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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씀의 화육(Incarnation)(요 1:1-3, 14)

말씀의 화육(Incarnation)(요 1:1-3, 14)

 

법정 스님의 글 중에 ‘말은 존재의 집’이란 내용이 있습니다. 들어 보시지요.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그래서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래 “말은 존재의 집”이란 이 표현은 널리 알려진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덱거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나 하이덱거가 이 말을 하기 훨씬 오래전 1세기에 살던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그의 유명한 요한복음서 서론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만든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말씀이 존재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희랍어로 ‘로고스’(logos)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 말씀 곧 로고스의 의미를 어떤 철학적 의미가 아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칭하는 별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그 분은 온 우주가 만들어 지기 전부터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1절의 선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지정할 수 없는 시간의 이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시간이 생기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시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만물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곧 창조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곧 역사의 한 복판에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화육(化肉,incarnation)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사건인 것입니다. 1:14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아마 들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화육을 설명하기 위한 오래된 설명입니다. 어느 여름 날 개미들의 행렬이 벼랑 끝으로 이어져 가는 것을 보고 답답한 나머지 우리는“내가 만일 개미가 될 수 있다면 저 개미의 행렬로 다가가 그리로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할 수 있었을 것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지요.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멸망이 기다리는 심판을 경고하시고 인생의 방향을 돌이키도록 호소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화육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왜 그의 존재는 말씀으로 일컬어 지셨으며, 그는 역사의 한 순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1.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인생에게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저는 말을 통해 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표현’(manifestation)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그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이 천년 전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1:18의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는지라”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독생 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낳은 자가 사람이둣 하나님이 낳은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14:8에 보면 빌립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어느 날 예수님에게 나아와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할때 예수님의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요한14:9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기 아직도 인류가 묻고 있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나서 스스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셔요? 하나님은 여러분 집의 아버지 같은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한 어린 학생이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따져 물었더니 이 어린 학생이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 아빠는 매일 밤늦게 술 취해 집에 오시구요. 그리고 엄마와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시고 마구 때리셔요” 비유가 잘못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의 정답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같은 분이십니다.” 그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날인 것입니다.


2.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인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말을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커뮤니케이숀’입니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을 위해서 였습니다. 제가 지금 말을 함으로 여러분과 제가 소통하듯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타락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단절된 것입니다. 죽음의 성경적 의미는 본래 단절(separation)이고, 죄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가져 온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중보자’라고 증언합니다. 딤전2:5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어떤 의미에서 그는 중보자이셨습니까? 그 다음 절 딤전2:6이 대답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죄가 인류와 하나님사이를 내신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다시 우리와 하나님사이를 연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분 앞에 나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요한14:6에서 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확신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적 소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를 나오던 2년간 제가 제일 힘들었던 일이 기도였습니다. 기도 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일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데 아직 제가 그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다가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된 1965년 9월 마지막 화요일 오후 그 날 온 밤을 지새워 제 입술에서 흘러나온 반복된 한 마디는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믿음으로 붙드는 순간 예수님의 아버지가 비로소 참된 내 영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롬8:15의 말씀처럼 그 날 저는 저를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주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제 인생의 가장 위대한 사건-하나님 아버지와 저의 소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바로 인생들에게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하도록 속죄의 주님으로 오신 날인 것입니다.


3.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인생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통해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임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나타내시면 되었지 그가 꼭 육신을 입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은 이 문제를 그의 또 하나의 편지인 요한 일서를 기록하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가 시작되는 1:1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귀로 듣고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기 위해서 그는 육신이 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다시 요한17:3의 말씀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함’이 아닌 ‘경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앎은 경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시편34:8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맛보아 알기까지 참으로 그 음식을 안다고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까지 하나님을 참으로 안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함께 하며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며 비로소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맛보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천년 전의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다시 시간적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14-16장에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보내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던 제자들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임재와 교훈을 경험하고 살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 천년 전의 크리스마스를 오늘의 크리스마스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그리스도'가 아닌 '오늘의 그리스도'를 경험하기 위한 제안입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계절-무엇보다 가장 진지한 예배를 드릴 계획을 세우십시오. 참된 예배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함께 드리는 예배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내가(예수님이) 그들 중에 함께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는 그 곳에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 중에 지금 이 순간 임재 하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임재가 권능과 영광으로 경험되는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바로 그 영생의 말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영광의 말씀이 지금 이 순간 여기서도 여전히 미천한 우리의 존재와 더불어 함께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축복-“인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의 축복이요, “말씀의 화육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무엇보다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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