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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님의 마음으로 삽시다.

주님의 마음으로 삽시다.
본문 - 빌립보서 2장 5 - 11절 마경훈 목사

본문 - 빌립보서 2장 5 - 11절(개역개정)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본문 5절에 보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6-8절까지는 우리가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9-11절에서는 그런 마음을 가지신 주님을 하나님이 어떻게 높이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높이신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는 참으로 높아지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높아지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높아지지 않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또 높아지는 목적이 단지 높은 자리를 원하기 때문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높아져도 그 자리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처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올무에 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 23:12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일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높아지려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우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게는 높임을 받는 존재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달리기 시합을 하면서 8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100m 세계신기록 보유자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입니다. 그는 100m를 9.58초에 달리는 총알 같은 사나이입니다. 그가 만약 나와 100m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내가 50m 정도 달리고 있을 때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8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시합을 한다면 제가 100m를 비록 20초에 끊는다고 해도 제가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높아지려고 해도 그 과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룰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진정으로 높아짐 즉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높아지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오히려 낮아지는지 확실한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의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높여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는 사람이 되려면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인생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몸부림치다가 고생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를 높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의 이름은 에서입니다. 쌍둥이가 어머니 리브가 뱃속에서 서로 싸우니 이삭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이삭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높여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깨지고 또 깨지는 인생이었습니다. 언제까지요? 그에게 주님의 마음이 들어갈 때까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높이시는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자신이 볼 때도 참된 만족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비결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릅니다. 첫째는 믿는 우리가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방법입니다.

1.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일본 스모 경기가 가끔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혀 재미가 없는 스포츠입니다. 그런데 스모 선수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일본 씨름은 어떻게 보면 너무너무 징그럽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굵을 수 있어요? 사람의 배가 그렇게 클 수가 있어요? 사람의 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엉덩이를 끈으로 하고 드러낸 모습이 어린아이 귀저기도 아니고 웃음이 나옵니다. 세상에 엉덩이가 얼마나 큰지, 엉덩이 한쪽이 제가 앉는 의자 바닥만해요. 그렇게 덩치가 큰 사람이 걸어 나오는 걸 보면 무슨 곰 같기도 하고 너무너무 징그럽습니다. ‘저것이 무슨 씨름이냐’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심판이 부채 같은 걸 들면 둘이 서로 달라붙습니다. 상대를 밀어내면 끝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싱겁습니다. 그런데 참 감동적인 것은 이긴 사람도 이긴 표시를 안합니다. 기뻐하지도 않고 손을 흔들지도 않고 그냥 봉투 하나 받아 가지고는 들어갑니다. 진 사람도 졌다라는 표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땅을 친다든지, 머리를 숙인다든지, 속상해 한다든지, 항의한다든지 지면 섭섭할 텐데 섭섭한 표정이 없� 楮� 깨끗하게 끝내요. 스모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을 다 비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스모선수들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주님은 마음을 다 비우셨습니다.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수 있으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높이셨던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자기를 비운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좀 모질게 마음먹으면 가능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에서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법 보다 주먹이 앞서던 시대입니다. 부족시대이기 때문에 타부족의 사람은 잡아서 종으로 삼거나 죽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자기를 비우므로 시작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귀한 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10년 만에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아들보다 더 귀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몇 세에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75세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그 날 자식에 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이 25년이 지난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지는 25년만이지만 결혼한지는 60년이 되었는지 70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결혼 후 6,70년 만에 자식을 보았으면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가 100세였습니다. 100세나 된 할아버지가 결혼한지 6,70년 만에 아들을 낳았으니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한 아들 아닙니까? 아마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하여 죽어줄만한 일이 발생했다면 서슴지 않고 자기가 대신 죽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귀한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번제로 바치기 위해서는 아들을 죽여야 하고 각을 떠야 합니다.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발라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실 계획은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숨겨진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합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모리아 산까지의 거리가 3일 길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겠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아브라함이 흘린 눈물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갈등은 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마음을 비웠다면 더 비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갈 3장에서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 복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장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통장째로는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물건사고 난 후에 통장을 내민다고 계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에 가서 그 돈을 찾아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려면 아브라함처럼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본문에서 자기를 비운 증거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자기를 비운 첫 번째 증거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캐리는 원래 가나안 집안에서 태어난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어느 날 인도 선교의 비전을 확인하고 평생을 인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어느 선교단체도 그의 학력과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인도로 가는 여비를 벌기 위해 3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인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들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러한 소식이 영국에 점점 알려지게 되어 영국의 선교단체들이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인도어 영어사전과 성경 번역을 하는 등 인도의 기독교 역사에 크나큰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대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황실과 귀족들이 윌리엄 케리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파티에 참석한, 못된 귀족 한 사람이 외부적인 조건이 별로 좋지 않은 케리에게 창피를 주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케리씨, 당신은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구두 수선공이었다죠?” 케! 리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공작님, 제가 일하던 곳은 번화가의 유명한 구두점도 아니었고, 빈민가의 허름한 구두방이었죠.” 윌리엄 케리는 인도의 성자 이전에, 참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자신의 명성 때문에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겸손의 기독교입니다. 어거스틴의 제자가 하루는 어거스틴에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겸손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다시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도 겸손이니라.”, “그럼, 세 번째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 번째도 겸손이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가정은 가정천국이 되고, 교회는 교회천국이 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서로가 낮은 자세로 상대를 높이면 천국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만 모이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가정이나 직장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교회구성원들이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고 자기를 높이기만 하면 교회도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인정받으려고 하고 얼마나 대접 받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교인들이 시험에 드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섭섭함입니다. 섭섭함이란 감정은 대접받지 못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마음을 가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을 처리하지 않으면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것이고 마음이 미우지 못하면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높임은 없습니다. 따라합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자기를 비운 두 번째 증거는 복종입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십자가를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에게 십자가는 사람이 십자가로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죽는다면 억울하기는 해도 아주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등 수많은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셔서 죄 없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입니다. 단 한 번도 마음과 생각으로 입술과 행동으로 죄를 범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엄청난 수치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북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는 반드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려면 갈등을 이겨내야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갈등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자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주님은 갈등하셨으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을 보면 주님이 복종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높이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순종하십시오. 순종이 안 되면 복종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2. 주님의 마음을 품는 방법
   주님의 마음을 품는 첫 번째 방법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영입니다. 제 영이 저인 것처럼 성령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주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겔 11:19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새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증거는 복음증거입니다. 행 1:8에 보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금년에 우리교회는 목양에 집중합니다. 목양이란 전도하고 제자 삼는 사역입니다. 목양을 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도 부흥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는 것만 아니라 목양을 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전도와 선교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역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 1:28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전도하고 양육하는 것 즉 목양입니다. 목양을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 두 번째 방법은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려면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할 때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들어와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던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다보면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엄마가 말 안 듣는 딸에게 “너도 시집가서 너 같은 딸 하나 낳아보면 내 마음 알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면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양을 해보면 목사의 심정을 안다고 하더군요. 전도해서 열심히 양육을 했는데 시험들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제자 때문에 마음 아파본 성도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할 때 목사의 마음이 어떤지 알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얼마나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세웠는지, 왜 그렇게 금식을 자주 해야 하는지, 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지, 왜 늘 밝아야 할 목사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지 알게 된 다고 합니다. 목양의 멍에를 매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이름뿐인 구역장은 모릅니다. 목양을 하는 구역장만이 알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야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주님이 매신 멍에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멍에였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한 멍에였습니다. 성도들이 목양을 하게 되면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송아지를 잡는 아버지의 마음, 잃은 양을 찾고 동네잔치를 하는 목자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기를 비우십시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가지 복종하는 자세를 갖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성령충만을 받으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십시오. 주님과 함께 전도하고 양육하는 목양의 멍에를 매십시오.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제 설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우리가 높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연희씨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에 소개된 신학교 출신의 맹의순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맹의순 선생은 6.25 사변의 피난길에서 공산당으로 오해를 받고 체포를 당해 포로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원래 그의 삶은 이웃을 돕고 복음증거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가 공산당으로 오인을 받아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마 보통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이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전도할 수 있는 대상과,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아 광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광야교회를 시작하던 날,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째서? 왜?’라는 질문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하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갈 수 없었던 중국, 그곳에 가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 앞에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다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교 현장으로 보내 주셔서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날마다 감격이고, 날마다 선교현장이며, 날마다 봉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는 세월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친구들이 그가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석방 탄원서에 자기의 이름만 서명하면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서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보내셨는데, 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새벽 세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손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고, 찬송가를 가르쳐 주고, 시편 23편을 읽어주다가 갑자기 그가 쓰러졌습니다.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수용소 밖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되었는데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장례식장의 자리에서 이 편지가 읽혀졌습니다. 그것은 중공군 포로들이 쓴 편지였습니다. 한국말로 번역된 편지 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던 맹의순 선생이 정말 가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 군인의사들을 도우며 우리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맹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 가며 찬미가를 불러 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한 두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더욱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에 선생은 � 斫育�다스리는 천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 주고 주물러 주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선생이 발을 씻어 주시면 천상에 오른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 분의 손으로 씻기움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별로 불편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맹 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껍데기를 녹여 주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의 손과 사랑으로 녹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은 이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선� 萱�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 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 거제리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 일동 -
   여러분! 이 맹의순 선생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셨던 분이라고 믿습니다. 동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다치게 한 원수 같은 공산당 포로들 속에서 그 분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들을 사랑하고 전도하고 섬겼습니다.
   그 분은 이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모델이셨습니다. 오늘날의 성도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복종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전교회] 경기도 하남시 감이동 361-4
(02) 443-9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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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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