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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날마다 기막힌 새벽6. - 김동호 목사

 

 

 날마다 기막힌 새벽6. - 김동호 목사

 

 선지자의 상
폐암으로 고생을 하는 교인이 있어서 병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산소 호흡기를 껴야만 호흡을 할 수 있었고 진통제를 맞아야만 겨우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잘 수 있는 아주 힘들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린 후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교우는 담임목사가 예기치도 않은 상황에서 심방을 왔다고 얼마나 반가워하고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며칠이 지나 여전도사님이 그 교인을 심방하고 돌아와 내가 심방하고 온 후에 얼마나 상태가 좋아졌는지 모른다며 그 교인이 기뻐하고 감사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었습니다.
작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일 에 아주 열심인 분의 친정 어머니께서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5년 전에도 간경화와 당뇨로 사경을 헤매다가 약사인 딸의 정성으로 기적적으로 회복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다시 상태가 나빠지셔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습니다.
5년 전에도 거의 회복의 가망이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시자 모두들 이번이야말로 어머님이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그분은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대까지 이르게 되었고 결국은 가족들이 임종을 위하여 모여 오게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혼수상태가 빠지셨던 권사님이 아침에 의식이 돌아오셨으니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여 있는 병실에 도착했을 때 권사님의 딸이 ‘어머니, 어머니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목사님 오셨어요.’하며 권사님을 깨웠습니다.
그 말에 권사님은 눈을 뜨셨고 힘이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임종예배라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나 가족 그리고 본인까지도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예배 후에 권사님이 회복하셔서 퇴원하게 된 것입니다. 권사님의 퇴원으로 입원하고 계셨던 한양대 병원이 떠들썩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말 누가 봐도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권사님은 요즘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전과 같이 교회에 나오시며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 일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사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연장 받았고 앞에 이야기한 교인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상태가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권사님과 교인이 담임목사인 나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내가 병원에 심방을 갔을 때 정말 예수님이 오신 것만큼이나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평범한 예배를 평범하지 않은 은혜 충만한 예매로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믿음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었습니다.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목회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여 각별히 섬기고 모셨습니다. 또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내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그 말이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아는 생각을 이제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이제까지 부모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말을 쑥스러워서 거의 한 번도 제대로 한 일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교인들에게 보통 부흥사들이 잘 이야기하듯이 주의 종(여기서는 특별히 목회자를 의미합니다.)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거의 한일이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다가 실족하고 잘못될 목회자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더욱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서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부모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자식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맥락에서 나는 교인들에게 교인들 자신을 위하여 목회자를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하여도 목회자를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섬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아무런 은혜와 감동이 없습니다. 목회자의 설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자세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목회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아끼는 교인들이 받는 상과 복을 압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남보다 갑절이나 큰 은혜를 받고 똑같은 심방을 받아도 남들에게는 별 큰 효과가 없는데 저들에게는 병세가 역전되리만큼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상인 것입니다.
보통 교회의 강단에는 중심이 되는 의자가 있습니다. 상석으로 보통 담임목사가 앉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그것이 담임목사의 권위로 앉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권위로 앉는 자리이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목사님이든 전도사님이든 누구든지 그날 설교를 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도록 하였습니다. 담임목사가 강단에 함께 올라갈 때에도 담임목사는 옆자리에 앉고 설교를 하시는 전도사님은 가운데 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귀해서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을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일만을 위하여 헌신한 것이 귀해서 섬기라는 것이요 그가 전하는 말씀과 사역이 귀함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귀히 여기고 섬기는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때문에 사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자신 때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요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예수님 때문에 존경을 받고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늘 겸손하여야 하며 함부로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귀해서 그것을 경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의 근원과 나그네 대접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축복해 주시면서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사람! 그것은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의 근원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대로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그 크고 놀라운 삶을 살게 된 첫 출발이 궁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일부터 시작하여 결국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일을 찾으면 나도 복의 근원이 되는 복된 삶의 실마리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읽다가 나는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알아보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땅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아브라함이 저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나그네로만 생각하였고 오랜 여행 중에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까를 생각하여 저들을 잠시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쉬게 하고 대접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물을 떠다가 저들의 발을 씻어주었고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대접하고 섬기려는 마음의 진심이 바로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의 첫 실마리가 된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정말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고 섬기는 마음을 갖고 산다면 결국은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는 삶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장로교에서 훌륭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농촌에서 목회를 하실 때의 이야기인 듯한데 아주 가난한 할머니 한 분이 무더운 여름날 음료수 한 병을 사 들고 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정말 음료수 한 병도 살 여유가 없는 분이었기에 경위를 물으니 20여 리가 넘는 곳을 다녀오시면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오시고는 그 돈으로 그 음료수를 사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목사님을 위해서라면 내 살을 베어 대접을 해도 시원치 않은데 무더운 여름철에 물 한 잔이라도 시원하게 드시라고 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때 그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음료수 한 병이 그 교단에서 그토록 걸출한 목회자 한 사람을 배출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그네의 주의 일꾼들을 대접하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교회 건축 현장에서 일하시는 일꾼들에게 점심을 한번 대접하던가 아니면 낮에 아이스크림 하나라도 사서 돌리시라.
주일날 교회에서 하루 종일 차량 안내를 하시는 분들과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원들에게 또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에게 음료수 한 병이라도 사드리며 수고하신다고 격려해 보시라.
그 설교는 당장 효과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날 공사 현장에 떡을 해 온 집사님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수박을 사오고 또 어떤 분은 얼음과자를 사오셨습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분들이 아마 이게 웬일인가 놀라셨을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와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사람을 대접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결국 나라와 민족까지 촉복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를 가까이하면
어제 저녁 우리 교회 장로님의 손자 돌 감사예배에 참여하여 함께 예배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인공인 장로님의 손자 아이가 계속 칭얼대고 우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류를 알고 보니 엄마가 돌 준비를 하고 손님들을 대접하며 아이 옷을 입히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젖먹일 시간을 넘겼던 것입니다.
아이에게 젖병을 물려주니 그때에야 울음을 멈추었고 젖을 다 먹고 나더니 웃기도 하고 잘 놀았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마치 저와 같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어린아이같이 징징거리고 칭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편하고 늘 짜증스럽고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배가고프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럽고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사람들이 다 싸움 닭(?)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싸우려고 깃털을 세운 닭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해봐라 사생결단을 하고서 하고 혼을 내주리라. ’마치 그와 같은 결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들이 세상에도, 가정에도,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기 때문에 삶이 그토록 곤고하고 피곤하며 짜증스럽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숨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저들이 다 영적으로 배가 고프다는데 있습니다.
옳고 그른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영적인 양식으로 배를 불리면 대부분의 문제는 정말 씻은 듯 없어지고 해결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문제 그리고 가정과 교회 안의 대부분의 문제는 영적인 배부름으로만 해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장과 가정 그리고 교회 안에 그와 같이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먼저 은혜 충만한 생활로 내 영적인 배가 부른가 아니면 은혜를 상실한 생활로 영적인 배가 고픈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를 가까이 하면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함을 얻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를 멀리하게 되면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이 어두워 세상에 취하여 살게 되는데 거기에는 만족함이 없기에 결국 배고픈 자가 되어 사사건건 문제가 일어나고 피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김원식은 그의 ‘병동의 그리스도’라는 시에서 “빈 잔에 소주를 채워도/철철 넘치게 다시 채워도/잔은 여전히 빈 잔이다”하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채워도 채워도 빈 잔이지만 때문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지만 하나님은 참 우리의 빵이요 음료로서 먹으면 배부르고 마시면 다시는 갈함이 없는 시원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를 가까이 하십시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 짐을 지는 것같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를 가까이하기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하면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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