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교회봉사
에베소서 4:7-12
이동원 목사 2006-06-08 오후 1:23:38
[성경 본문]
제목 : 그리스도인의 교회봉사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설교 전문]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출석하다가 교회 출석을 중단하고 있는 교우에게 쓴 권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답신은 사실상 또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예배에 출석해야하고 교회 봉사를 해야 할까요? 저는 요즈음 저 혼자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유지를 통해 믿음의 삶이 가능한가를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교회 없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할까요?” 목사님이 다시 답신을 썼습니다. 이렇게 쓰셨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군대에서 훈련이나 소집에 불응하는 군인이 정상일까요? 세금을 내지 않고 투표하지 않는 시민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베이스캠프 없이 등정하는 등산가가 정상일까요? 병원이 없이 치료를 구하는 환자가 정상일까요? 학교나 스승이 없는 학생이 정상일까요? 벌집이 없이 날아다니는 벌이 정상일까요? 팀을 생각하지 않는 축구선수가 정상일까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은 정상이신지요?
본래 과학자 아이슈타인은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국 독일이 나치의 학정아래 신음하고 있었을 때 희망을 접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조국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작은 교회 공동체의 진지함을 지켜본 어느 날 그는 회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교회를 오해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자녀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를 섬기고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가정에서의 봉사의 경험을 통해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집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형제자매와 교제하고 교회 봉사의 경험을 통해서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봉사의 상처의 경험이 있었던 분들은 교회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봉사를 기피하는 영적 알레르기성 질환의 증세를 갖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상처를 넘어선 유쾌한 봉사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1. 각자의 영적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본문 에베소서는 바울 사도가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는 서신 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장까지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세상을 향한 비밀로서의 공동체를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4-6장까지는 교회에 속한 지체된 성도들의 교회 생활을 실천적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4장의 첫 머리 부분에서 성도의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 은사를 따라 섬기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그분은 그는 이제 승리자로서 고대의 승리자들처럼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가 정하신 분량을 따라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선물 곧 은사들을 하사하셨다는 것입니다. 11절은 이런 다양한 교회내의 리더십의 은사적 직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대표적인 것들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 목사는 1972년에 출간한 기념비적 책인 ‘몸의 생활’(Body Life)라는 책에서 이 네 가지 은사적 직분들을 우리 몸의 네 가지 계통에 비유하였습니다.
사도가 우리 몸의 골격 계통(몸을 만드는 뼈대, 사도는 교회 개척)이라면, 선지자는 몸의 신경 계통(머리에서 명을 받아 온 몸에 전달, 선지자는 교회의 질서를 세움)이고, 전도자는 소화 계통(밖에서 음식을 취하여 몸의 한 부분이 되게 함, 전도자는 불신자를 구원하여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함) 그리고 목사와 교사는 순환 계통(피가 온몸으로 영양을 전달, 목사와 교사는 말씀을 가르쳐 성도를 양육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계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역할을 감당할 따름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한 분별 방법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시면 됩니다. 두 가지가 다 만족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음악은 좋아하지만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제가 찬양대에 들어가든지 지휘를 하겠다고 덤비면 큰 일 아닙니까?
우리는 은사가 없는 사람들을 자기 사역의 파트너로 끌어들여도 안 됩니다. 제가 처음 나가던 교회에서 부목사님의 강요로 제가 성가대에 꼭 한번 선일이 있습니다. 제 목소리가 베이스로 천부의 목소리라는 등등의 말로 저를 유혹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테너와 베이스의 경계선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른 쪽 사람을 따를지--왼 쪽 사람을 따를지--저는 그 환난의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스스로를 시험해 보시고 내가 교회내의 어떤 사역에 참여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지를 확인해보시고 그 일이 내게 진정한 영적 기쁨을 주거든 그 사역에 평생 헌신하시면 됩니다.
2. 자신을 넘어 서로를 온전케 해야 합니다.
은사 발견은 봉사 사역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자기 은사에 합당한 사역을 발견하셨다면 그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런데 그 사역함에 아주 중요한 경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역을 결코 일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사역은 철저하게 관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 사역은 결국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가장 큰 함정은 자기만족의 수단화입니다. 물론 자기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거기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은사(카리스마,karisma)라는 말의 어근은 ‘카라’(kara)로서 '기쁨' 혹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자기 은사 혹은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면 누구나 신바람이 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봉사는 이런 자기만족에 목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섬김의 결과로서 이웃이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의 표현을 빌리면 이웃을 온전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동일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동역하면서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나의 동역자가 자신의 은사적 가능성을 더 개발하게 되어 어느 날 그가 나 못지않게 혹은 나보다 그 일을 더 잘하게 되었다면 이것이야 말로 사역의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항상 동역자를 의식하고 그가 모자라는 측면을 어떻게 채워 줄 것인지 혹은 아직 개발되지 못한 그의 은사가 어떻게 꽃을 피우도록 도울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나의 동역자가 은사적으로는 나를 이미 추월하는 진보를 보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 태도가 이웃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고 있다면 이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도록 도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기에 누구도 도움이 불필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타인의 도움이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직분을 봉사의 영성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단어는 ‘온전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키 워드입니다.(개역 개정판은 전에 ‘온전하게 하며’를 ‘온전하게 하여’로 바꿈--온전케 함이 여러 가지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나타냄) 그러나 온전해 지는 도움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온전케 됨으로 해야 할일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먼저 봉사의 장에 뛰어들면 그는 자신도 힘들고 이웃에게도 짐 거리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여기서 ‘온전해진다’는 말은 본래 ‘뼈를 맞춘다’는 뜻을 갖습니다. 탈골된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가 어떻게 몸을 제대로 움직여 봉사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뼈를 맞추고 치유되는 일이 선결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회복의 징후가 보이면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할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는 언제나 두 가지 바람직하지 봉사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종류는 기본적인 치유도 되지 않고 기본적인 영적 성숙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다른 교인들에게 상처만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직은 내게 치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온갖 치유집회만을 따라 다니면 봉사의 기회는 접어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짧은 인생에 언제 섬김의 열매를 갖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어느 정도 내게 믿음의 확신과 치유의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된다면 겸허히 섬김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리고 봉사의 일을 하십시오. 여기서 ‘봉사의 일’은 철저하게 ‘섬김의 일’(the work of service)입니다. 여기 ‘봉사’(service,diakonias)라는 단어에서 집사(deacon)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디아(dia)와 코니아(konia)두 단어의 결합인데 ‘코니아’의 뜻은 ‘먼지’란 말로 합하여 ‘먼지를 턴다’는 뜻입니다. 집사는 먼지를 터는 사람, 청소하는 종입니다. 계급이 아닙니다. 본래 고대 교회에서는 교회 모든 직분을 통칭하여 집사라고 불렀습니다. 집사는 가장 대표적인 직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철저하게 계급이 아닌 봉사의 직분일 따름입니다. 직분 수여는 좀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봉사의 마당을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직분을 받은 분들은 이제 좀더 허리를 굽히고 손에 수건을 들고 이웃들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12주년을 축하하며 임직식이 있는데 이 임직되는 분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의식을 갖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봉사의 가장 힘든 일들을 경험하시는 일이었고, 마지막으로 지난 월요일 화요일 새벽에 세족식을 가지심으로 우리가 앞으로도 해야 할일이 바로 이런 섬김의 일인 것을 다짐하셨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 성숙하려면 이 봉사의 영성이 성경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최고의 과오가 있었다면 직분을 계급화한 것입니다. ‘종’이라는 단어까지도 계급화하여 우리는 종을 ‘종님’이라고 부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종은 맡겨진 일만 성실하고 겸손하게 감당하면 됩니다.
4. 궁극적으로 몸 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본문 12절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내 직분과 봉사의 궁극적인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입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빌딩’(building)한다는 말입니다. 세우는 것(빌딩)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허는 것 곧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때 교회는 진실로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봉사를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의 섬김으로 우리 교회가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아름답게 잘 세워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섬기는 분들의 태도나 방식이 그릇되었을 때 교회가 한 사람의 부덕한 일꾼 때문에 온 교회가 흔들리고 몸살을 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발 흔드는 자나 허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본래 흔드는 일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눅22:31에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으나” 세우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움’은 단순한 조직의 세움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교회원을 성숙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교회가 일한다는 뜻은 교회가 교인들을 통하여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인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장성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질 때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그들이 살고 있는 모든 삶의 장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본문 13절이하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한 미 상원 원목이었던 리챠드 하버슨 (Richard Halverson)목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한때 제가 미국에서 사역하던 지역의 목회지였던 미국 워싱톤의 매릴랜드의 제4 장로교회의 목사로 목회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한번은 워싱톤 밖으로 여행을 갔다가 비행기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가 착륙준비를 하면서 워싱톤 상공을 비행할 무렵 마침 비행기 창가에 앉아 있었기에 창 밖으로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당 건물이 보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원을 그리며 방향을 틀면서 자기 교회가 보일 듯 보일 듯 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백악관이 보이고, 어린이 병원이 보이고, 국방성이 보이고, 조지타운 대학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닷없이 이런 건물들에서 일하는 자기 교회 형제 자매 집사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그래 맞아 나의 교회는 저 리버 로드 선상에 있는 교회당만이 아니야. 이 모든 곳 나의 백성들이 흩어져 일하는 모든 곳에 나의 교회가 있는거야”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한분 한분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고 말씀으로 훈련받는 동안 은혜 받고 새 힘 얻어 그리고 다시 흩어져 우리의 마을,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장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의 빛을 발하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봉사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 이웃들을 격려하고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에서만 큰 소리 치는 자가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큰 소리 치며 승리하는 자들이 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존재의 이유요, 셀 교회 비전이요, 제직을 세우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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