다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첫째로,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요즘에는 개뿐만 아니라 돼지조차도 애완동물로 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그런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벧후2:22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처럼 성경에서 나타나는 개와 돼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불결하고 혐오감을 주는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들이고, 자기들 이외에 이방인들은 개와 돼지처럼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의로운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개나 돼지처럼 부정한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옛날 시골의 어떤 마을에 한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불행하게도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준 자기 아내의 얼굴은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던 중,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노잣돈을 다 털었습니다. 그리고는 큼지막하고 예쁜 거울 하나를 샀습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거울을 구경조차도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나니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가족들은 밭에 나가 일하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사온 거울을 아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방문 입구에 걸어두었습니다.
한참 뒤 아내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웬 젊고 예쁜 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더니 급기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사람이 보라는 과거는 안보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녔구나. 아이고 억울해라!"
시어머니는 그가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아가야!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냐?"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거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런 식으로 집안에 다른 여자를 들여놓으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시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며느리에게 와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보니까 너하고는 상대가 안 된다. 내가 보기에는 다 늙어 빠졌는데 뭘 그러느냐? 별일 없을 것이다."
잠시 뒤에 시아버지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들어오다가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아무런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우선 절부터 받으옵소서."
옛날 거울이 없었을 때는 자기의 얼굴을 모르니까 이런 착각이 더러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자기의 얼굴을 보고서 다른 사람의 얼굴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개요, 돼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만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처럼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개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설명하셨습니까? 6절 끝 부분에 보니까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의 특징은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비판했습니까? 한 두 번 실수로 잘못을 했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병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본문에 보니까 돼지의 특징을 "발로 밟고"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깔고, 뭉개고, 밟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이 개와 돼지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기들은 그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와 같다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착각이 없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적인 비판의 태도를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거룩한 사명을 다하십시다.

둘째로,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먼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본시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거룩할 성(聖)자를 써서 "성전(聖殿)"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가 "성직자(聖職者)"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것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레10:10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람들, 특별히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의 반대는 속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거룩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만큼 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13:45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진주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그만큼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개와 돼지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나타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진주와도 같이 지극히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도 살리시는 큰 이적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이요, 메시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러러 보면서 감격 속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사역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사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앞장서서 끈질기게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서 율법을 폐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고 그것을 트집잡아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가리켜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완전히 세속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온전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고 모진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 외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신성을 모독한 자요,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 등 갖은 비판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예수님을 정죄하고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독선과 아집 때문에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값진 것을 값지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영원한 멸망의 자식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때였습니다. 한 독일군 병사가 심하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동료들은 다 퇴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상 때문에 퇴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군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급히 영국군 병원으로 옮겨져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를 너무나도 많이 흘렸기에 수혈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와 똑같은 혈액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와 똑같은 혈액형을 가진 간호사나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다행스럽게 거기에 있는 의사 한 명과 간호사 한 명이 그와 똑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는 병사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들의 피를 뽑았습니다.
이제 뽑은 피를 독일군 병사에게 수혈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그 독일군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기는 영국군 병원이 아닙니까? 그럼 내 몸에 지금 넣고자 하는 피도 당신들의 피입니까?"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 병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주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싫습니다! 죽어도 나는 당신들의 피를 받기 싫습니다. 절대로 내 몸에 손대지 마시오!"
결국 그는 수혈을 거부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건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원한 멸망의 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음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음 받기를 바라며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6절 하반부입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광경을 머리 속으로 한 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어떤 진주 장사꾼이 바닷가 앞 항구에 가서 많은 돈을 주고 진주 한 포대를 샀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을 지나다가 그만 들개와 돼지떼를 만났습니다. 들짐승들은 배가 고픈 듯이 눈을 번뜩이고 이빨을 으르렁거리면서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주장사는 너무나도 다급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포대를 열고서 그 속에 있는 진주를 한 움큼 끄집어내서 들짐승들에게 뿌렸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콩이나 나무열매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들짐승들은 그 진주를 입에 넣고 씹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주는 딱딱해서 씹히지도 않고, 전혀 맛도 없습니다. 그제야 들짐승들은 자기들이 속은 줄 알고 그 진주를 뱉어서 발로 짓밟았습니다. 그리고는 화가 난 모습의 들짐승들은 진주장사에게 덤벼들어서 그를 찢어 상하게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개와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져 주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와 돼지는 본질적으로 진주의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잘못할 때 실수로 잘못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악해서 잘못하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실수일 뿐입니다. 그의 마음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다윗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마음에 합하는 자로다." 하나님은 다윗 왕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에게도 큰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실수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수에서 돌이키고 다시금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의로운 척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곡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가라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들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주인이여 우리가 밭에 있는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때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하리라."
우리가 그들과 일일이 다투면서 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심판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절로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상한 일을 당하면 스스로 복수하려고 합니다. 남이 나를 비판하면 나도 그를 비판하려고 합니다. 안 되면 연판장이라도 써서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다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습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예수님을 살려주겠다는 빌라도의 회유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비아냥거렸습니까?
"네가 지금 만일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나마도 나약한 모습으로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기독교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걱정이 되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러다가는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끊어질 것 같습니다. 천사들을 내려보내서 손을 좀 보게 할까요?"
예수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내 제자들을 믿는다. 겉보기에 저들은 약해 보이지만 저들이 결국은 승리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 되지 않아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대로마제국은 기독교 앞에 완전히 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악은 결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만이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5:9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십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다툼이라도 종식되고 이제는 화목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라도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승리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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