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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요9: 1-41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있을까요? 물론 우리 몸에 불편
함이나 고통이 있으면, 그것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손가락이나 발
에 생긴 것이든,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과 불편 중에서 앞을 못 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안 당해봐서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사정이 어떤지 한번 알아보자 하고  눈을 감고 걸어가다가 머
리를 부딪쳐 가지고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앞 못보는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살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에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린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십
니다. 자상하기 그지없는 남편이 곁에서 눈이 되어 가지고  항상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오시는 모습을 가끔 볼 때면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앞
을 못 보는 그 여 집사님이 얼마나 답답할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선진국
일수록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다양한 편의시설을 마련하
고 기구를 개발하는 등 많은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
해도 조금만 불편을 극복하고 숙달이 되면 정상적인 사람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생
활하는 것을 봅니다. 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의 모 대학 총장이 자기가 겪었던 간단한 에피소드를 기록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총장이 사는 모 지방 도시 번화가 옆에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맹인 한 명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작은 컵 하나를 든 채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총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맹
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호주머니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
컵 속에다 넣어 주었습니다. 25센트 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몇 발자국을 지나왔는
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구
걸하던 맹인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 컵에서 그 동전을 꺼내들고는 얼마 짜린
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
고 되돌아 와 가지고 "여보,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들여다보며 살피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아니, 맹인이 아니면
서 왜 맹인인체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맹
인이 제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제가 대신 서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
신의 맹인 친구는 어디에 간 거요?"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 구경하러 갔습니
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인이라도 이렇게 조금 웃어가면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 맹인들이 여
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배려를 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당하
여 혼자서 구걸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목숨을 부지하다  죽으면 그만인 그런 쓰
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군중들이 그 말씀에 반발하며
손에 돌을 들고 치려고 하자 그 살벌한 분위기를 피해서  성전 밖으로 걸어 나오셨
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나면서부터 봉사된 사람이  막대기를 가지고 더듬거리
면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키며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
니다.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
기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
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큰 일을 나타내시
려고 맹인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대답하시고는 그 사람을 불러 침으로 진흙을 이
겨 눈에 발라준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
로암 못에 가서 그 눈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 눈을 열어주셔서 밝히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한 나머
지 춤을 추면서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사례하는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너무 불
쌍해서 주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사람의 눈을 고쳐주신 데는 또 한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
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이 환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39절부터 41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
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
은 소경 되게 하려함이니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
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자라도 눈을 뜨고,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눈을 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볼 사람은 보
게 하고 감아야 할 사람은 감게 함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내용이  영적인 눈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
은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잘 압니다. 우리 중에 육신의  눈을 뜨지 못해 고통 하는
사람은 가끔 있을 수 있지만 영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고통 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압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적
으로 말하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
자 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
광을 본다고 말합니다. 또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
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한평생을 캄캄한 데
서 헤매다가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 이  사람들만큼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만 평생을  눈을 뜨고 살면서도 예
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할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8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을 주신 사람은 평생을  못 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
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맹인 중에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빛을 더 환하게 밝혀준다고 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맹인 앞에서는 빛이 밝게 빛나는  대낮이나 빛이 없는 칠흑과  같은 한밤중이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맹인이 보려면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눈이
열리려면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상
하게 열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눈을 열고 싶어하지도
않고 보고싶어 하지도 않는 그런 불행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읽으니까 정말 마음 아픈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오래 전에 독
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부인이 해산이 임박해서  산부인과에 입원을 했습니
다. 그런데 분만 대기실의 침상에 누워서보니 벽에 예수님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
었습니다. 그 부인은 간호원을  급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간호원 선생, 나는 벽에 걸려있는 저 사진이 정말 보기  싫으니 저것 좀 안 보이는
데로 치워줘요." 그러자 간호원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제
권한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병원에서 결정해서 걸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 윗사람을 한번 데리고 와 봐요." 그래서 그 간호
원은 수간호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수간호원 역시  마찬가지 대답을 했습니
다. "저 역시 저 사진을 뗄 권한이 없어요." "그래요? 우리 남편은 고급 장교예요.
며칠 후면 이 방에 올텐데 분명 저 사진을 몹시 싫어할 거예요. 좋아요. 그럼 우리
남편이 오면 그 때 병원 책임자하고 이야기해서 떼도록 하지요."
  며칠 후에 그 부인의 남편이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벽에 걸
린 그 사진을 보고, 또 자기 아내의 설명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는 식식거리며 그 병원의 최고 책임자를 찾아가서  자기는 예수라는 유대인이 싫으
니 그 사진을 빨리  치워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간호원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부인이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긴 낳
았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나면서부터 앞을  전혀 못 보는 맹인
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가 될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 사진을 보기
싫어하고 또 애가 나면 더욱이 저 사진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아
예 영원토록 그 사진을 보지 못하는 아이를 낳고 만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들 두 부부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그보다 영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더 불행
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환하게 비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눈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히 그 눈을 뜨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
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영안을
활짝 열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의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적도 없고,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갑바
도기야 교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믿으면서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사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
을 때마다 그 말씀이 꿀 송이와 같이 달게 느껴지고, 깨달아져서 벅찬 감격과 기쁨
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혼탁한 세상을 하나님
의 말씀으로 빛을 비추어 가면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해
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주의
은혜로 영의 눈을 떴습니다만,  이 영안이라는 것은 너무  예민해서 자칫 잘못하면
흐려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다시 감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
체 중에서 눈만큼 예민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상한 방법으로 눈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눈은 하루에 25,000번 이상
깜박인다고 합니다. 깜박이는 중에  눈물샘에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량의 눈물이 끊임없이 나와서  눈을 항상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야만 눈이
흐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불행하게도 눈앞에다가  안경을 끼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포켓에 안경 닦는 수건을  넣고 다닙니다. 한두
시간만 안경을 끼고 있으면 안경알에 먼지가 앉아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
히 보려면 자주 닦아줘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눈도
안 닦아주면 그 만큼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나면서 봉사된 사람을 고쳐주는 매
우 감격스러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전개되는 내용은
이상하게도 너무너무 살벌하고  답답하고 숨막히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뿐입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눈을 뜨고 본 일이 없는 사람을 주님께서 고쳐주셨다면 축제 분위
기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9장에서 오가는 대화들을 보면  살벌하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의 눈이 감겨있
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
엇이 그들의 영의 눈을 멀게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달리 하
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의 눈을  뜨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의 눈
역시 잘못하면 흐려지거나 심한 경우 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
리가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그들의  영안을 어둡게 했는지를 분명히
알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생각이 영안을 흐리게 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영의 눈을 흐리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세 가지요소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지
식, 통념, 시각은 우리의 영안을 흐려놓을 수 있습니다.  심하면 우리의 눈을 가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더듬거리면서 지나가는 눈먼  사람을 보고 무엇이라
고 말했습니까? "주님 저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저런 불행을  겪습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이것은 제자들을  위시해서 그 당시
유대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이요, 생각이었습니다. 잘못된
관념이었습니다. 그들은 앞 못보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죄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
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쓰러워 하는 고통이나 불행을 전부 죄 값
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사람 죄도 아니다. 부모 죄도 아니
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통 당하는 사람을
놓고 죄값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로 더 큰 고통을  당하도록 정신적인 압력을 가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
다. 어쩌면 전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인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불교 문화권과 유교 문화권에 젖어 있는 동양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종의 윤회설
로 설명이 됩니다. "조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녀가 그  고생을 한다." "전생에 무
슨 죄가 있어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나?" 모든 불행을  인과응보로 해석을 하는 것
입니다.
  특별히 태국 같은 나라는 불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 나라에
서는 선천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자들은 전부다 전생의 죄 값이라고 해석을 한다고
합니다. 태국에서 국제 맹인 선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
니다. 태국에서는 부모들이 애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주의를  시킨다고 합니다. "눈
먼 사람하고 절대 악수하지 말아라. 눈 먼 사람하고는 가까이 있지도 말아라. 가까
이 있다보면 병에 걸리거나 액운을 당하게된다." 안  그래도 보지 못해서 세상에서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면서 괴롭게 살고 있는데 그들의 불행을 잘못 해석하고는 이
처럼 잔인하게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지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전생에서나 이 생에서 아무런 죄도 없기 때문에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 불행이나 고통이 들어와서 앉은뱅이가 생기고 눈 먼 사람이 생기고
문둥병이 생기고 나중에는 병들고 죽고 하는 이 모든 비극의  연속은 죄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모든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
디까지나 본질적인 설명이지, 구체적인 적용에 해당하는 설명은 아닙니다. 다시 말
해 그와 같은 본질적인 해석을 모든 사람의 고통과 불행에  일일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9장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을 보십시오. 만일 그가 봉사가
된 것이 본질적인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왜 그 사람만 그런 불행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인류의 모든 죄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세상에 태
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서 이렇게 슬픔과  고통이 많은 세상을 살
고 있습니다. 만일 그 죄 때문에 당해야 하는 불행이라면 똑같이 당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왜 저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데,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오
히려 우리가 봉사가 아니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남의 불행에다 본질적인 설명을 적용하며 죄 값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
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관념이나 지식이 우리 마음을 가리우면 바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나 유대나라 사람들처럼,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잘못 해석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9장에 등장하는 맹인을 보고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자기
죄도 아니요 자기 조상의 죄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이니라"(3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선하신 어떤 일을 이루
기 위해서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며, 그래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앞
을 보지 못하는 불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여러분, 그 맹인이 당하는 고통에 이렇게  굉장한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
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도대체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저 사람이 맹인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구나. 그래서 몇십 년 동안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기다렸구나. 이제 드디어  때가 되자 하나님이
저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구나.' 이것을 미리 깨달았더라면 누가 그를 천대했겠습니
까? 그의 부모가 자기 자식을 왜 그런 식으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도록 내버려뒀
겠습니까? 그들의 영안이 잘못된 생각으로 어두워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고통을
바로 해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잘못된 말을 많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보면 잘못된 생각
이나 지식 때문에 영안이 흐려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
람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잘못된 정보
나 지식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그런 것들로 인해 예수  믿는 우리의 판단력도 충분
히 흐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의 문화권 속에 살아오
는 동안 우리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된 통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10
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에서 잘 씻겨지지 않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그
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영안이 뜬 다음에도 안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토정 비결이
니 사주팔자니, 궁합이니, 관상학이니 하는 잘못된 통념들의  영향을 받아 영의 눈
이 잘못된 크리스천들이 꽤 많습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해서 매일 사주팔자를 봐주
는 프로그램이 다 등장을 하고, 젊은이들 가운데는 아예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 사
주 팔자를 보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기가 막
힌 현실을 놓고도 영안을 바로 뜨고 이와 같은 무서운  사탄의 도전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끌려 다닙니다. 점치는  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도 자주 듣습니다. 예수  믿는 집사 중에서 인터넷을 켜  놓고 오늘 내
팔자가 어떨까 하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번 주에 나온 모 일간지에서  출판하는 주간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도 우리 나라에서는 꽤 수준 있는 주간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 보면 버젓이
대선 후보자들과 10대 재벌 회장들의 토정비결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려 있습니다.
그들의 토정비결을 보고는 금년 운수가 어떨 것이다 하고 분석해 놓은 내용입니다.
우리 나라의 최대 재벌 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기가 못의 물을
잃으니 활기가 다 빠졌구나. 올해에는 횡액을 조심해야  할 운수로다."하고 써놓았
고, 또 다른 재벌 회장에 대해서는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니 기쁜 일이 겹치리로
다."하고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모 후보에 대해서는 "49세 이전
은 큰 발전이 없었지만 49세 이후부터 복이  터져 79세까지 대길하리라."하고 예언
해 놓았습니다. 참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엉터리  같은 소리인데도 믿는 사람들이
그런 말에 많이 오염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통 잘못된 생각만 품고 있
는 것입니다. 이런 사탄의 이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제가 이
글을 읽고 엊그제 저녁에 잠을  자다가 잠시 깼는데 나도 모르게  "고기가 못 물을
잃었으니 활기가 다 빠졌구나."하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야, 이
것 정말 무서운 사탄의 역사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목사가 이렇게 헷갈릴 정도
라면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영안을 똑똑히 뜨고 인생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거짓된 정보나 지식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리고 영안이 흐려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솔직하게 살펴  봅시다. 그리
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갑시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환하게 닦아주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지식들
은 거짓된 것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
러므로 눈이 밝기를 원한다면 거짓된 정보나 지식에 마음을  쏟으면 안 됩니다. 오
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시자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안식일에 왜 소경을  고치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침을 뱉어서   손으로 진흙을 이겼으니
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게다가 그 진흙을 들어서 소경의 눈에 발라 주기까지 했으
니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느냐고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들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손수건도 던지지 못하게 합니다. 안식일에는 손톱도 못  깎습니다. 발을 삐어도 찬
물로 냉수 마찰도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는 행동이 곱게 비쳤
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동안 앞을 못  보던 자가 광명을 찾는 경사
를 만났는데도 율법을 내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란 법이나 형식을 앞세워서 남을  판단하는 일체의 태도를 말합니다. 본
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고, 내용보다는 외형을, 정신보다는 법을 우선에 두고 사
람을 잡으려 드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는 그 당시
에만 성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에  매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평신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율법주의에
매여 영의 눈이 흐려져서 잘못 보는 일들이 왕왕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에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
이나 예배 순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비판을 합니다.  벌써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의 본질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기쁘게
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조건
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비판하며 괴롭힙니다. 기도의 본질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
님 앞에 마음을 쏟고 구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몇 시에 일어나서 얼마나 기도
했는가'를 가지고 사람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의 본질은 그 말
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먹고 순종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으며 얼마나 아느냐'를 가지고 판단하려 듭니다.  제자훈련의 본질은 그리스도
를 닮고 그를 따르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누구한테 제자훈련을 받았으며 언제
어디서 받았느냐'를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달려듭니다. 헌금의 본질은 기쁨
으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액수를 가지고 헌금의 경중을 따
집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가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영의 눈이 흐
려집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까? 나름대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압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온갖 일들로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전통에 매여서 눈이 흐려진 사
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본질을 보는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눈이
형식과 법 때문에 흐려지지 않도록  은혜를 주셔서 항상 밝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교만이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세 번째  요소는 교만입니다. 9장 마지막으로 가봅시
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기
위해 왔노라고 하시자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경이냐? 저런 말을 다하게."하며  코방귀를 끼었습니다. 자신
들은 다 안다고 하는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성경을 가장 많
이 아는 지식 계급이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한 그들은  책임을 지기에 충분한 지식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
취어도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놓고도 그
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게도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별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빛이 비취어도 여전히 죄 속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 안에는 성경을 많
이 가르쳐서 손해 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쳐 가지고 손해 보는 목사들이 많은가 하면, 성경을 너무 많이 배워서 손
해 보는 교인들도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아예 교인들 가르치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설교만 들으면 된다. 설교만  듣고 다른 것은 공
부하지 말라."고까지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차라리  조금 무식해도 순종
하는 것이 조금 안다고 교만해져서 나중에 영적으로  잘못되어 비참한 결과를 초래
하는 것보다 백 배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잘못 배웠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진
리를 아는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어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해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사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이 어떠
하며 그 성령의 능력의 역사하심이 어떠함을 알게 하옵소서." 왜 그가 로마 감옥에
서 무릎을 꿇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더 알
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는 다 알았다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십자가의  사랑의 풍성함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오묘함을 다 통달한다고 말할 수 있
습니까?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주님의 영광의  자리 앞으로 더 가
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더 모르는  자가 되고,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안다고 교만을  부린다면 그것은 벌써 영적으로  눈이 가리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성경을  너무 많이 알아서 누가 무
슨 소리를 해도 '또 그 소리냐, 나도 다 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
니까? 성경을 펴고도 '다 아는  내용인데 뭐' 하면서 자세히 읽지도  않고 몇 장씩
넘기며 거만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한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만 만에 하나라
도 여러분 마음속에 은연중에 그와 같은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벌써 여러분의 영
안이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그러한 교만을 속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금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필
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이 건강해야겠고,  가정도 평안해야겠고,
이 사회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아야 되겠고, 내가 하는  일이 뜻대로 잘 풀려
야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똑바로 보
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못 보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 주변 도로를 걸어가다가 가게를 뜯어고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그런 공사가 벌어집니다. 저는 여기서 하도 오래 살다보니 이 지역을 환
히 꿰뚫고 있습니다. 이곳에만 벌써 20여 년을 살았으니 어떤 면에서 이 지역의 터
줏대감이 아닙니까? 그래서 척 보면 장사될 만한 곳인지 아닌지, 무슨 장사가 되고
무슨 장사가 안 될지 지나가면서  봐도 다 압니다. 눈으로 보는  게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니 가게문을 열려고 한다면 제게 와서  자문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히 헛돈들일 필요 없잖아요? 그러나  제가 지나가면서 보고 '아이고  저 양반 또
눈이 멀었구만. 아마 반년도 못 갈걸.'하고 생각했던 가게들은  정말 반년도 못 가
더라구요. 그러니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차이가 큽니까?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바로 봐야 됩니다. 눈이 흐려지면 안됩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질과 형식이 어떻게 다른 지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눈, 이것이야말로 금년을 우리가  건강하게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율법주의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
지지 않도록 합시다.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의 눈을 닦고 날마다 성령의 손수건으로 눈을 씻
어내서 정확하게 보고 우리 주님이 계시는 그 나라까지 바로 걸어가기에 조금도 어
려움이 없는 멋진 생활을 금년 한해 동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조용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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