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이동원목사
요즈음 유행하는 형식으로 퀴즈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문제는 “인생의 고통은 ________와 같다”입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시편기자는 오늘의 시편인 시107편에서 한 4가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고통은 ‘사막에서의 방황’과 같다는 것입니다.(4절입니다.)
둘째는, ‘어둠 속에서 쇠사슬에 매임’과 같다는 것입니다.(10절입니다.)
셋째는, ‘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한 아사직전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18절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상징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대답은 인생의 고통은 ‘바다에서 광풍을 만남’과 같다는 것입니다.2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인생의 게임을 바닷가에서 폭풍의 비극을 지켜보며 웃고 울어야 하는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한바가 있었습니다. 그의 시 ‘바닷가’((On the seashore)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입니다. 폭풍은 길 없는 하늘에서 울부짖고 배들은 자취 없는 물살에서 파산하고 죽음은 널려있고 그리고 아이들은 놀이합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의 위대한 모임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폭풍과 파도와 두려워 출항 그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척은 항구에 매여 있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은 아닙니다.
배가 항구를 출항한다는 것은 폭풍과 파도를 만나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척은 폭풍과 파도 속에서 마침내 임무를 수행하고 소원의 항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우리가 사는 땅과 바다에는 에위니아라는 이름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에위니아라는 말은 ‘폭풍의 신’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폭풍이 갑자기 우리가 항해하는 인생의 바다에 임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며 기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1.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바다에서 갑작스런 광풍을 만날 때 혹은 파도를 만날 때 우리가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본문 시편기자의 대답을 빌리면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하필이면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할까요?
파도의 원인은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파도의 높이와 속도는 바람의 속도 혹은 지속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풍속이 클수록 파도는 커집니다.
바람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최고 파고는 30m이상인데, 전문가에 의해 측정된 최고의 파고는 34m정도로 보고 되고 있습니다.
파도는 지구 자체의 구조적인 원인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데 오늘 시편의 기자는 이런 자연적인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 현상의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허용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리고 진실로 오늘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바로 그분 ‘섭리의 주님’에게 나아와 부르짖음이 당연한 해결책이 아니겠습니까?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Lewis교수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강연을 마쳤을 때 한 학생이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교수님,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교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알려집니다.
“성경은 설명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단지 반문을 제시할 따름입니다.--(무슨 반문입니까?)그러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인데 고통마저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교만했겠습니까?”
이 말씀이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닌가요?
고통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를 믿을 수 없고,고통이 아니었더라면 기도를 배우지 못할 인생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의 본문도 “고통 때문에—여호와께 부르짖으매”하지 않았습니까?
광풍을 만나셨다고요?
그러면 이제 당신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그분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조용한 상황은 조용한 기도를 필요로 하지만 특별한 상황은 특별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내 삶의 정황이 비상한 상황이라면 비상하게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나는 네게 응답하겠고--”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2.기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성경의 권고를 따라 인생의 광풍을 맞이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우리가 세 가지를 기대해도 좋다고 약속합니다.
1)광풍이 곧 잔잔해 지리라는 것입니다.
2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풍 속에 휘말릴 때 우리는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 고통인 것처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에 시작이 있는 것처럼 어떤 고통에도 끝이 있습니다.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고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곧 소멸될 고통입니다.
지난 며칠 전 에위니어의 태풍이 몰아치던 밤, 이재민들에게 그 밤은 끝나지 않을 밤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 이 땅에서 발행되는 조간신문 대부분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장식되고 있었습니다.
“태풍 에위니어 소멸하다”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새벽바다를 산책해 보신 일이 있었습니까?
한번도 태풍을 겪지 않은 태고의 고요를 지닌 평화의 바다로 느끼시지 않으셨나요? 물론 본문이 인생의 모든 고통이 우리의 기도와 함께 즉시로 다 소멸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를 고통하게 한 문제 그 자체는 그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버티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라도 참으로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했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광풍은 소멸되고 잔잔한 고요가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혼의 고요를 간직한 사람들을 더 이상 태풍이나 파도가 흔들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주님은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변하고 있었을 때 그는 아직도 광풍의 한 복판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셨을 때 그에게 이미 광풍은 소멸되셨습니다.
그는 “네가 예수냐?”고 소리치는 군병들에게 그는 잔잔한 음성으로 “맞다. 내가 그로다”고 대답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건에 대하여 흥분하고 소리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광풍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월드컵 결승전에서 불란서의 지단 선수가 자신을 모욕한 이탈리아 선수(마테라치)의 가슴을 박고 레드카드를 받는 모습을 보고 지단은 아직도 자신의 열등감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그를 흥분시키려한 상대의 전략에 말려든 것입니다.
반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흑인을 해방한 유명한 링컨 대통령에게 한번은 그의 정적이 그를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의회 공 석상에서 조롱했을 때 그는 잠간 묵도한 후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정말 두 얼굴이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자리에 제가 하필이면 못 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까지 유쾌한 웃음을 웃고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그는 후일 이런 기지를 자신의 성격이기보다 기도로 얻은 지혜이었을 따름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광풍 가운데 계십니까?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광풍은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의 바다에 고요함이 임할 것입니다.
2)소원의 항구에 곧 도착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풍중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기대해도 좋을 일 둘째는 소원의 항구에 곧 도착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항해 중 풍랑을 만나면 그 만큼 항해는 늦어 질 것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사실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는 파도를 타고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오히려 우리의 항해의 여정을 앞당기는 경우입니다.
찬송가 503장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1)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 찬송가의 2절의 가사가 바로 이런 경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30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소원의 항구-개역 한글역)로 인도 하시는도다.”
광풍속에 기도하면 기도는 우리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재촉하는 방향조정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광풍 속에서 벗어나 목적지로 뱃머리를 돌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하나입니다.
기도를 통해 목적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에게는 고통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고통에 집중하지 말고 목적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도의 목적지는 무엇입니까?
성도가 바라 볼 목적지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시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치 독일의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싸우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는 감옥 속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내면을 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안식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리스도안에 평온히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움직여 가시는 전능자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풍 중에 여호와께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우리 모두는 마침내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시편 107편은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묘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런 고통에 대한 묘사는 이런 고통에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고통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매 단락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8절,15절,21절,31절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감지하셨습니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몇 주 전 설교에서 암과의 투병 중에 고통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한 자매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에서 그리고 동료 암 환자들을 찾아 전도하며 찬양으로 봉사하겠다는 이 메일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이 자매가 너무 빠른 기도응답의 소식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병원에서 오늘 저는 완치 진단(명령)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암 균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기적을 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저에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주신 그분, 그분을 찬양하옵고, 그 주님의 맘에 쏙 드는 삶을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21세기 과학의 세기에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바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혹시 광풍과 파도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분들에게 이 폭풍의 계절에 시인 이 해인님의 “바다여 당신은”이라는 시를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은 건/
가슴을 뒤흔들고 가버린/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한 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목쉰 바람소리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빛을 잃어버린/사랑의 어둠(때문이다.)--
죄스럽게 비좁은 나의 가슴을/
커다란 웃음으로 용서하는 바다여/
저 안개 걷힌 산에서 어둠을 걷고/
오늘도 나에게 노래를 다오.
[마지막 문단]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행복한 작은 배/
이글거리는 태양을/
산 같은 파도를/기다리는 내 가슴에/
불 지르는 바다여/
폭풍을 뚫고 가게 해다오/
돛폭이 찢기 워도 떠나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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