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와 같이! (딤후4:6-8)
딤후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 가운데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이 말씀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너는”입니다. 그러니까 “너는”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네 직무를 다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이유를 오늘 본문 6절에서 밝혔습니다.
딤후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헬라어 원어성경에서, 이 말씀의 첫 단어는 “내가”입니다. 그러니까 5절의 “너는”과 6절의 “내가”가 서로 강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가 곧 떠나야 하니까, 디모데가 자기를 대신해서 맡은 바 직무를 다할 것을 당부했던 것입니다.
딤후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바울을 변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이 세상의 임금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곧 네로 황제의 판결로 자기가 목 베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네로 황제가 자기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무도 자기를 변호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후,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아무에게도 허물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누구나 모든 가식을 벗고 진실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디모데에게 그가 맡은 직무를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가 곧 순교하게 될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곧이어 바울은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지금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는 달려가야 할 길도 마쳤습니다. 그는 믿음도 지켰습니다. 진정 바울은 부끄러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을 과시하면서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또한 우리 모두도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직무를 다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울의 현재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둘째, 바울의 과거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고 있습니다. 셋째, 바울의 미래입니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바울처럼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직무에 늘 충성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바울의 현재입니다(The Present).
딤후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모세의 후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엘리야의 후계자는 엘리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후계자는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음을 밝히면서, 후계자 디모데가 자기를 대신해서 그가 맡은 직무를 잘 감당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 관제(灌祭, A Drink Offering)
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의 일종입니다. 민수기 15장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부었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서 전제 또는 관제라고 칭합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짐승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기름을 섞은 곡식 가루를 소제로 드리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관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약 삼십여 년 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삶은 이미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 동안 바울의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많이도 생겼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많이 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삶은 이미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졌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을 관제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포도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완결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붉은 피를 뿌림으로서 주를 위한 자신의 사역과 삶을 마무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십자가형이 해당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참수형, 곧 목 베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제 자기가 목 베임을 받을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바울에 대한 심리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판결과 집행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벌써”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자기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는 그가 관제로 드려지는 것을 가정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문에서 바울은 그것을 가정하면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때의 가정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곧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2) 떠날 기약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죽을 때를 “떠날 기약”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왔도다”라는 동사를 완료형 시제로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의 죽을 때가 이미 다가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공항에 가면 각종 항공편의 스케줄이 스크린에 떠올라있습니다. 스크린 상에는 출발이 있고 도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떠남은 스크린 상에 나오는 출발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바울은 자기가 곧 목 베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참혹한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코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벧후1: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바울이 자기의 죽음을 “떠나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처럼, 베드로도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서 “장막을 벗어나다”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자신들의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서, 자신들의 죽음을 그와 같이 소망적인 말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떠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나루오”입니다. 이는 “루오” 곧 “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당시 “떠나다”라는 단어는 네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를 분석해보면, 우리는 바울의 의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짐승이 멍에에서 벗겨지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짐승이 해야 할 일을 다하면, 주인은 짐승의 몸에서 멍에를 벗겨줍니다. 그리고는 짐승을 쉬게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자기의 직무를 다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바울은 그 동안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쉴 것입니다.
둘째, 죄수가 사슬에서 풀리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사슬에 매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곧 자기가 사슬에서 풀려날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서 줄을 푸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번 지중해를 항해했습니다. 그는 배가 출항을 할 때면, 항구의 쇠기둥에 묶어놓은 줄을 풀어주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 나라를 향해서 그의 마지막 항해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넷째, 새로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장막을 걷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본시 바울의 직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장막을 치고 걷는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바울은 많은 곳들을 옮겨다녔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한 장막을 치기 위해서, 이 땅에서의 장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수고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영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가서, 그곳에 우리의 거처를 영원히 두는 것입니다.
전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출생하면 그때부터 모든 수고가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모든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죽으면, 그 모든 수고와 얽매임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며 영원히 삽니다. 그러기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우리의 떠날 기약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임을 잊지 맙시다.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우리의 떠날 기약이 곧 다가올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직무에 늘 충성을 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바울의 과거입니다(The Past).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서 바울은 세 개의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모두 완료형입니다. “싸웠다. 마쳤다. 지켰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의 직무를 다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런 아쉬움이나 뉘우침이 없이 자신의 삶을 기쁘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선한 싸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삼십여 년간을 바울은 줄곧 싸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때로는 운동 경기를, 때로는 군인들의 전쟁을 예로 들었습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이와 같이 바울은 경기장에서 선수가 달음질하는 것처럼, 권투를 하는 것처럼, 씨름을 하는 것처럼 땀흘리면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또한 바울은 전쟁터에서 군인이 완전무장을 하고서 전투를 하는 것처럼, 피를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과 싸웠습니까? 바울은 마귀와 싸웠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웠습니다. 또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율법주의자들과도 싸웠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며, 허탄한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과도 싸웠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그의 지체 안에서 그를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육체의 소욕과도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싸움은 내가 잘났고 너는 못났다는 식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가 높고 너는 낮다는 식의 싸움을 싸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싸운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일군이 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싸운 대의명분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었습니다.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우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상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생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길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힘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달려갈 길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그날부터, 바울은 정말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줄곧 달려왔습니다. 그리해서 이제 그는 드디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결승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행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달려야 합니다. 힘껏 달려야 합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면, 하나님은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상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달려야 합니까?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달리는 자가 세월아 네월아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달음질하는 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힘들어도 인내하면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그 동안 달음질한 의미가 사라져버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달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신경을 쓰다보면, 달음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의 달음질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달음질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각에 끝이 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달려가는 자세로 우리의 직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을 지킴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선한 싸움을 싸우고 아무리 달려갈 길을 마쳐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만일 바울이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로마의 황제 네로 앞에서 믿음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믿음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지킨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예컨대 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후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와 같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데, 허탄한 이야기를 듣고서 무슨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의 심령에 믿음을 심어주며, 그들의 심령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와 같이 당부했습니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허탄한 이야기를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엄히 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의 직무를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산으로 가라고 명하셨는데, 우리가 바다로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고기를 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항상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과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의 달려길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바울도 평안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든지 건강하게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때로는 먹고 싶어도, 절제하면서 먹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신체적인 면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면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걸어온 영적인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밝혔습니다. 이는 바울이 우리 모두도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을 때, 우리도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 그때 우리 모두도 이와 같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바울의 미래입니다(The Future).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먼저 바울은 그의 현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그의 과거를 회고했습니다. 그는 승리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자기가 받을 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의의 면류관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달음질에서 승리했습니다. 권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씨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땀을 닦으면서, 재판석을 바라봅니다. 재판장은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받을 면류관을 가리켜서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와 같이 천국은 의가 거하는 곳입니다. 불의는 그곳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계21장과 22장의 말씀처럼, 살인자와 행음자와 우상숭배자와 거짓말쟁이와 같은 불의한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은 자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 바울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지체 안에서 그를 죄의 법 아래고 끌어내리려는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의로 배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칩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고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거하기를 바랍니다.
(2)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딤후4:1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세상 법정에서는 심리가 이루어지며, 변호도 하고, 증거물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의 원로원에서 불의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불의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심리도 필요가 없고, 변호도 필요가 없고, 증거물을 제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뜻도 아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숨은 동기까지도 완벽하게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심판에는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며, 우리에게 상을 내리십니다.
(3) 주의 나타나심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나옵니다. 첫째, 분리되는 심판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분리되고, 양과 염소가 분리됩니다. 둘째, 벌받는 심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받는 심판입니다. 셋째, 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성도들이 그 충성한 대로 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자연히 자기의 직무를 다한 사람만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할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은 상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면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누구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지키면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면, 누구에게든지 의의 면류관은 주어집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또한 우리 모두도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각자가 맡은 바 직무를 다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생애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끝까지 달려갑시다. 믿음을 지킵시다.
그리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우리 모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예수님의 칭찬과 함께 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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