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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날마다 기막힌 새벽3. - 김동호 목사

 

  

 

 날마다 기막힌 새벽3. - 김동호 목사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욥기에 보면 욥기 세 친구들이 욥에게 권면하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그 말씀들은 욥에게 꼭 맞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욥을 오히려 억울하게 하는 말도 있어서 욥에게 권면도 되지 못하고 위로도 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후에 하나님께 책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잘 맞지 않는 말씀을 열 장에 걸쳐서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는 꼭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말씀을 오늘 읽는 우리에게는 꼭 맞는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과 같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욥의 세친구들의 말을 읽으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은 욥기 15장의 말씀이데 그 중에 2절 말씀과 11절절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2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11절)
살다 보면 동풍이 부는 때도 있고 남풍이 부는 때도 있습니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프고 괴로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동풍이 불 때도 있고 슬프고 괴로운 때도 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남풍과 기쁨은 당연한 것으로 흘려 보내고 쓸데없는 동풍과 슬픔 그리고 괴로움을 우리의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 다투고 싸울 때보다 서로 사랑하며 좋은 마음으로 살 때가 훨씬더 많은 법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다투고 싸우는 것이며 그럴 때에 가끔씩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평소에 문제없이 잘 살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다 흘려 버리고 어쩌다 싸울 때 받은 상처는 잊지 않고 품고 쌓아 두어 평생을 기억하며 필요할 때마다(?)그것을 끄집어내며 불행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동풍을 품지 말고 남풍을 품어야만 합니다. 슬픔과 괴로움을 기억하지 말고 기쁨과 즐거움을 기억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이 들어 있는 광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광석에는 금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실 돌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석을 부수어서 돌은 다내어버리고 속에 들어 있는 금만 캐내어 가집니다.
설교에도 금이 있고 돌이 있습니다. 설교는 아무래도 사람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돌과 같은 말도 섞이게 마련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설교에 금보다 돌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 속에서 금을 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설교 속에서 돌을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설교 속에 있는 돌은 다 내어버립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금은 놓치지 않고 다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여 마음과 삶 속에 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계속될 때 그는 금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풍을 품고 사는 것은 우리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입니다. 금을 놓치고 돌을 품고 사는 것은 우리의 참으로 치명적이 어리석음입니다. 남풍을 품읍시다. 돌을 놓고 금을 취하는 사람이 됩시다. 동풍과 돌로 가난한 사람이 되지 말고 남풍과 금으로 부유한 사람이 됩시다.
요즘 미국 NBA농구에 매직 존슨이 복귀를 하여 경기를 펼치는데 그의 경기를 보면 마술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묘기 중에 다른 곳을 보면서 자기 팀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노 ? 패스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수비하는 선수들이 속게 마련입니다. 그런 패스는 정말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라는 것은 매직 존슨의 패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보지도 않고 던진 공인데 그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서 득점으로 연결하는 선수들입니다. 어떻게 그런 경기가 가능합니까? 농구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언제 자기에게 공이 패스되어도 그것을 처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와 같아야만 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금과 같은 은혜의 말씀을 주셔도 놓치지 않을 영적인 운동선수가 되어야만 합니다.
멍청하니 있다가 금과 같은 말씀은 작게 여기고 사람이 준 상처와 섭섭함은 크게 여겨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은 품지 아니하고 사람의 미움과 시기만을 가슴에 품고 괴로워하는 일에서 이제는 풀려나야만 합니다. 동풍은 내어버리고 남풍은 품어야만 합니다. 상처는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품어야만 합니다.


지난 주 부목사님의 주일 저녁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하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가시 같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을 강권하였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나를 강권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로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섭섭함과 상처가 나의 삶을 강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탄에게 속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하여 주신 오늘의 말씀.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올곧은 사람의 약점
어느 새벽기도회 때 욥기 9장을 설교하다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욥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에는 사탄의 의도도 물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사탄 앞에서 하나님의 칭찬하실 만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려고 힘쓰는 사람의 보편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하면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자기를 과신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그와 같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욥기 40장 14절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마음 한구석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지면 믿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욥에게도 그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믿음의 결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풀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이 고난 속에 내가 이해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게 되고 그것을 믿으면 결국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실제로 욥은 욥기 9장 22절에서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신이 고난 당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본시 사람을 싫어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잘못된 생각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극치는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벌 주시면서도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시지 비웃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욥은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욥과 다윗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에는 좀 문제가 있지만 억지로 비교한다면 욥은 의의 사람이요,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사건도 있고 해서 그의 마음속에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의에 사로잡혀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사로잡혀 산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의로운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의가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나와 교회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우리만큼 큰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잘 해결해 주셔서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문제와 고통의 중요한 원인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정직하고 반듯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축에 속합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생각을 중히 여겨서 나름대로 창조적인 일들을 실천하여 조금씩이지만 교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강의와 집회를 요청 받아 제법 분주한 삶을 살게 되었으며 나와 교회의 일이 교계의 잡지에 특집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아직 초년병이지만 유명인사의 반열(?)에 들어선 느낌을 요즘 갖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나 자신이 제법 목회를 잘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평소 가까이 지내는 목사들이 나를 ‘목회 9단’이라고 추켜준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목회 9단’, 그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이 자고할까 염려하셔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자기 의에 빠져 자고할까봐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에게도 자고할 때 고난이 추를 달아매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시편 7편을 설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도 나에게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편 7편은 다윗이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베냐민 사람 구시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다윗이 구시 정도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다윗은 시편 7편 1절과 2절에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골리앗이었다면 모를까 구시 정도도를 가지고 천하의 다윗이 그렇게까지 기도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윗이 전적으로 자기를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상대가 골리앗이든 구시이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의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는 구시에게도 찢기고 뜯길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요즈음 욥과 같이 스스로 자기의 의에 사로 잠혀 자기를 과신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것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와 교회가 시험에 빠졌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어제 안산 동산 교회에서 시무 하시는 김인중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복음적인 열정과 충성에 비해 나의 목회생활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한지요.


욥기를 통하여 그리고 시편 7편을 통하여 그리고 김인중 목사님의 ‘나는 행복한 전도자’라는 책을 통하여 그리고 그동안의 고난과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의 근본적인 삶과 신앙 그리고 목회의 문제점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자고하지 말아라!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나님,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게 하시고 오늘의 깨달음으로 복된 신앙생활과 목회생활이 열리고 이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괴로운 대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오늘 새벽에 읽은 욥기 10장 1절을 통하여 나는 나의 인생과 일생을 바꿀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욥은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욥 10:1)고 말합니다. 욥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욥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깨달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욥기 10장 1절의 말씀이 반대로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그 말씀은 ‘나의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여도 내 원동함을 발설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지 아니하리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원통함을 발설하고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을 하게 될 때 두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첫째로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고, 둘째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의롭게 살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게 되자 그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 원통함과 괴로움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까지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력이 없어져 그가 생각하는 것은 ‘죽음’뿐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생각에까지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 영혼이 곤비한 일을 만났을 때 사람에게 우리의 원통함을 발설하는 것을 삼가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통함을 사람에게 발설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발설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주신 찬송은 484장입니다.
1.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 와라
2.눈물 나며 깊은 한숨쉴 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은밀한 죄 네게 있더라도 주 예수께 아뢰라
3.괴로움과 두렴 있을 때에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
4.죽음 앞에 겁을 내는 자여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하늘나라 바라보는 자여 주 예수께 아뢰라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

원통함은 하나님께만 발설하고 아뢰어야 합니다. 원통함을 사람에게 발설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발설한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일입니까?
뿐만 아니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하면 반드시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상한 마음과 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풀고 말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연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풀 수도 없고 누가 풀어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찍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작든 크든 하나님만이 푸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기도 중에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문제를 푼 후에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말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까?

욥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내 삶의 관심도 ‘의’에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교통신호도 한 번 어기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삶의 장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누구보다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며 그것을 원통해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고 분노로 이야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곤 하였습니다. 최근에 당한 어려운 문제도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내 영혼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살기에 곤비한 일을 만나도 나의 원통함을 사람에게 발설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아뢰며, 마음의 괴로움을 품고 말하지 아니하고 믿음 중에 소망을 품고 사람으로 말하여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오나 하나님은 가능하시오니 그리고 하나님 제가 진심으로 원하오니 그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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