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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벧전 2:11-1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벧전 2:11-17)

 

   금번 ‘제 9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몇 가지 대단히 의미 있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소위 ‘목회자 세습’ 불허 결정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지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사회는 한국교회의 목회자 세습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보아왔습니다. 마치 권력대물림이나 부의 대물림처럼 담임목사직의 대물림도 부도덕한 일로 비판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스스로 목회자 세습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모처럼 한국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 재교육에 대한 결정’입니다. 목회자가 안수 받고 목사가 된 후 7년이 지나면 반드시 재교육을 받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일부 목회자들의 불의한 행동으로 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한국교회에 대해 크게 실망한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 대한 재교육 의무화 결정은 목회자의 불의한 일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측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적지 않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상황과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이 비슷합니다.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당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비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당시 상황은 어떠했길래 이런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시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볼 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 내의 여러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받았던 비방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납하기 힘든 풍습을 퍼뜨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볼 때 이 상태 계속된다면 복음전파가 안될 뿐 아니라 기존 교인들마저도 실망하거나 두려워서 교회를 떠날 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다고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매스컴으로부터는 돌팔매까지 맞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상태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까지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우선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영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갈 5: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성령을 따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지 못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확인된 바가 있습니다.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창 3: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마음속에서 육체의 욕망이 불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그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제어하지 못하면 사로잡힙니다.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고 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까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적 욕망은 반드시 제어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욕망이 무서운 것은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제어했다고 끝이 아니고 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오래 전에 고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뒤에 제자들과 후배들이 지침이 될 만한 말씀을 듣기 위해 여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동안 가장 힘드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저희들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님의 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여자입니다. 여자를 조심하십시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목회자들이 성적인 욕망을 잘 제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이성문제로 단 한 번도 실수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 어떤 불미스런 루머가 떠돌았다든지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행동을 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소중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도 속에서 솟구치는 정욕 때문에 힘드셨다는 점과 평생 이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릅니다. 때로는 성적 욕망으로, 또 때로는 가지려는 욕망으로, 또 때로는 권력의 욕망으로, 그리고 또 때로는 명예의 욕망으로 솟구쳐 오릅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2. 인간의 제도를 주를 위해 따르라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다음으로 인간의 제도를 따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따르되 주를 위해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국가라는 제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만들어놓은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고민이 있습니다. 과연 그 제도가 어떤 제도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제도는 바로 로마라는 나라를 말합니다. 로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도록 보살펴주는 나라도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황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 제도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제도를 따르라고 말씀하는 이유를 13-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그러니까 악을 징벌하고 선행을 장려하는 정상적인 국가일 경우 그 제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따라야 하느냐 마느냐의 기준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일단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제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은 그 제도 자체를 복음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중국선교여행 도중에 또 한 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중국교회는 소위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조직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조직 때문에 중국교회를 ‘삼자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기독교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 협력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심지어는 중국공산당정부가 무너지도록 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노골적으로 반정부 노선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교회를 ‘가정교회’ 또는‘지하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삼자교회를 대하는 중국정부의 종교정책은 계속해서 변화해왔습니다. 소위 2세대 지도자인 등소평 시대에는 삼자교회에 부분적인 종교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3세대 지도자인 강택민 시대에는 삼자교회와 소극적인 장려책을 폈습니다. 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 시대에는 적극적인 장려책을 폈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된 시진핑 시대에는 삼자교회를 세계 속의 중국교회로 발전시킬 계획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교회를 대하는 중국정부의 종교정책은 갈수록 강해집니다. 박해하고 억압하는 정책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금년에 들어와 가정교회를 후원하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비자를 갱신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400여명의 선교사들이 짐을 싸야 했습니다.

   결국 최근에 와서야 삼자교회식의 접근 방법이 옳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삼자교회가 중국정부에 협력하면서 중국사회에 기독교가 국가발전에 유익한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종교의 자유를 얻어내고 좋은 평을 바탕으로 복음화의 좋은 기회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방인들이 불신앙적이라고 해서 적대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일단 협력하고 그 제도를 따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제도를 변화시킬 기회를 얻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를 복음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유를 바르게 쓰라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또 하나 자유를 바르게 쓰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그리스도인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자유를 악을 가리기 위해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들 자유를 쓰는 것처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쓰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악을 가리기 위해 쓰는 방법입니다. 악을 저질러놓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자유를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유를 ‘방종’이라고 합니다.

 

  대학시절 교외선을 타고 MT 가던 때 일이 생각납니다. 늦은 시간 퇴근하던 사람들이 조용히 쉬고 있는데 몇몇 대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때 건장한 군인 한 사람이 참다못해 나섰습니다. “학생들 조용히 갑시다.” 한 학생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노래를 하든 떠들든 우리 자유입니다.” 그 군인이 그 학생 따귀를 올려쳤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리든 말든 내 자유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방종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무슨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덕이 빠진 자유 그것이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방종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자유로 악을 가리고 자유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자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같이 사용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종같이 사용하는 자유란 무엇일까요?

   빌 2: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그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선택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하남신학교를 들렀습니다. 교장이신 탕위민 목사님께서 최근 신학교 상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학생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젊은 학생들이 대거 지원을 하는데 경쟁률이 5:1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능한 학생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하남신학교는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학 졸압자들로 몰려든답니다. 특히 북경대나 청화대와 같은 일류대 출신 대학생들이 오고 있답니다. 좋은 직장을 다니며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고생을 자초하는 목회자의 길을 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십자가를 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소원을 두고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제도를 주를 위해 따라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십자가를 지는 일을 위해 써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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