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영선목사

[스크랩] 갈라다아서(11)에서 본 율법과 은혜의 관계

(갈 3:15-22 )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복음의 진정한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교회를 가능케 했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능케 했다는 것을 기억하여 다른 것으로 근거를 만들려고 하지마라.. 그것이 할례든지 또는 다른 어떤 종교성이든지 명분이더라도 십자가를 약화시키거나 무효화시키는 것은 복음과 다른 것이다.
우리가 갈라디아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으라 라고 맹렬하게 공격을 하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가르침앞에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예술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어려운 율법과 은혜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여러분 율법과 은혜 이렇게해서 이해가 빨리 안되면 도덕과 은혜 이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이해가 도덕과 은혜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이해하면 오히려 이해가 빠를줄로 압니다. 15절이후에서 말하는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창세기 13장으로 찾아가봐야 지금 이 16절을 이해합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고 바다의 모래같게 하겠다, 또는 지금 이 창세기13장 표현으로는 땅의 티끌같게 하겠다, 무수히 많게 하겠다라는 약속을 만납니다. 당연히 많은 자손이 약속되어 있으니까 네자손에게 주리니라는 15절 말씀  16절에 네 자손이라는 표현이 당연히 복수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거죠. 네 자손들이 이렇게 많으리라.. 그러나 원문에는 이것이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 네 자손..
이 자손이 단수로 나와 있어서 지금 읽은 갈3장 16절에서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냐하면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르켜 복수로 그 자손들이라 하지아니하시고 단수로 오직 한사람을 가르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는 약속,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한다, 너로 많은 조상의 아비가 되게 한다, 너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다, 를 우리 지난주에 확인했던 이 내용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허락된 약속이니라,  하는 얘기입니다. 17절까지 마저보고 이 서두 얘기를 마무리를 하죠.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다... 우리 지난 주에 했던 것 잠깐 기억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식으로 부르는 자의 대표자가 된다, 아브라함식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한 근거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작정으로 불러낸 자들의 대표자,  모범사례입니다.  아브라함같이 부를 자는  땅의 티끌같이 많을 것이며 하늘의 별같이 많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지금 본문에서 하는 얘기는, 지난 주에 하려는 얘기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무슨 자격과 근거보다 우위에 있다,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작정에 있다에 확인했다면,  오늘 사도바울이 확인하려는 것은 율법이 생기기 전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조건을 만들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기전에, 아무런 조건도 만들수 없는 때에 이미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러 율법이라는 것을 주기전에 약속이 먼저 있으므로써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가 하나님의 기쁘하신 신적 의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하는 것입니다. 그까 이 15절에서 17절까지 핵심의 두 얘기는 약속이 우리의 행위적 근거보다  우선하며,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고 있고 그리스도로써 성취되고 완성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약속과 그리스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확인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우선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되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하는 사실에서 더욱 더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죽어서 해결할 문제도 아니며, 성자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며, 그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어    부활 생명이, 구원이, 영생이 주어졌다를 확인합니다.  

그럼 오늘 확인하려는 것은 무어냐, 그럼 율법은 무어냐 하는 것이죠. 서두에 얘기한대로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조금 바꾸면 도덕은 뭐냐,  사실은 율법은 도덕보다 큰겁니다. 도덕은 조금더 차원이 심성적인데로 국한 시키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모든 원인 결과의 법칙을 가능케하는 인간 행위를 말합니다. 그기에 도덕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좋기위해서 제가 도덕이라는 단어를 자꾸 교차적으로 쓸 겁니다. 그럼 율법은 뭐냐, 19절에 동일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4)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다 작정했고 은혜로 말미암고 예수 안에서 될 것이라면, 율법은 도대체 왜 줬냐! 우린 즉각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는 거라면 도덕성이 왜 필요하냐! 이렇게 우리가 물을 수 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을, 자격을,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도덕이 왜 필요하냐,,, 능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 되죠.    
"19, 그런 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을 준 이유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든 사람을 죄아래 가두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성립시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율법이 옴으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부각시키며, 은혜로만 우리 모두를 몰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다른데로 촛점이 흐려지거나,  다른 데 겻길로 새는 것을 막게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를 죄아래 가두고 묶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랍니다. 척 이해가 안가는 놀라운 말씀인데, 율법은 은혜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우리로 몰기위하여 준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가시죠.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율법이 하는일이 뭐냐하면 모두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살 길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아니 살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 시키는 것입니다. 살 길이 없어서 절망 가운데 은혜를 구하는데로 우리를 몹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러 구원의 방도중에 더 나은 방도가 아니라, 유일한 길! 유일한 길도 사실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기적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하는 것이 율법의 임무입니다 !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두 스스로에게 답이 없다는 것! 스스로에게 구원하고 해결을 줄 무슨 방도가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확인 시킵니다.  
아! 나는 죽게 되었도다, 오호라 나는 죄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고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도덕이 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도덕성을 추구해 보시면, 도덕성은 그것을 완전히 추구하지 못하는 요구까지 하고 있습니다.  
도덕성이란건 결국 심성이 완전해져야 되는 것인데, 심성이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그걸 가리고 숨길 수는 있습니다. 도덕을 실천해 보신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 20절의 이 율법이 행하는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육체를 정죄하여 절망 가운데 가둔 다음에야 비로소 십자가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외에 나타난 의 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율법의 의와 다릅니다. 다르다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는  사실은 부족합니다. 우리는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그 한계를 벗어난, 즉 기적의 길을 여셨다.  그것이 십자가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벗어나면 여러분은 절망과 파멸외에 다른 것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중립지대에 있지 않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하면 기독교와 상대적으로 우월한 종교라는 그런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 삽니다. 같은 종교끼리 왜 배척하며 편협하게 굴며 핍박하는가, 옹졸하지 않은가, 어떻게 당신네들만 옳단 말인가,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라는 공격을 기독교가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인간은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답이 없다는 것을 다른 모든 종교에서 확인 하셔야 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증상을 잠깐 가려주거나, 잠깐 우리를 환상속으로 인도하여 현실을 잊게, 자신을 잊게해 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장 놀라는 일이 뭐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데에 예수 믿는자에 혼돈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면 늘 화평하고 확신에 차고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약속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예수 안으로 돌아오라! 예수 밖에는 방법이, 구원의 길이 없다 라고 다시 말하여 우리를 예수 안으로 붙잡아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마져도 자신의 근거로 삼을 때, (아 말이 조금 애매해졌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내가 가진 무기로 생각하여 근거로 삼을 때, 인과의 법칙으로 사용하면 우리는 신앙에서 곧 떨어집니다.  나중에 오늘 결론부분에서 확인하겠습니다만, 성경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언제나 사실 늘 그렇게 분명하고 확신에 차고 안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 자신에게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는 구세주입니다.
구세주라는 제 3자를 믿어야됩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언제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죄인인 나! 인간의 한계속에 있는 나! 늘 죄악으로 달려가는 나, 라는 것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무슨 죄의 뿌리를 못 뽑았다던가, 신앙의 어떤 경지에 이르지못했다 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늘 죄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지,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 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자랑으로 마져도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죄인 된 확인! 그 절망에서는 벗어나겠죠.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우리를 절망고백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확인아래 나를 붙잡게 했다고해서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이 되질 않습니다.  여러분 다 경험하시잖아요. 천사가 되질 않습니다. 소위 한단계 낮추어서 성자가 되지도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많이 고민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그게 바로 오늘 이 본문에 위력이 있습니다. 아! 이게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간다고요? 예수께로 몰고 갑니다. 예수가 없다면 방법이 없구나!  예수가 나를 위해서도 죽었단 말이냐!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더란 말이냐! 그가 사망권세를 이겼더란 말이냐! 그가 나를 위하여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었더란 말이냐! ...이걸 자꾸 되뇌어야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 5장 8절에서 보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란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믿음의 결과가 아닙니다!    
제가 쓰는 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조금 그...지금 쓰는 표현과 평소에 우리 쓰는 표현하고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구별을 하려고하는 겁니다. 어떤 구별, 그것이 율법적 차원, 종교성의 차원으로써의 근거가 되지 마십시요.
근거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할때는 지난 주에 아브라함의 사건과 연결해서 내가 붙잡은 예수가 아니라, 나를 붙잡은 예수 입니다. 그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것은  사랑은 조건이 없는 것이다! 이유가 없는 것이다를 확증했다는 뜻이 됩니다!
내가 예수 믿지않을 때, 하나님을 찾지않을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 구원이 전혀 하나님 쪽에 근거되어 있고, 작정에 근거되어 있고, 그때에 실현되었다, 라는 것을 확증하시란 말이죠. 그거 이 로마서3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은 그 이후에 나오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정죄, 율법으로 말미암는 절망,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소망, 약속들이 전부 예수그리스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전부 합쳐져 갑니다.  
21절부터 다시 보시죠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예수로 말미암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데, 이때 말하는 믿음은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제가 차별했죠. 우리가 내민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은 손으로써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하는 일이 뭐라고요? 우리를 예수없으면 방법이  없는 자리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와 예수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만 우리를 몰고 가는데, 율법의 역할이 있습니다.
법법함으로 인하여 더하는 것,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준 것입니다. 죄를 지을지 말지에 놓여있는 중립지대에서 율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준 것입니다. 뭘 할려고... 네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라고 준 잣대이지, 율법을 주어 지키나 못지키나 보자고 준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죠.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는 것이라,,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죄를 짓고, 이미 한번 죄를 지으면 죄인인데 거기다 율법을 줌으로써,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본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주었지, 죄를 고치라고 준게 아니라니까, 이미 죄는 지었다니까, 범법함을 인하여 죄를 지었기때문에 준거라고요. 아직 짓기전에 준것이 아니라, (아 이거 뭐 별로 감동이 없는 얼굴들로 하고 계신데...)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아까도 잠시 지나치면서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신앙을 점검할 때마다 사실은 이 문제에 걸리실 것입니다. 내가 신앙인이 맞나, 나는 왜 맨날 이꼴인가, 여러분 그거 나는 왜 이꼴인가 라고 회개해야 옳습니다. 그건 나중에 또 살펴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믿어야하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건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조건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우리안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는 무효화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원의 근거를 만들 수있다면 십자가는 무효화 됩니다.  
그래서 은혜와 율법의 관계가 무어냐, 은혜가 율법에서 출발한 것 아니다 이거죠. 율법이 은혜를 만들지않았다, 그말은 이해하시겠죠? 은혜가 먼저 왔죠. 율법이 먼저 온게 아니라, 그말은 뭔가하면 율법은 은혜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율법이 회개를 만들어 내거나, 율법이 소망을 만들어 내거나, 율법이 우리를 사죄케 하는것 아닙니다.
율법은 은혜를 구하게 하죠. 도와 주십시요! 비명을 지르게 한단 말입니다. 답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비명을 질렀더니 도와주셨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문제이지, 비명이 구원을 일으킨 조건이 아닙니다.
나는 더 많이 울었기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울며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운 것이 조건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이있는 것은 우리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면,  마지막 22절에 (갈 3:22 )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그럽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율법의 역할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데 율법이 구원을 만들어내서 구원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시킴으로 우리를 은혜로 몹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로마서 6장으로 오면,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우리의 죽음이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완성되었다는 건 우리가 더이상 자신을 근거로하여 구원을 세우기로 하는데서 졸업했다 입니다.  성취해서 졸업했는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근거가 되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법아래로 불려온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근거를 가져야되는 인과의 법칙에서 모든 인류를  죽게 만들은 것입니다. 죽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유일한  자격, 조건, 이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되는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되는 새로운 이 인류를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혜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보다시피 이 로마서 6장이 얘기한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자고 그래서 12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은혜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는데 은혜는 율법을 세웁니다. 율법은 은혜와 대치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은혜를 반대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율법은 은혜로 우리를 내어 몹니다.  우리를 몽학선생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무엇때문에?  다른데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데 길이 없기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해답이라는것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율법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는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부 절망이라고 문을 닫아 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이루어지자,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할 수있느냐하면,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써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까 제가 이런 도덕과 대치해서, 대체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도덕을 자신안에 근거를 가지는 것으로 자신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나타나는 것은 정죄와 심판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려면,  율법적 시각이나 도덕적 시각에서는 자기의 옳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러한 율법의 그 요지를 만나는데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기를 어떤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고 할때 예수님께서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니라, 라고 슬퍼하십니다.
율법이 사랑으로 갑니다. 실제로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들어가 있지않으면 율법은 심판과 정죄의 역할이상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의를 이룰려고 할 때에는, 도덕은 나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정죄하게 만듭니다. 옳다는 것은 적극적인 방도가 없습니다. 율법적 차원에서의 옳은 것은 그르지 않는 것이다. 정직하다는 건 뭡니까?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더럽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적극적인 즉, 생명이 그 힘을 발합니다. 생명이 진리안에서 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입니다. 모든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요구가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의 당연한 실력으로 성취되고 책임되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의 도덕성은, 신자들의 종교성이라는 것은 예수안에 있는 거듭난 자의 다름입니다. 예수를 닮는 자의 다름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가고, 그것은 격려로 가고, 위로로 가고, 겸양으로 가고, 온유함으로 갑니다. 그러아 그렇지않으면 율법은 곧 자신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갑니다. 우리는 율법이 그런 차원에서 은혜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은혜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은혜가 율법을 완성시키지, 율법이 은혜를 성취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절대 은혜와 반대되지 않아서, 무엇이 종속된다는 것은 무엇이 앞서 나오고 뒤따라 나온다는 뜻이지, 무엇을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율법은 아까 로마서 3장 끝절에 가면 이렇게 나옵니다.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이란 뭘까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몽학선생이란 관리인이란 뜻입니다. 그가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주인이 아닙니다. 관리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외에 어떤 답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없이 도덕을 종교를 율법을 가지게 될 때는  정죄이외에 쓸 기능이 없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안에서도 율법을 어느 차원에서 쓰냐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판별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심판과 정죄를 하는 것이냐 라고 물으십시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정의들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사랑은 성내지않고 사랑은 무례이 행치않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며 바라며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리스도없이 등장을 하면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지죠.  사랑은 보십시요. 완전한 차원이 아니고 완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완성을!  어떤 차원에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를 근거로 하여 나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다루시기를  기다리고 넘겨주는 그것이 사랑이죠. 그러나 율법은 지금 당장 정죄합니다.  지금 당장 옳지 않으면, 지금 당장 정직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어느만큼의 실력이 없다면, 지금 처형하는 것입니다.  비교하십시요.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 자신에게 점검하라 이거죠. 뭘 점검하라? 여러분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요. 회개는 아무리해도 옳은 것이지만,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란 정당한 회개보다 이런 자책의 회개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내려다보고 여러분 신앙을 점검해서 떳떳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양심과 여러분 종교적 기대에 여러분이 만족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참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비록 비록 모자라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무엇인들 못해 주시랴 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십시요. 그리하면 여러분의 표정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실 것입니다. 늘 매주에 이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표정이 나쁘십니다. 날이 추워서 그런줄은 알고 있지만 이 예수 믿는데 표정이 나쁘다는 건 큰 약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근심이 있으십니다. 늘 나자신에 대해서 불만입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자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이 한번 점검해 보셔야할 내용입니다. 내 근심은 내 율법적 의를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인가, 예수안에서 허락된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이 의심이 나올 수 있는가, 한번 여러분 오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셔야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를 보내셨다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의 크기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표정이 변하시고 여러분의 신자된 인생에 대하여 긍정하시게 됩니다. 믿음의 승리라는 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십시요. 웃으십시요.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을 십자가로 바라보십시요. 그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사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십자가의 큰 비밀이, 신비와 능력과 소망이 오늘의 말씀으로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은 그 위대하심과 그 자비로우심과 그 신실하심은 시간을 더할수록 말씀을 더할수록 예수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수록,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의 신앙에 실패할수록  깊이 더높이 더놀랍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마땅한 믿음의  평안과 확신과 자랑과 인내와 충성과 기다림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를 승리하지않고 하나님께서 예수안에서 승리하신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지금을 나의 형편을 기다리며 믿음가운데서 주의 기적을 간섭을 충만한 승리를 기다릴 수 있는 믿음에 인내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글쓴이 : 자료바구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