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장 37 - 42절(개역개정)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선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돈을 택할 것이고, 육체가 병든 사람은 건강을 택할 것이고, 결혼을 원하는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택할 것입니다. 어떤 선물을 선택하든 자신이 최고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분문에서는 최고로 좋은 선물을 말씀합니다. 그 선물은 바로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좋은 선물이며 최고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 안에는 모든 좋은 것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행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성령님께서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모여든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가 답변하는 내용이 38-40절까지입니다. 오늘 설교는 베드로의 답변 가운데서 좋은 선물이고 최고의 선물이신 성령님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분들은 성령을 받으시고 이미 성령을 받은 분들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럼 성령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37절에 보니 “그들이 이 말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 강단에서 제 말이 나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강단에 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는 곳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중에 성령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5:6에 보면 “성령은 진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진리가 있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진리가 셋이 더 나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요 14:6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증거 되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또 하나의 진리는 교회입니다. 딤전 3:15에 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진리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 일을 할 때, 교회를 사랑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17:17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딤후 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는데 감동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저자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은 설교자에게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성령님은 그들에게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역사합니다. 마 12:43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을 집으로 삼고 살다가 그 집에서 나가서 쉴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물 없는 곳입니다. 이 말은 귀신이 우리가 마시고 씻는 물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 12:43에서 물은 우리가 마시고 씻는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 5:26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이 있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고, 마귀는 말씀이 없는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선물을 받으려면 말씀 듣기를 힘쓰십시오. 설교 시간에는 설교 듣는데 집중하시고 아멘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강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또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님께서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2.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라. 37절에 보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반응합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셨고 그 결과 그 날 3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행 7:54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이들과 반대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령님은 역사하지 않으셨고 마귀가 그들에게 역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역사를 따라서 자신들의 귀를 막고 돌로 스데반을 쳐서 죽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두 사람 모두 복음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들은 표현은 달랐지만 동일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밭 즉 옥토입니다. 이 네 종류의 밭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네 종류의 밭에 동일한 종류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런데 열매는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서 열매가 결정됩니다. 좋은 밭은 열매가 풍성하고 좋지 않은 밭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에게는 열매가 있으나 말씀에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은 열매가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이 거의 고착되어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거의 항상 자신의 습관대로 반응을 합니다.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습관 된 사람들은 거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습관이 된 사람들은 거의 부정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훈련,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훈련, 감사로 받는 훈련을 하십시오.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길슨(M. Gilson)은 [슬픈 인간의 불행은 습관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실험에서 얻는 결과입니다. 구멍 두 개에 두 눈을 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상자 속에는 두 장의 그림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그림을, 왼쪽 눈으로는 왼쪽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한 그림은 슬픈 모습의 얼굴이고, 또 하나의 그림은 기쁜 모습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의 그림만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기쁜 얼굴의 그림만 보더라는 것입니다. 길슨 박사는 이것을 ‘인식의 차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느 쪽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슬픈 얼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낯의 얼굴의 그림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 역시 동일합니다. 부정적으로 훈련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 생명력이 있는 말씀을 들어도 인식의 차단으로 인하여 좋은 면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좋은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고도 사망의 반응이 나옵니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아마 한나가 말씀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할 때 엘리제사장은 성령으로 충만한 한나를 보고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한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만큼 엘리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두운 지도자였습니다. 엘리의 영성은 바닥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엘리의 영성이 어두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한나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 엘리제사장의 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아마도 한나는 엘리가 영성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종이라는 직분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하고 아멘으로 받은 것 같습니다. 한나는 엘리제사장의 말을 들은 후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습니다. 한나가 수색이 없었다는 말은 엘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한나의 이런 믿음의 반응의 결과로 사무엘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죄를 없이 하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하니 베드로가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라고 회개를 말합니다. 이 말은 죄를 없애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받거나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인간의 거룩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신 이유가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죄 사함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슬퍼합니다. 슬퍼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무리 슬프게 울어도 살인죄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것과 죄사함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자가 살인을 범한 순간부터 경찰에 잡히는 순간까지 슬프게 웁니다. 조사를 받으면서도 웁니다. 살인죄가 밝혀져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재판을 받을 때까지 웁니다. 재판을 받으면서도 슬프게 웁니다. 그래도 살인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슬퍼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에 맡깁니다. 죄는 세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을 다른 표현으로는 영벌입니다. 영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한 벌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생할 수 없습니다. 969세를 산 무드셀라도 영원한 차원에서 보면 찰라를 산 것입니다. 세상 죄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소시효가 지나면 검사의 공소권이 소멸되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세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망각하려고 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등에 업고 밭에서 일을 합니다. 일에 집중하다보니 아기를 등에 업은 것을 잊었습니다. 그러면 아기가 등에 없는 것입니까? 엄마는 망각했어도 아기는 등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잊어도 죄는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 보상하려고 합니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할머니 짐도 들어드리고, 넘어진 아이도 일으켜 주고, 병든 자를 간호해 주고, 봉사기관에서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살인죄가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살인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노력으로 죄가 없어지거나 자연소멸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고난 받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엡 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는 마치 컴퓨터에서 삭제키를 치면 내용이 삭제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회개하면 우리의 죄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 길만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죄를 없애기 위해서 회개를 권면합니다. 회개는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면 회개가 안 됩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병원에 가든지 약을 먹든지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단계는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옛날 중세 때에는 죄수들을 가두어둘 때가 없어서 배에 실어서 지중해 한복판에 가서 그곳에 세워두면 그곳이 감옥 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태리 총독이 죄수선을 순시했습니다. 모든 죄수가 총독에게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더랍니다. 총독이 물었습니다. “너는 왜 여기 있느냐?”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죄인입니다.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도적질을 했습니다. 이런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을 듣던 그 총독이 그를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괘씸한 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 배에는 죄인이 아무도 없는데 너 같은 죄인이 여기 있다니 이놈을 당장 배에 실어서 이곳에서 내보내라” 총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던 그 사람을 사면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3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출발해서 잠실로 가야 하는데 성남 쪽으로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갔는데 자기가 가는 길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돌아서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도 알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고백을 했으면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도 알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이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고백도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바람을 피운다면 자기 자신과 아내를 기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돌아서는데 까지 가야 합니다. 돌아서는 데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오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원칙을 지키십니다. 구원에 관한 것만 빼고는 모든 일을 신인협력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혼자서 하시지도 않으시고 사람에게만 맡겨놓으시지도 않으십니다. 항상 사람과 협력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골 1:29에서 말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자기 자신도 힘써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울이 협력했던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 생각해보세요. 공부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좋은 성적 나오게 해주시나요? 아니죠.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는 학생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시는 것이죠. 진정한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았다면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 “하나님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만하고 자기는 계속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피 흘리기까지라도 싸우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선물을 받거나 성령님으로 충만하려면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4. 신앙을 고백하라. 38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라고 말합니다. 세례란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세례를 믿음의 고백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나 지금의 이슬람권 같은 데서는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적인 고백이 되기 때문에 드러나면 상당한 불이익을 당합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세례는 가짜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베드로는 이들이 세례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대의 우리는 말로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고백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믿음의 고백이 왜 중요한지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구원이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롬 10: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영적인 구원만이 아니다. 질병으로부터 구원, 가난으로부터 구원, 미련함으로부터 구원도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말대로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민 14:28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역사해주시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고백을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신 30:14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믿음을 고백할 때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딤전 4:6입니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믿음의 말씀 즉 입으로 고백되는 신앙으로 영적인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계12:11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이 바로 믿음의 말씀,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을 하면 사단이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말로 성령을 불러 들일수도 있고, 말로 사단을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부르는 말이 있고 사단을 부르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꽃향기는 벌을 부르고 똥냄새는 파리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로운 말, 사랑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 등은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반대로 더러운 말, 악한 말, 불신앙적인 말은 사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령으로 충만했던 비밀 중에 하나는 그의 말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도 신앙고백을 잘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시 3:8에 보면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때가 언제였냐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입니다. 다윗은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을 최고로 좋은 선물로 아시고 성령님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면 온갖 좋은 것이 그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로 좋은 선물인 성령님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죄를 없이 할 때, 신앙을 고백을 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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