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마경훈목사

[스크랩]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교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교제).
본문 : 에베소서 2장 19절 마경훈 목사

본문 : 에베소서 2장 19절(개역개정)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오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설교 보기] [홈페이지로 바로가기]
우리는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캠페인]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 다섯 가지를 공부합니다. 첫 번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목적은 예배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목적을 살펴봅니다. 인생의 두 번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들은 교제를 통해서 가족 됨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남으로 육신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요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조건이 가문에 합당하기 때문에 가족이 된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웠거나 가진 것이 많아서 가족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부모님의 몸에서 출생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그 순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니까?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으십니까?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받았고 봉사를 하고 착하게 살아도 아직 하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남자가 자녀를 낳았으면 그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기만 하면 안 됩니다.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책임져야 합니다. 요즘은 무책임한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영혼의 친 아버지이십니다. 세상 부모는 나를 버리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시 27:10에 보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성경 속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는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드리는 사랑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데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드리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신분을 높여 신발을 신겨줍니다.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이양하는 뜻으로 가락지를 주었습니다. 다 망해 먹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줍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잘 된다면 목숨까지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녀의 신분을 주셨습니다. 자녀의 권세를 우리들에게 주셔서 권세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살진 송아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이 ! 잘된다면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보호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은 신상명세서의 보호자란에 제 이름을 쓸 것입니다. 왜요 제가 그 아이들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어떤 부분이든지 보호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의 보호자이십니다.
자녀에게는 청구권이 있습니다. 자녀는 시도 때도 없이 요청하는 게 많습니다. 부모는 거절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 줍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는 대로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거지가 부자에게 구걸하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당당하게 요구하듯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맡겨놓은 것도 없으면서 맡겨놓은 사람보다 더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안 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가도 애교 몇 번만 부리면 다 넘어갑니다. 히 4:16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때를 따라 돕는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요일 1:3, 4을 보면 사도 요한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사람이 영적인 침체를 거치면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기쁨이 사라집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삶이 곤고해집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기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면 잃어버린 기쁨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행복해 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살갑게 굴면 부모는 그 자녀를 예뻐합니다. 무뚝뚝하게 굴 때보다 부모를 찾고 같이 있고 싶어 하고 살갑게 굴면 부모에게는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사회에 나가서 큰일을 못해도 보모를 사랑하고 부모와 함께 있으며 귀여움을 떨면 예쁜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어 하면 하나님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찾으면 우리가 큰일을 못해도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깨는 것은 인간의 죄이며 죄를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아담과 하와를 직접 대면하며 교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셨지만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진 것입니다. 사 59:1,2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마 5:8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요일 1:7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요일 1:9)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교회는 어머니 품과 같습니다.
장로교를 창설한 칼빈 선생의 교회론에 보면 교회는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누구나 사랑해 주고 싶고 누구나 잘되기를 바라고 누구의 실수도 용서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나 나를 내어주는 곳이며 영혼의 양식을 몸에 체온을 담아 젖을 먹여주며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어머니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들이 독일에 들어가서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많이 세웠습니다. 미군들은 아이들에게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 볼 때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최고의 음식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잘해주는 왜 죽는 것일까 연구를 했습니다. 결론은 사랑의 결핍증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최고의 좋은 시설에서도 죽어간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좀 무식해도 괜찮습니다. 교육학 전공해서 자기 자녀 기르는 엄마가 몇 됩니까? 진한 사랑만 주면 됩니다.
성도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교회 안에 안착해야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성경공부나 교회를 떠난 영적훈련은 성도들을 건강한 신자가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제 아들 모세와 하은이가 형제인 이유는 같은 엄마 같은 아빠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는 사회적 신분의 고하를 초월한 관계입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나라들에서 생겨났습니다. 로마라는 사회는 엄격한 계급제 사회였습니다. 정복한 국가들의 노예 노동에 근거해서 로마인들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모든 면에서 엄격한 차별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한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한 가족으로 지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낮으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형제요 자매입니다. 자녀가 많은 집 자녀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인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한 부모의 자녀이며 형제자매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가족관계는 깰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육신의 가족끼리 사이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관계가 무효화 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팔수는 없습니다. 가족끼리 관계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관계 자체를 없앨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관계는 육신의 혈육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관계입니다.
육신의 가족 관계는 길어야 100년입니다. 천국에 가면 모두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제가 어느 날 설교 중에, 천국가면 제 아들하고 저도 형제지간이지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사두개인과 부활논쟁을 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날 예배가 끝나고 그 당시 6살 정도 된 류준호라는 어린이가 엄마를 보고는 “인순 자매”하고 웃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웃기는 일이지만 천국에 가면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초월해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관계는 능력의 유뮤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집 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한명씩 있습니다.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도 가족이기에 그를 감당해야 합니다. 영적인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혹은 셀 안에 항상 부정적이고 문제만 일으키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가족이기에 그런 사람도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지만 그 부족함 때문에 자신이 가족과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족임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 내 모습을 보면 너무나 부끄러운 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영적인 가족의 일원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유고슬라비아 목사의 집에서 그 목사의 부인과 세 명의 아들과 함께 밤늦도록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잘 생기고 건강한 청년이었고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주 전도가 유망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무 살 먹은 그의 셋째 아들은 방 한구석에서 그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 부부와 정상적인 두 아들만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가족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질문했을 때 그 목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이를 준비시킬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진은 중앙에 정박아인 아들이 있는 채 찍혔습니다. 그는 그 아버지로부터 그 가족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 자녀도 그 사진에서 빠지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에 속하며 누구도 그 사진에서 빠져 있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추하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가족사진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편기자의 입을 통해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지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녀들이 서로 원수처럼 지낸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슬픔이며 아픔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본능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마치 가정에서 형제들이 자연스럽게 교제를 하듯이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진리 안에서 교제해야 합니다. 교제를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는 18회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7회입니다. 연보 즉 헌금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이 3회입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교제로 사용된 것이 8회입니다. 그만큼 형제자매간의 영적인 사귐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과의 교제는 주님과 주님을 경험한 간증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요일 1: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경험을 나누는 이유는 서로의 사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중심이 되어 서로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피해야 할 대화의 내용이 있습니다. 정치 얘기는 피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자랑도 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피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불평불만도 피해야 합니다. 이런 대화들은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오히려 영적으로 퇴보하게 만듭니다.
릭 웨렌이 쓴「목적이 이끄는 삶」에 퍽 재미있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험담과 비난과 불평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훔친 물건을 받는 장물아비와 같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믿음의 가족들과의 교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토레이 신부는 한국 기독교가 크게 잘못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기독교 할 때 가르칠 교(敎)자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가르침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사귈 교(交) 자를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만남이요 사귐이요 교제요 관계임을 회복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어느 성탄절에 우체국에 할머니 한분이 긴 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직원 한분이 물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네, 우표, 두장 살거에요” 그래서 “할머니, 우표는 저기 스탬프 기계에 돈 넣으시면 나오는데요”했더니 할머니가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알아요. 그런데요. 저 기계는 저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처럼 저에게 잘 지내셨느냐고, 요새 허리 아프신 것 어떠시냐고. 손자들 잘 있느냐고 묻지를 않아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 때 건강한 것입니다.
주방용품 판매에서 뛰어난 실적을 낸 영업사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영업사원은 입사 며칠 만에 입사 동기나 선배들을 제치고 판매 왕에 등극했습니다.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는 철저히 공존과 네트워크를 활용했습니다. 주방용품 판매사원이 될 때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주방용품을 살까? 그걸 알면 팔기가 쉬울 텐데....’ 답은 쉽게 찾았습니다. ‘식당을 개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할 거야. 그 사람들에게 좋은 주방용품을 소개하면 내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잖아. 그렇다면 식당을 개업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빨리 알아야겠군.’ 식당개업 정보를 가장 빨리 입수할 수 있는 곳은 상가의 부동산 중개소였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약간의 정보 제공료를 주고 부탁을 하자 식당을 개업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소개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연결된 사람들은 실구매자들이기 때문에 주방용품을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또 보통 영업사원들은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인데 그는 오히려 고객으로부터 차 대접을 받으며 물건을 팔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21세기의 시대를 가리켜서 NQ(네트워크 시대의 인맥을 말하는 말로 공존지수를 뜻함)가 높은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김무곤 교수는 그의 책 “NQ로 살아라”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IQ(Intelligence Quotient)도 EQ(Emotion Quotient)도 아니다. 이젠 NQ(Network Quotient)의 시대가 왔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NQ의 시대,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더욱 건강한 신앙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교제하다보면 상처를 받기도합니다. 상처 받는 다고 교회를 떠나거나 성도들과 교제를 피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은 아닙니다. 결혼하면 서로에게 실망을 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갈등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해라. 그러나 한 집에 살지는 말아라.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자고 아이 낳고 살면 큰일 난다” 여러분 이것이 옳은 인생살이가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간의 교제가 잘되어야 교회도 부흥합니다.
기러기들은 해마다 수천 km, 하루에만도 수백 km를 이동합니다. 기러기들의 대장정엔 반드시 V자 대형이 등장합니다. 과학자들이 기러기들의 비행 행태를 연구한 결과, V자 형태의 편대비행이 가장 힘을 적게 소모하면서 먼 거리를, 오랫동안 이동할 수 있는 방법임을 밝혀냈습니다. 앞의 새가 날개를 저으면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를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뒤에 나는 기러기는 앞 기러기의 도움을 받아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약 71%를 더 멀리 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또 V자형을 그리며 날아갈 때 뒤쪽의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이 속도를 유지하도록 힘을 북돋우기 위해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내줍니다. 응원의 이 소리는 마치 카누 경기에 호각을 불어 노를 젓는 선수들이 속도를 유지시켜 주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V자형의 팀을 이루고 날다가 앞서 날던 기러기가 지치면 뒤에 있는 기러기와 곧 자리를 바꿉니다. 기러기들은 혼자 날아서는 불가능한 일을 이렇게 함께 날며 공동의 힘을 극대화시켜 자신들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과정에서 힘이 빠져 뒤쳐진 기러기에! 게 ‘왜 이리 힘이 없느냐’며 다른 기러기들이 나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이리 피해를 끼치느냐’며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에 가서는 모두 힘이 빠져 목적지까지 갈 수 없게 됩니다. 만약 기러기들이 연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날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는 기러기들도 많을 것입니다. 혹 목적지까지 가더라도 함께 갈 때보다 많은 힘을 소진하여 중간에 죽는 기러기들도 많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격려해야 하고, 지친 형제자매들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용기를 북돋아줘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소그룹 셀가족 공동체에 속하도록 하십시오.
셀 안에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이고 믿음 안에서 교제를 하십시오. 손님처럼 교회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엡 2:19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외인이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손님처럼 신앙생활하지 말고 또 구경꾼처럼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기로 결단하는 그날 단지 예수만 마음으로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비전교회 교인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경험하고 가족의 삶을 사는 소그룹, 셀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축구선수입니다. 그러나 소속된 팀이 없습니다.”, “나는 군인입니다. 그러나 소속된 부대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은 당연히 가정에 속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그는 교회에 속하고 소그룹 셀가족모임에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의 지체는 모든 지체와 연결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바로 옆에 있는 지체하고만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옆 지체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을 때 모든 지체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교회에 속하지만 모든 지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체들은 셀가족들입니다. 셀가족들과 잘 연결된 신자가 건강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 사람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교인들이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관계의 부족에서 느끼는 현상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 생활을 원하면 교회 안으로 그리고 셀 안으로 들어가셔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희경 님의 [관계]라는 글이 있습니다. “지금 눈앞의 저 낯모르는 사람이 피를 콸콸 쏟는다 해도 몇 분 후면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계기로 그를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가 고개만 조금 숙여도 내 가슴은 미어질 것이며, 그의 시선이 가는 방향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할 것이다. 특별한 사람이란 없다. 관계에 의해서 특별해질 뿐이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