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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마경훈목사

[스크랩] 방주로 들어가라

방주로 들어가라
본문 - 창 6:8~22 마경훈 목사

본문 - 창6:8~22(개역개정)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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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른을 모시고 사는 일은 부담스럽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실 때도 부담이 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걸어가는 것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저는 평일에 점심식사는 교회에서 합니다. 중보기도모임에 나온 분들이 저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제 앞자리에 잘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서운 사람도 아니고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 성질이 고약한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이 저를 피합니다. 그 이유는 제 앞자리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와 함께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고 싶은 일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에 놀러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눈 한번 딱 감고 거짓말 하면 큰 이익이 되어도 절대 거짓말 못합니다. 화가 나서 입에서 욕이 나와도 욕도 못합니다. 지난번에 운전을 하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얼마나 제 앞에서 얄밉게 운전을 하는지 정말 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욕을 못했습니다. 그냥 “에이, 욕!!”이라고 했더니 제 아내가 조수석에서 그 소리를 듣더니 깔깔거리고 웃더군요. 욕하고 싶어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욕도 못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해도 못하고 미쳤다고 하지 돈은 돈대로 들어가지 아마 가족들도 불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노아라고 방주 만들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했던 것이지요. 누가 철야기도 하고 싶겠습니까? 누가 금식기도 하고 싶겠어요? 누가 먹고 쓸 돈도 없는데 헌금하고 싶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인류가 멸망을 당할 때 홍수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기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힘들고 부담스러웠던 모든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예비 된 방주 안으로 들어가서 홍수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서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방주는 노아의 방주보다는 하나님의 방주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는 구원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방주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곧 이 세상이 멸망 받을 텐데 진정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방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인생을 사는 방법입니다.

6:15에 보면 방주의 크기가 나옵니다. 길이는 300규빗, 너비는 50규빗, 높이는 30규빗입니다. 이 배의 배수량은 38200톤으로 구원 얻을 사람들과 동물들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방주 안에 거하는 것은 안전합니다. 40일간 밤낮으로 비가 내려서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성난 파도가 일어나서 방주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안전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방주의 설계는 30m의 파도에도 견딜 수 있는 독특한 설계라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파도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설계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 했듯이 우리의 구원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거하는 것 역시 안전합니다. 마 16:18에 보니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마귀권세, 세상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방주는 역청으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방주의 안팎에 역청을 바르게 하셨습니다(14절). 역청은 아스팔트를 말합니다. 아스팔트의 주성분은 석유입니다. 안팎으로 역청을 발랐기 때문에 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는 물과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주를 역청으로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방주가 방주로서의 구실을 하려면 물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면 방주는 물속에 잠기게 되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구실을 다하려면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가 세상에 잠기게 되면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은 영적으로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게 하는 역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방주의 안팎에 역청을 발랐다는 말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청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코페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17회 나옵니다. 가장 중요한 번역은 ‘몸 값’, ‘속전’이라는 뜻의 번역입니다. 방주의 안팎에 역청을 발랐듯이 우리의 신앙의 안팎에 주의 보혈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보혈신앙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고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었고, 보혈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지켰던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그림자이고 주님의 십자가는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실체가 나타났으니 그림자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유월절에 심판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며 모든 집에 있는 장자를 죽였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가고 죽어야 할 장자가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위한 희생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공로를 의지하면 사탄으로부터 보호 받게 되고, 심판으로부터 구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의 보혈을 묵상하고, 보혈을 흘리신 주님을 찬양하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죄악을 고백하여 용서 받고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역청을 안팎으로 철저하게 발라야 방주가 보호 받고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 안에 있었던 날이 377일입니다. 홍수 7일 전에 들어가서 홍수가 끝나고 330일이 지나서야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방주가 물과 함께 한 시간만 250일이 넘습니다. 홍수 40일과 홍수 후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기 까지 150일 그리고 땅이 마르기까지 최소 61일입니다. 25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물이 방주 안으로 조금씩 들어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날이 지나면서 방주 안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닥이 젖을 정도이겠지만 며칠이 지나면 물이 방주 안에 가득 차게 되고 결국 방주는 물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역청을 안팎으로 잘 발라야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보혈신앙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욕탕입니다.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탕에 가서 씻듯이 교회는 죄를 범한 사람들이 와서 어린양의 피로 정결함을 받는 곳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자백하시고, 어린양의 피로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의 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살아야 합니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양보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양보하고, 직장에서도 양보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보혈신앙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요르단의 초청을 받아서 암만대학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조목사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절대로 우리 암만대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거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러나 예수님이 동정녀로부터 탄생했다는 것은 말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물론 좋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한 것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코란경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죽은 것을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거짓으로 꾸며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써 죄사함 받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니 그 두 가지 사실은 전하지 마시오.’라고 조목사님을 보고 엄히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보혈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보혈의 능력을 부인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안팎에 보혈신앙이 충만해야 합니다. 역청을 잔뜩 발라놓으니 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것처럼 보혈신앙으로 충만하면 세상도 마귀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환경을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꼭대기에 창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16절에 보니 창은 위에서부터 한 규빗 되는 지점에 내야 합니다. 방주의 높이가 약 15m인데 위에서 약 50cm되는 지점쯤에 창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창을 꼭대기에 내는 이유는 멸망 받을 세상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창은 주변을 보기 위해서 내는 것인데 방주의 창은 하늘을 향하게 해놓고 주변보지 말고 위만 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이나 주변 환경을 보기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성공의 비결이 그것입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바라봤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때와 80세의 때 차이점은 사람을 보느냐 하나님을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모세가 40세에 자기 백성을 구원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났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좌우를 살폈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애굽사람을 떼려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만 의식했던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광야생활을 지도할 때보면 좌우를 살피며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철저하게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든 후에 혼자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 가족들과 혈육 있는 모든 생물들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방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이 구원 받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수고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전도입니다. 고전 1:21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비록 전도가 미련해 보이지만 전하면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무디 목사님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가서 거리에 서서 말씀으로 권유할 대상자를 찾는데,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다짜고짜 다가가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주정꾼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벌컥 내었습니다. 그 사람이 화를 내는 바람에 무디는 전도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개월이 지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예전의 그 술주정꾼이었습니다. 그 술주정꾼이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는 말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때부터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는 무디가 뿌렸으나 술주정꾼 마음에 떨어진 씨앗은 주님께서 자라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안장로교회에 안강자 권사라고 있습니다. 1년에 몇 백 명 몇 천 명씩 교회에 등록을 시키는 분입니다. 이 분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살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의 말이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가족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하라고 했는데 노아가 자기만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방주 문이 닫혔다면 가족들은 홍수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멸망할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주이신 주님을 전하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영원한 사망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영적인 살인자가 되는 것이니 안강자 권사의 말이 맞는 말입니다. 안강자 권사의 전도 방법은 기도하면서 끈질기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전도 실례 몇 가지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한번은 길 가던 젊은 여자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니 무시하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안강자 권사는 슈퍼마켓까지 따라 들어서 계속 말을 붙였습니다. 그 여자는 물건을 사가지고 내빼듯 나가버렸습니다. 안강자 권사는 계속 쫓아가며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다동”이라고만 말하고 도망가버렸습다. 그때부터 안 권사는 그 여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한 달 동안 그 여자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계속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 권사는 그 슈퍼마켓을 찾아가서 그 여자의 외모를 말하면서, 어디 사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슈퍼 주인이 그 여자네 집이 상을 당한 집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안 권사는 즉시로 그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바로 길에서 만남 그 여자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찾아가서 전도를 했더니 그 날 7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역전에서 전도할 때 일입니다. 어느 젊은이에게 “청년,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자 그 청년 “왜 구원 받냐, 십원 받지.” 하면서 시비를 걸다가 끝내는 구둣발로 허벅지를 차서 피멍이 들게 했습니다. 안 권사는 아파서 주저앉으면서도 그 청년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안 권사는 그 청년이 전도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전도지를 버리지 않고 구겨서라도 주머니에 넣었으니 감사합니다.” 안권사는 그 날 집으로 돌아가서 그 날 있었던 일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나 때문에 고난 받았구나.”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에 그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김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바로 전도하던 당신을 때린 사람입니다. 나, 예수 믿겠습니다. 1주일동안 잠 한숨 못 잤습니다. 잠만 자면 지옥이 보여서 고통스러워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 믿고 난 후 가족 전체를 전도하였고, 지금은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도 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 �도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니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고 말합니다.
방주는 운전시설이 없습니다. 방주의 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가장 어른이었지만 노아의 마음대로 방주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방주 안에 8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방주의 방향을 다수결로 정하지 못했습니다. 방주의 조정자는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신앙생활의 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조정자 역시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말을 잘 탔는데 한 번은 고삐를 놓쳐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병사가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한 나폴레옹은 그 병사가 너무 고마워 그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고맙소, 대위.” 그는 즉시 장교 막사로 가서 장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를 본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아니, 병사가 감히 여기에 들어오다니?”, “안 될 이유가 뭐 있소? 나는 대위인데.”, “뭐라고? 네가 대위라고? 어떻게 네가 대위냐?”, “나폴레옹 장군께서 나를 대위라고 불렀소. 그러니 나는 대위요.”, “이 미친놈을 보았나?”, “장군께 알아보시오.” 그래서 나폴레옹을 찾아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나폴레옹이 그 병사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한 말을 믿고 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가 나폴레옹의 말을 듣고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병사로 군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는 그 즉시 “아멘!” 하고 순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그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모범 중에 하나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법보다 주먹이 강한 시대이기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종했습니다. 더 놀라운 순종은 독자 이삭을 드린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살리신 것만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낳은 후손을 주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모범 중에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할례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속을 멸할 때 할례를 행하게 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3일째 되는 날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속을 멸했습니다. 세겜 성에 강하고 힘 있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할례를 받은 후라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 죽게 된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 집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수술칼도 없고 마취제도 없는 그 당시에는 사람의 표피를 바위에 놓고 날카로운 돌로 찍어서 잘랐습니다. 만약 아브라함 집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았다는 정보가 새어나가면 이웃 나라와 이웃 부족들이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집이 전멸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아브라함 집을 아무도 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막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 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모브상은 1827년부터 지금까지 세계 재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 최고의 보석상입니다. 그런데 그 보석상이 세계 최고의 보석상이 된 데는 이런 스토리가 있습니다. 보석에 관심이 많은 루이라는 청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보석상의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성실하고 착실한 그는 곧 보석공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의 한 백만장자가 아들 결혼을 위해서라며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문했습니다. 밤새도록 반지를 만든 그는 그것을 금고에 넣고 잠을 청하는데 강도들이 들어왔습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강도들이 진열장의 보석을 자기들이 가져온 자루에 다 쏟아 넣은 다음 루이에게 칼을 들이대고 금고의 열쇠를 달라고 했습니다. 값진 보석은 금고에 들어 있는데 금고 열쇠를 강도에게 주면 그 보석상은 망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잔소리 말고 빨리 내 놓아!”, “가져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져가세요. 내 것이라면 줄 수 있지만 나는 이 집의 종업원이라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너 이놈!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면 네 손가락을 자르�! 渼�. 1분에 손가락을 하나씩 자를 것이니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내놓아!” 강도들이 루이의 손을 진열장 위에 얹어 놓고 시계를 보았습니다. 1분이 되었습니다. 한 강도가 소리쳤습니다. “빨리 잘라!”, “그래도 열쇠는 내놓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때 두목이 말했습니다. “자르지 마라. 우리가 졌다. 이렇게 책임감이 있는 네게 우리가 졌다. 이제 우리는 그만 가자.” 강도들이 떠나갔습니다. 그 보석상에 강도들이 들어왔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백만장자는 자기가 맡긴 반지도 없어진 줄 알고 놀라서 보석상으로 달려왔다가 루이의 이야기를 듣고 고마워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루이는 유명해졌고 보석상 주인은 목숨을 걸고 가게를 지켜준 루이에게 나중에는 사장자리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상도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한 가게의 주인도 최선을 다하는 종업원을 알아주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당시에는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비전교회 : http://www.visionchurch.co.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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