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성탄 (사 61:1-3)
중국 고사성어 가운데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주로 세상이 놀랍게 변한 모습을 보고 비유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는 동안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를 한 마디로 ‘변화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합니다. 과거 인간이 5000년 동안 겪은 변화를 지난 100년 동안 겪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 100년 동안 겪은 변화를 지난 10년 동안 겪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 변화는 더 빨라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10년 전 상도동의 모습과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달동네가 철거되고 아파트촌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숭실대학도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십년 만에 상도동을 찾은 사람들은 이 ‘상전벽해’를 실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10년 내에 펼쳐질 대표적인 모습은 우선 가상공간이 컴퓨터 모니터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랍니다. 그러면 다양한 형태의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세상이 올 것이랍니다. 게다가 무인 자동차가 상용화되고, 로봇 가정부가 가사 일을 돕고, 알약형태의 음식이 등장하게 될 것이랍니다. 그러면서 환상적인 사회를 맞게 될 것이랍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상전벽해를 경험하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 왔고, 앞으로 더 빠르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상전벽해라는 말처럼 세상은 다 변하고 주위 환경도 다 변해도 우리 인간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속사람을 들여다보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말세를 향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롬 1:28 이하를 보면 바울이 지금부터 2000년 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인간 속사람의 모습은 2000년이 지난 지금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입니다. 최첨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랐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너무나도 똑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가 기나긴 역사를 통해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왔습니다.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정보화 혁명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인간의 겉 사람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속사람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스스로 속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상의 사회를 이룩하고,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속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사람이 변화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뒤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한 뒤, 예수의 영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간 뒤에 그 사람 자체가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후 5:17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속사람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세상과 오신 후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서구에서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역사와 오신 후의 역사를 구분합니다. 바로 일반적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구분하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주전’과 ‘주후’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B.C.(Before Christ) 즉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와 라틴어 A.D.(Anno Domini) 즉 ‘주님이 나신 해’(in the year of our Lord) 이후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새사람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세상은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은 변화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속사람이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롭게 열리게 된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앞으로 메시야가 오신 뒤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눅 4:16-21은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돼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습니다. 전례에 따라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눅 4: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새로운 시대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 일어날 변화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변화는 무엇입니까?
1.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가 가난한 사람, 둘째가 마음이 상한 사람, 셋째가 포로 된 사람, 그리고 넷째가 갇힌 사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모두 실패자들이라는 뜻의 ‘루저’(loser)들입니다. 이 루저들은 저마다 가진 문제 때문에 힘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힘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입니다. 사람들이 루저라고 낙인을 찍고 놀려댑니다. 게다가 ‘루저 주제에 감히!’라고 침을 뱉습니다. 루저 주제에 결혼하겠다고, 루저 주제에 대우 받겠다고, 루저 주제에 남들 앞에 선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 루저들에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스스로 루저라는 자기 비하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루저인 내가 그렇지 뭐!’ 깊은 절망감에 빠져듭니다. 하루하루 생존도 힘이 드는데 손가락질까지 받으니 견디기 힘이 듭니다. 이것이 쌓이면 자포자기하게 되고 영원한 루저의 늪에 빠져 실패자로 모든 것이 끝이 나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루저들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저들을 루저라고 부르신 일이 없습니다. 저들을 루저라고 조롱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따뜻하게 위로하셨습니다.
나태주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분이 쓴 시들 가운데 [풀꽃]이라는 아주 짧은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사실 풀꽃은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백합처럼 향기롭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그냥 지나쳐버리며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기 쉽습니다. 어찌 보면 풀꽃은 꽃들의 세계에서는 루저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꽃을 자세히 보면 정말 예쁩니다. 가까이 가서 오래 보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풀꽃처럼 루저인 당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말 큰 울림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정말 풀꽃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 여인을 자세히 봐주십니다. 오래 봐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스럽다고 말해 주십니다. 이 여인이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 위로가 우리들의 속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따뜻한 봄 햇살이 대지 위에 온기를 퍼뜨려 움츠려들었던 생명을 깨우듯이 우리들의 속사람을 깨웁니다.
2.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고,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실패자들에게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루저들에게 너희는 루저가 아니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다고 다시 일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E. 메이어 박사라는 분이 6.25 직후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1000여명의 미군들을 상담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담한 경험을 기록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강철이나 콘크리트 벽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독방에 갇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포로들 사이에는 극단적 절망이 자포자기 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포로들은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막사 구석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서 이틀도 못 넘기고 죽어갔습니다.”
이 병은 후에 ‘미라스무스’(mirasmus) 즉 ‘자포자기병’이라고 명명됐습니다. 이 병은 일종의 정신병으로 절망 때문에 저항력과 인내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병입니다. 무서운 것은 바로 이 병으로 당시 미군 포로 38%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메이어 박사에 따르면 많은 미군이 이 병에 걸리게 된 데는 당시 북한군이 사용한 악랄하고 무서운 심리전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북한군은 규칙을 위반한 동료를 밀고할 때마다 보상으로 담배를 줘서 밀고를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위반한 자에게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아서 그 규칙 위반자가 북한에 포섭된 첩자인 것처럼 의심받게 했습니다. 또 동료들에게 자아비판을 통해 자신이 했던 나쁜 짓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포로들 사이에 신뢰감, 존중감이 사라지게 하고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결국 포로수용소는 미라스무스병이 창궐한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밥을 굶겨도 버티고 고문을 해도 견뎌내던 포로들이 하나씩 둘씩 무너져 갔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미라스무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깊은 무기력증에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저들의 이 미라스무스 병을 고쳐주십니다.
요 4장을 보면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미라스무스 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선포하셨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믿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면 그는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놀라운 속사람의 변화가 있습니다.
3.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 마디로 메시야를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저라는 자포자기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의의 나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루저들이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모세를 보겠습니다. 그는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양치며 살았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때 모세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끈질기게 설득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형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어느 날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잡지 못했습니다. 큰 실패감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말씀에 의지하여 고기를 잡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루저들을 찾아오셔서 저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여기에 또한 속사람의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여러분이 또 한 번 예수님을 만나시고 새롭게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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