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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애통하는 사람 (마 5:4)

애통하는 사람 (마 5:4)

 

 


   오래전 7080세대 가수 조동진이 발표한 노래 가운데 “행복한 사람”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노랫말 앞부분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가사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을 향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눈물 흘리며 울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근거가 알쏭달쏭합니다. 아직도 남은별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두 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해석을 해 본다면 이렇게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과 슬픔 중에 울고 있지만 아직 남은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 아닙니다. 그 남은별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 위로를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울고 있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만 가수 조동진이 이 곡을 작사할 때 바로 오늘 본문 마 5:4에서 앞부분을 따왔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을 보면 “애통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되어있는데, 이 부분을 가져다 가사 첫 부분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영감을 얻었고, 이 영감을 기초로 이 곡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영감있는 노래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본문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의문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떻게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과연 모든 종류의 애통이 다 복된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이 의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차례를 바꿔서 두 번째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복된 애통이란 무엇인가?

 


   본문의 애통이라는 말은 헬라어 “펜데오”(Pendeo)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펜데오는 슬피 우는 것을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애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애통이란 가슴이 아프도록 슬피 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도록 슬피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슴 아프도록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복되다는 것입니까? 물론 본문에서 애통의 구체적인 예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애통 가운데 복되지 않은 애통이 있고, 또 복된 애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복되지 않은 애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원통함이 배어있는 애통입니다. 가슴이 아프도록 슬프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 원통함이 배어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서 원통함이란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애통하게 된 이유가 아무개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 아무개를 원망하는 마음이 담긴 슬픔을 말합니다. 물론 이런 애통은 복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분통함이 배어있는 애통입니다. 가슴이 아프도록 슬프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 분통함이 배어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서 분통함이란 몹시 분하여 쓰린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애통하게 된 것이 너무 분하여 미워하는 마음이 담긴 슬픔을 말합니다. 역시 이런 애통이라면 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애통이 복될까요? 한 마디로 그저 순수하게 가슴이 아프도록 슬피 우는 애통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를 미워하지 않고 그저 자기 가슴이 아프도록 슬피 우는 애통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애통이 순수한 애통이고, 그래서 복된 애통일까요?

 


   첫째, 자신을 향한 애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 애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과거에 지은 죄 때문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죄 때문에 애통해 했던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마 26:7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바깥뜰에서 세 차례나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는데 마침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애통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애통이 복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잊고 있거나 숨기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이 나거나 성령의 고발을 받게 될 때 애통할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애통이 회개의 눈물을 흘려 죄를 씻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달랐습니다. 마 27:3-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시자 스승을 팔아넘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달았으나 그 죄 때문에 애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죄를 씻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 때문에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애통했던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롬 7:21-24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가지 법이 자기를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법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법을 따라 악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둘이 함께 어우러져 뒤엉켜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사망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몸이란 로마인들이 사용한 여러 사형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죽은 시체를 사형수의 몸에 묶어 광야에 버리는 사형법입니다. 이 때 시체가 썩으면서 산 사람의 몸도 함께 썩어가서 결국 죄수도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이것처럼 바울은 자기 안에 이 두 가지가 엉켜서 결국 자신이 멸망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망의 몸과 같은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애통이 복된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자아가 싸우고 있어서 애통할 때 그 애통이 복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모습 때문에 애통할 때 그 애통이 복됩니다.

 


  둘째, 이웃을 향한 애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때로는 중보적 애통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애통하며, 공동체와 나라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애통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한 애통의 대표적인 예를 예레미야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라는 성경은 예레미야의 노래를 따로 모아 놓은 책입니다. 다른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원래 제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70인역 번역자들이 내용을 읽어보고 이 책의 이름을 “예레미야의 눈물”이라고 붙였습니다. 오늘 우리 성경도 이 제목의 의미를 존중해서 예레미야의 애가라고 붙였습니다.

 


   이 책은 1:1에서 “슬프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를 보면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이 책은 온통 예레미야의 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애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의 조국 이스라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죄악의 길로 점점 깊이 빠져가는 것을 보며 애통합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며 애통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이 애통이 중보적 애통입니다.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애통하는 그런 애통이 중보적 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보적 애통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중보적 애통은 복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중보적 애통의 원조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히 5: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여기서 통곡과 눈물은 문법상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여러 차례 애통하시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애통하신 내용을 직접 기록한 내용은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요 11:35입니다. “예수께서 눈물 흘리시더라” 죽은 나사로를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 개개인 때문에 애통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눅 19:41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와 나라 때문에 애통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애통입니다. 바로 거룩한 애통인 것입니다. 주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런 거룩한 애통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애통이 왜 복된가?

 


   그러면 이제 애통이 왜 복되다 하시는가 이 의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애통하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원어를 보면 “파라칼레오”(parakaleo)입니다. 이 말은 “곁으로”라는 뜻의 “파라”(para)와 “부른다”라는 뜻의 (Kaleo)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곁으로 불러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애통하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사람을 모른 체 하시거나 홀로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곁으로 부르셔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다는 것만 믿고 깨닫게 되면 더 할 수 없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 통신회사의 TV 광고 카피가 기억이 납니다.

 


당신의 흰머리에 가슴 아프다는 말 대신

 


네가 참 궁금하다는 말 대신

 


선생님은 너희를 믿는다는 말 대신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말 대신

 


늘 곁에 계셔달라는 말 대신

 


많이 그리울 거라는 말 대신

 


긴 세월 함께 있어줘 고맙다는 말 대신

 


우리는 하나라는 말 대신

 


사람의 손은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마디 많은 말보다 듣기 좋은 몇 마디 말보다 곁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훨씬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사람들 곁에 오셔서 그 따뜻한 손길로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등을 두드려주시고 손을 잡아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애통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따뜻한 손길로 슬픔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인을 심방하며 받은바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교회 한 권사님이 청상과부로 외아들 하나를 남편처럼 아들처럼 애인처럼 사랑하며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로 22살의 그 귀한 아들이 죽고 말았답니다.

 


  이 목사님께서 위로 차 심방을 가셨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저 손만 꼭 잡고 안타까워하며 쩔쩔매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먼저 말문을 열고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를 위로하러 오셨지요. 위로하시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저는 이번에 아들을 잃고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외롭기 한량없던 저에게 22년간 너무 멋진 아들을 보내주셔서 행복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보다 훨씬 완전하고 아름다운 곳에 가서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외아들을 잃고 보니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나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슬픔을 딛고 일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더욱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자신을 향해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고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느끼며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향해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와 나라를 위해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애통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파라칼레오, 곁으로 부르십니다.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눈물을 그치게 되고 슬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울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위해 울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울고, 교회를 위해 울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 눈물이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이 눈물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복된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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