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 (눅1:39-45)
눅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1: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1: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오늘 본문에는 두 여성이 등장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이 두 여성은 친척지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인 갈릴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사벳은 남쪽 지방인 유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여성에게 똑같이 수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수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태했습니다. 도무지 아이를 밸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밴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을 통해서 초자연적으로 수태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의 전반부에는 두 여성에게 일어난 수태의 기적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면, 이 두 기적 사이에는 너무나도 흡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모의 소개(눅1:5, 27)
세례 요한의 부모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둘째, 수태할 수 없는 상황(눅1:7, 27)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본시 수태를 못하던 여성이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습니다.
셋째, 천사 가브리엘의 출현(눅1:13, 19, 26, 28)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나타났습니다.
넷째, 천사에 대한 반응(눅1:12, 29~30)
천사를 보고서 사가랴는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마리아도 역시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다섯째, 천사의 위로(눅1:13, 30)
천사는 사가랴에게도, 또한 마리아에게도 “무서워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섯째, 아들의 약속(눅1:13, 31)
천사는 사가랴에게도, 또한 마리아에게도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일렀습니다.
일곱째, 아들에 대한 설명(눅1:13~17, 31~33)
천사는 사가랴에게 그의 아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가 수태한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여덟째, 두 사람의 이의 제기(눅1:18, 34)
천사의 말에 사가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홉째, 징표를 제공함(눅1:20, 36)
천사는 믿지 못하는 사가랴를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사가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징표였습니다. 또한 천사는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에게는 그의 친족 엘리사벳의 수태를 징표로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수태한 내용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한 내용에는 서로 간에 흡사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두 사람의 수태는 각기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습니다. 수태한 시점도 육 개월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기적을 통해서 수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두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축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눅1:39 (1)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2) 빨리 산중에 가서 (3)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1:40 (4)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5)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1)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눅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엘리사벳은 수태한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가서 석 달을 함께 지내다가, 엘리사벳이 해산하기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천사가 떠난 후, 그 즉시 일어난 셈이 됩니다.
(2) “빨리 산중에 가서.”
왜 마리아가 빨리 산중에 갔습니까? 이때 마리아는 요셉과 이미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요셉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마리아가 수태했습니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요셉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또는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산중에 가서 숨은 것입니까?
눅1: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엘리사벳은 수태하고 난 뒤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도 수태하고 난 뒤여서, 한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 있기 위하여 빨리 산중으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황은 서로 달랐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고, 본래 수태하지 못하던 여자였습니다. 그와 같은 엘리사벳이 수태했다고 말하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자기 몸에 분명한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천사가 떠난 직후였습니다. 따라서 비록 마리아가 수태했더라도, 아직은 그의 몸에 어떤 징후가 나타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와 정혼한 요셉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수태 사실을 숨겨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3)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빨리 산중에 간 것은 유대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흔히들 산 위에 동네를 만듭니다. 예루살렘도 산 위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찾아간 동네도 유대의 산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행정구역은 네 곳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와 베뢰아였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을 출발해서 유대의 한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수도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동네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직선 거리는 120km가 넘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사흘 내지 나흘 정도가 걸리는 먼 여행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혼자서 갔는지, 또는 누구와 함께 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또한 마리아가 걸어서 갔는지, 나귀를 타고 갔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그곳을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마리아의 나이는 불과 13세 정도였습니다. 마리아가 그 어린 나이에 그 먼 길을 찾아간 것은 그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이와 같이 마리아의 목적지는 사가랴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을 찾아갔습니까? 마리아는 그곳에서 사가랴의 아내이며, 또한 자기의 친족인 엘리사벳을 만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입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천사의 말이 마리아에게는 얼른 이해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천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의 직접적인 징표를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이 수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눅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1)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2)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엘리사벳은 늙었기에, 아들을 밸 수 있는 나이가 지났습니다. 또한 그는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였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이 아들을 배었습니다. 그것도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천사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천사가 말한 징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사가랴의 집으로 갔던 것이었습니다.
(5)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오늘 본문에는 문안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40절과 41절과 44절입니다. 세 번 모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습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사가랴에게 문안하지 않고,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습니까?
눅1: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눅1: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가랴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사가랴는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그에게 형용하여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가랴가 이와 같이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만 문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말의 문안은 웃어른께 안부를 여쭙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용되는 문안은 관례적인 인사 치레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서로 간의 깊이 있는 대화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출18:7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출18: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여기에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 문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는 그 장인에게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모세는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이드로에게 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문안의 방식입니다.
분명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마리아도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절하며, 그의 입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함께 집에 들어가서, 마리아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엘리사벳에게 고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엘리사벳도 자기에게 있었던 일들을 마리아에게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아마도 엘리사벳은 자기의 수태한 배를 마리아에게 보여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두 사람의 체험은 너무나도 흡사했습니다.
그러니 이때 마리아는 자연히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천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천사가 자기에게 한 말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마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하십니까? 우리가 더러운 말을 할 때입니다. 우리 입 밖으로 나오는 경건치 못한 말은 덕을 세우는 데 아무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듣는 자들에게도 전혀 은혜를 끼치지 못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과 같이,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합시다.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을 합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도, 또한 듣는 사람들의 믿음도 굳세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습니다.
눅1:41 (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2)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대화를 나누면서, 천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할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지금 똑같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수긍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와 같이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조차도 마리아를 오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그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바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벳은 그 자신이 기적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말을 믿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리아를 변호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남김없이 다 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아이가 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을 태동(胎動)이라고 합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복중에서 아이가 커갈수록, 태동도 더 많아지고 더 활발해집니다. 아이가 태동할 때, 부모는 손을 얹어 아이의 태동를 느끼면서 즐거워합니다.
눅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이와 같이 이번 태동의 의미는 달랐습니다. 아이는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가 단순히 자기 몸을 뒤척이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던 것은 그 아이에게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엘리사벳의 복중에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보다 앞서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눅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것은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한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했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복중에서부터 메시아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메시아는 마리아의 복중에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세례 요한은 이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던 것입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씀입니다. 여기의 신랑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랑의 친구는 세례 요한 자신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신랑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이 세례 요한에게는 모태로부터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뻐합시다. 성탄의 달을 맞이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 우리 모두와 늘 함께 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눅1:41 ....(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1:42 (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3)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4)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1:43 (5)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눅1:44 (6)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1:45 (7)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오늘 본문의 논지는 이러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천사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세 가지를 통해서 천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둘째,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기쁨으로 뛰노는 것을 통해서였습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따라서 세 번째 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성령이 그 사람을 온전히 주관하십니다. 그러한 경우 그 사람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하23:2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엘리사벳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큰 소리로 불러.”
여기에 사용된 세 단어는 모두 강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목소리를 아주 높여서 크게 외쳤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남편 사가랴가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가랴는 아예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으며, 아예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사가랴를 위해서는 큰 소리를 외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는 말씀의 권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선포되고 또한 들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이는 히브리 어법으로 최상급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들 가운데서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여자입니까? 히브리 문화에서 여자의 복은 그의 자녀들을 보고서 판가름을 합니다.
눅11: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마리아가 가장 복이 있는 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장 위대한 아이를 배었고, 또한 그 아이에게 젖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이 있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사벳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눅1:15 말씀과 같이, 세례 요한도 큰 자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선구자일뿐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을 밴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밴 마리아와는 감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자기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4)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여자들 중에서 가장 복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그만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성령 충만한 엘리사벳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가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5)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엘리사벳은 주의 모친인 마리아가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워서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엘리사벳에게 지극히 큰 영광이며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자기가 받은 축복을 또한 노래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주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는 이 아이가 바로 메시아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눅1: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여기에 “주”라는 이름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벳이 말한 “주”는 바로 하나님을 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자기의 “주”라고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하나님의 모친”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낳았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낳은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주”라고 부른다든지, 마리아를 “하나님의 모친”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리아를 신성화시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6)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이 말씀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앞에 있는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해서,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
이때 엘리사벳도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은 복중에서 아이가 태동하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쁨으로 뛰노는 것임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7)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물론 여기의 “믿은 여자”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는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가랴는 한 동안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는 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직접 지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믿은 너에게”라고 하면서 2인칭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믿은 여자”라고 하면서 3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믿는 그에게 복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엘리사벳의 외침은 하나의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한 마디로 축복송입니다. 그의 노래에 나타나는 축복의 대상은 모두 넷입니다. 마리아와 그의 태중의 아이, 엘리사벳,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는 우리의 주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도 결코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낳을 수가 있습니까? 이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섭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서 삽시다. 그리해서 하늘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들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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