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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한규목사

[스크랩] 진실한 사람이 되십시오(마 15:1-11,070513)

진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마태복음 15장 1-11절

< 부모님의 뜻을 존중하십시오 >

어느 날, 미국의 16살이 된 한 아들이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이제 제가 16살이 되었는데 운전면허를 따면 아빠 차를 몰아도 돼요?” 아빠가 대답했습니다. “차를 몰려면 책임감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 네가 3가지를 해서 성숙함을 보여주면 차를 몰도록 해주겠다. 첫째, 성적을 지금보다 더 올려야 된다. 둘째, 매일 성경을 읽어야 된다. 셋째, 머리를 짧게 깎아야 된다. 너무 흉해 보인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은 세 번째 요구는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아빠의 요구대로 자기가 책임적인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학교 성적표가 나오자 아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보세요. 모두 A와 B를 맞았어요. 이제 차를 몰 수 있지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잘했다. 이제 3분의 1은 이뤘다. 그런데 매일 성경을 읽고 있니?”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매일 읽고 있어요.”

아빠가 다시 말했습니다. “훌륭하구나! 이제 3분의 2를 이뤘다. 그러면 이제 언제쯤 머리를 깎을래?” 그 말을 듣고 아들이 진지한 표정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빠! 저는 꼭 머리를 깎는 것이 성숙함의 표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님도 머리가 길었잖아요? 저도 예수님처럼 지낼래요.” 그 말을 듣고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머리가 길었지만 대신에 걸어서 다니셨단다. 너도 예수님처럼 그냥 걸어 다녀라.”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기 요구를 이루려고 해괴한 논리를 내세우고,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엉뚱한 변명과 핑계를 내세우는 자녀들을 봅니다. 때로는 그 논리와 변명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뜻을 존중하고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이루려는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보면 성경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어떤 상황에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책임하고 잘못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자세가 심해지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되고, 아집에 빠지며, 바리새인처럼 비판적인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뜻과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 바리새인이 되지 않는 방법 >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대단히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위선은 교만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교만과 위선을 대단히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비판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은 엄청난 속도로 유대 땅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도 이르자 예루살렘에서는 몇 명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예수님께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흠을 잡을 것이 없으니까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범합니까?”

이 질문은 사실관계를 알려는 진지한 질문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형식을 빌은 비판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판을 위해 비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자기의 뜻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무엇이든지 비판거리만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비판을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난 30년 동안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저는 단 한 편의 설교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설교가 왜 필요합니까? 차라리 그 설교 시간을 줄이고 다른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어떤가요?”

그 편지를 받고 목사님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성도님! 저는 결혼 30년째입니다. 그 동안 아내는 저에게 32580번의 식사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단 한번도 식사 메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이틀 전 식사 메뉴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매 식사를 통해 저는 살아갈 에너지와 영양분을 얻었습니다. 식사 메뉴를 잘 기억하는 것보다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답장에 목사님 설교를 비판하던 분이 더 이상 반박을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어떤 일에 대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한 배를 탄 죄인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비판받는 사람보다 더 잘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줄이고, 참여와 헌신은 늘려야 합니다.

얼마 전, 은혜 개교기념일에 아이들과 함께 에버랜드에 갔습니다. 월요일이라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 단체로 와서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그냥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입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판단이 나왔습니다. “저 아이는 왜 저렇게 화장을 했어! 왜 치마가 저렇게 짧아! 왜 스타일이 저래!”

한참 비판을 하다가 곧 깜짝 놀라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세요. 저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저는 비판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이기구를 타지 않으니까 저절로 구경하게 되고, 그렇게 구경만 하니까 비판도 저절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놀 때는 놀이에 참여하고 일할 때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벤치에 앉아 구경만 하면 저절로 비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벤치 인생이나 관중석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그처럼 비판하는 문제에서도 주의가 필요하지만 비판받는 문제에서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물론 정당한 비판은 기쁘게 수용하고 회개해야 하지만 바리새인의 비판에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비판한다고 “너는 잘났냐? 네가 뭔데 그러냐? 네가 비판 자격이 있느냐?”고 반박하다보면 같이 추해질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중에 라이맨 비처(Lyman Beecher)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누가 비판하면 전혀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누군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그 주장이 맞는 줄 알 거예요.”

그때 비처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성도님! 제가 그러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청년 때, 어느 날 밤에 들판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작은 짐승이 나타났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무의식중에 손에 있던 책을 몇 권 던졌어요. 그러자 곧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데 알고 보니 스컹크였어요. 그때 냄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그 후로 저는 그런 짐승은 그냥 내버려두겠다고 결심했어요. 스컹크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에요.”

비판에 일일이 반박하면 더 악취가 생기고 나중에는 자신의 꼴이 더 추해집니다. 그때는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것이 낫습니다. 잠언 15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또한 잠언 29장 1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큰 인물이 되길 원하면 바리새인의 비판에 쉽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생전에 반역자, 위선자, 사기꾼이란 악평을 받았습니다.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도 똑똑한 바보, 탁상공론자라는 통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링컨도 비열한 놈, 흉악한 놈, 거짓말쟁이, 그리고 원숭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결국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행 24:5)라는 말을 들었고, 심지어는 예수님도 ‘귀신들린 사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우리는 더욱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비판에 마음이 흔들리고 상처받았다고 신음하면 앞으로 아무 일도 못합니다. 정당한 비판은 기쁘게 수용하고, 바리새인의 비판에는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2. 말씀에 최대한 순종하십시오

바리새인의 비판적인 질문을 받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 사람의 전통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자기가 신앙생활을 했던 곳에서 형성된 전통이 있습니다. 그 전통만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전통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으로 가게 하는 통로’가 되지 않고 ‘목적 자체’가 되면 오히려 해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을 진리처럼 받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전통보다 계명이 더 중요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본문 4절에서 십계명 중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이 사람의 전통에 의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관해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관련된 1-4계명과, 인간과 관련된 5-10계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인간과 관련된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 말은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부모 공경’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훼방만 해도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계명의 엄중한 의미를 약화시키려고 유대인들이 어떤 전통을 세웠습니까? 본문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부모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것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을 만든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들과 교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헌금과 헌물을 확보하려고 사람의 전통을 세워서 부모 공경이란 계명의 원래 의미를 약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다.”고 그들의 잘못과 위선을 무섭게 질책하신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말씀’과 ‘효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처럼 주님은 부모 공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도 정성껏 헌금을 해야 하지만 부모님께도 정성껏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님 섬기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면 반드시 축복받지만 부모님을 냉대하면 자신도 반드시 냉대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림(Grimm) 형제의 우화입니다. 어느 가정에 한 노인이 아들 부부와 4살짜리 손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눈이 침침한 노인이 식사 중에 노인은 손을 떨다가 음식을 떨어뜨려 식탁보가 지저분해졌습니다. 아들 부부는 화를 내며 그 다음부터 노인을 한쪽 구석에서 따로 식사하게 했습니다. 그 구석에서 노인은 사발에 담긴 음식을 따로 먹으면서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 항상 식탁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노인이 다시 손을 떨다가 사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사발이 깨지자 며느리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돼지세요? 이제는 돼지 여물통으로 식사하세요.” 그 다음부터 돼지 여물통에 식사를 담아주었습니다.

얼마 후, 젊은 부부는 4살짜리 아들이 나무로 어떤 조각을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빠가 뭐하느냐고 묻자 어린 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말했습니다. “아빠! 제가 커서 아빠 엄마에게 식사를 담아드릴 돼지 여물통을 만들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젊은 부부는 무엇인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음날, 그 노인은 다시 가족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아무도 노인에게 소리 지르며 냉대하지 않았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받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어떤 핑계와 변명도 스스로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씀 앞에서 핑계와 변명이 없어야 합니다.

3. 진실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본문 7-9절 말씀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입으로는 가장 영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말씀을 멀리하는 것을 보고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입은 있지만 손은 없고, 말은 있지만 행동은 없는 외식을 싫어하십니다. 어떤 여성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잘하는데 6번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은 잘했지만 마음으로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키스를 하고 곧 배반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주님은 ‘전통을 잘 지키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전통으로 ‘감동’을 만들기보다는 ‘갈등’을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삶의 기준이 자기 자신입니다. 옳은 것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틀리다고 하고, 틀린 것도 자기 기준에 맞으면 옳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자기중심주의입니다. 그 자기중심주의를 말씀으로 잘 깨뜨리고 열린 마음과 진실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행복의 씨앗입니다.

어떤 목사님 고백입니다. 그분이 갓 결혼했을 때 아내가 사랑스러워서 방도 닦아주고, 설거지도 함께 하고, 연탄불도 갈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아들집에 방문했다가 설거지를 하는 아들을 보고 혼을 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아느냐? 3대 정승과 6대 대제학을 지낸 가문이다. 사내가 부엌에서 아녀자가 하는 설거지나 하면 어떻게 훌륭한 일을 하겠느냐?”

그때부터 그분은 설거지를 끊고 성경 말씀보다는 가문의 전통대로 살았습니다. 나중에 신학교에 가서 아내 사랑이 가문의 전통보다 더 중요한 성경적인 교훈임을 깨닫고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좋은 전통이라도 전통에만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과거에 내가 다니던 교회는 이랬는데.”라고 과거의 전통에 집착하면 전통을 진리로 착각하게 되고,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물론 전통도 필요합니다. 너무 열리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반대로 너무 닫혀도 안 됩니다. 가나안을 얻으려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질서도 지키고, 나이와 기득권도 존중해주고, 직분과 자리도 존중해주고, 교회방침과 교회전통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틀을 존중하면서도 항상 열린 마음과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복음성가 가수들이 복음성가를 유행가처럼 부르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따라가지는 못해도 이해는 합니다. 그런 형태의 찬양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젊은 세대와 담이 생기게 됩니다. 구세대는 신세대를 이해하고, 신세대는 구세대를 이해하는 관용의 정신이 성령 충만한 삶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실한 삶입니다.

< 위선의 옷을 벗으십시오 >

이제는 위선의 옷을 벗고 더욱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2절 말씀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교하고 헌금과 구제를 할 때, 남의 눈치를 보면서 헌금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식이 외식을 낳습니다. 외식하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많은 외식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전 세계에서 예배 시간에 헌금자의 이름을 읽는 종교는 한국의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파푸아 뉴기니의 식인종으로 있다가 변화된 교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헌금자의 이름을 공개할 때 더 많은 헌금이 나오게 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담은 헌금입니다. 우리는 항상 외형보다는 내용을 추구하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은 저희 선교회를 위해 물질적인 헌신을 하면서도 “목사님! 제가 오히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작은 감사 표현일 뿐입니다.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오히려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처럼 소리 없이 헌신하는 분들이 있기에 저희가 문서선교 사역과 선교사 후원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얼마 전, 제주도에 살면서 가끔 우리교회에 방문하시는 권사님이 여러 선물과 함께 ‘참 이슬’이라는 소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여러 번 선물을 받았지만 소주 선물을 받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사모가 무척 고민했습니다.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 저에게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여보! 권사님이 참 이슬 소주를 선물로 주셨는데 왜 그 선물을 주셨을까요?”

저도 그 참 이슬 소주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왜 권사님이 소주를 주셨을까? 목회를 잘하려면 술 취한 것처럼 성령에 취해서 목회하라는 뜻으로 소주를 주셨나? 아니면 목회자도 소주를 먹어도 된다는 뜻으로 주셨나? 제주도에서는 목회자에게 소주를 선물하나?”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소주 안에 다른 것이 들었나?”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참 이슬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참 이슬 병’ 안에 있는 ‘참기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특히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항상 진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후부터 옷을 입게 되었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며 거짓과 위선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고, 숨길 필요가 없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높여줍니다. 우리는 ‘척 하면서 자기를 높게 보이려는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일본의 성자 하천풍언(賀川豊彦)은 자신이 창녀의 사생아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링컨은 자신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살인죄와 간통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케네디는 대학에 다닐 때 커닝했던 것을 기자들 앞에서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교만과 허영, 그리고 사치와 위선은 다 한 통속입니다. 그런 삶에 빠져 살면 사람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유행과 외형에 따라 자기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은 자연히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힘써 위선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 옷을 벗지 않으면 언젠가 벗겨집니다. 이 땅에서 벗겨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벗겨집니다. 그때 수치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위선과 교만의 병은 치료가 힘든 난치병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든지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 병이 치료된다면 더욱 넘치는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행동하는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고, 특별히 부모를 힘써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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