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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의 복 마가복음1:29-31

사역자의 복           마가복음1:29-31


I. 성경의 치유 이적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본문은 짤막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이 주는 여러가지 교훈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21번째 시간 「사역자의 복」입니다.


  4복음서에 37개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마가복음”에 18가지 정도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만도 5가지 이적이 언급되어집니다.


A. Richadson의 연구에 의하면 마가복음 1장부터 10장까지 예수님 공생애를 다룬 내용이 422절 이 나타나는데 그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200절 정도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 이적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치유사역을 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교회가 목양사역의 일환으로 치유사역을 하는 것이 과연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Yes 그렇습니다. 교회의 치유사역은 현대교회가 행하고 있는 그 어떤 사역보다 충분한 그리고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배하는 그 예배의 순서들보다 더 확실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심방, 성경공부, 심지어 제자훈련, 전도훈련 보다도 더 많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 외에도 충분한 현실적 이유가 있습니다.


  설날 아침 어머님께 세배를 드리고 나면 저희 어머님은 평생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올해도 하나님 은혜 많이 받아 온 식구 건강하거라.” 교인들로부터 기도제목을 받아 보면 가장 많은 기도제목이 치유 즉 건강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사역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소홀히 여기고 제일 자신 없어 하는 사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특정교단이나 부흥사들의 별난사역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치유사역을 하는 사람이나 교회를 비정상으로 여기고, 치유사역을 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을 정상으로 여기는 비성경적인 생각들이 퍼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오랫동안 이런 생각과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사역에 대해 무지한 가운데 사탄은 많은 질병에 밝아 질병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질병은 사탄이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큰 무기입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들이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정글에 묻어둡니다. 지나가다가 한 사람이 찔리면 두 사람이 부축을 하게 되지요, 후방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앞뒤에서 경계를 섭니다. 그러다 보면 찔린 사람까지 5명이 Out 됩니다. 한 사람이 소중했던 정글전에서 베트공의 쇠꼬챙이 작전은 유효했습니다.


  모든 병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처럼 사탄은 질병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력화시킵니다. 한 사람만 잘 공격하면 몇 사람의 손발을 묶어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공격이나 죄로 인한 질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인한 질병이 있습니다. 공해, 농약 - 자연의 파괴로 인해 생기는 질병입니다. 혈통, 유전적 질병이 있습니다. 상처나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도 있습니다.


  병원을 찾는 환자의 3분의 2가 스트레스와 관련된 증세라는 것입니다. 이 스트레스는 미국의 6대 사망의 원인인 심장 질환, 암폐 질환, 간경화, 자살, 사고 등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스트레스는 흔히 쇼크를 당할 때 생기는 병인데 그 중에서도 배우자의 사망이 1백점, 이혼이 73점, 별거가 65점, 가족의 죽음이 63점, 또 모든 불평, 원망, 분노 이런 것들을 총 합산하여 약 3백점이 넘게 되면 그때는 아주 심각한 질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오늘날 병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의학도 발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은총이라 할 수 있는 병원, 약국, 인간의 경험이나 지혜를 통해서도 치유하십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배와 성례전 그리고 개인기도, 소그룹 기도를 통해서도 병든자가 고침을 받았고 귀신 들린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은사 중 병고침의 은사, 믿음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등등 많이 있습니다. 치유와 관련된 은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 은사자들을 통한 치유의 역사들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목사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즉 교회의 어른 - 목사, 장로님들을 통한 치유가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믿는 자는 치유사역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아버지로 모시고 나면 예수 믿은 1초후부터 우리에겐 이런 권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요14:12)


  그동안 한국교회의 치유사역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치유사역에 마음을 닫기까지 그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① 치유사역이 몇몇 은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기 과시처럼 시행되어 왔습니다.

  신유의 종, 신유집회 하면 대개 조금 이상한 사람이 하는 이상한 집회가 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요즘은 이러한 집회들마저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② 치유방법이 너무 비성경적이었습니다.

  손톱으로 상처를 할퀴고 안찰 한다고 두들겨 패다가 사람이 죽지를 않나?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눈을 상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치유사역을 이상 행동 내지는 미신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 밖에요. 성경 어디에 두들겨 팬즉 나으니라. 손가락으로 눈을 찌른즉 나으리라는 말이 있습니까?


 ③ 치유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영광을 받거나 댓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신유 사역자들은 무리한 댓가까지 요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치유사역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어떤 보상도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치유사역자들 돈 받으면 안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④ 즉, 치유사역을 교회 밖에 있는 한수 낮은 사람들의 일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복음적이고 전통적인 사역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교회들이 치유사역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한국교회가 가진 불행한 경험들이었습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


  이제 성경적으로 치유사역이 제대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할 때입니다.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야훼 라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훼 라파 - 하나님은 치유자체이십니다. 교회는 치료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찌르고 상처 내고 죽이고 파괴하는 공동체로, 사람들로 전락했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 셋 즉, 이 땅에 있는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역 셋이 있습니다. 이것을 삼중사역이라고 합니다.  ① 가르치는 사역   ②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③ 병을 고치는 사역입니다.


* 하나님이 치유자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 보면 마귀가 하는 일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확실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건강을 빼앗으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집안에 중병환자 한 사람만 있으면 온 식구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

  마9:35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 나아가 성령님 역시 치유자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강력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의 보혈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치유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치유사역은 분명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시기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행4: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사도들이 행하는 치유사역에 충격을 받은 교권주의자들은 이 사역을 못하게 하려고 제자들을 비난하고 이 치유사역을 폄하해 보려고 몸부림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결단코 중단시킬 수도 중단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요14:12 “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할렐루야!


* 구속 사역 한 가운데 있는 치유 사역


  우리가 치유사역을 소중히 여기고 능력 있게 감당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치유사역은 구속사역의 중심에 있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총체적인 구원이십니다. 죄와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미래에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구원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능력 가운데 치유사역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건 속에 치유사역이 분명히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치유를 하시면서 구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자신의 고난이 치유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 가운데 놀랍게도 치유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여러분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고 치유의 권세가 있습니다. 마음 아프고 몸이 병들 때 마다 여러분 치유의 권세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웃들을 치유하시길 바랍니다. 교회는 치유공동체입니다. 당연히 가정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치유의 사역자로 살아가십시오.


  “병든 자를 고치라”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치유 사역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이 없어도 기도하니까 안 나아도 하기 싫어도 할 줄 몰라도 우리가 순종하면 우리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치유는 일어납니다. 회복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몸은 건강해 집니다. 질병은 물러갑니다. 유혹과 귀신은 사라집니다. 가정은 새롭게 세워집니다. 공동체는 건강해 집니다.


II. 안식일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시고 열병 든 장모를 고치신 이 이적은 안식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안식일이 무엇인가? 주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주일을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여하에 따라서 우리 믿음이 성장할 수도 있고 믿음이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에서 한 가지만 남기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것.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금년 송구영신 예배때 금년 묵상 말씀으로 내게 주신 묵상의 말씀은 시편 84편 10절 말씀입니다. 시편 84편 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다윗이 압살롬의 환란을 겪으며 피난을 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노래한 내용이 시편 84편입니다. 왕궁의 침실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고 산해진미 식탁을 추억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여인의 품을 그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 예배를 오직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귀하다고 얘기를 했고 장소적으로 보면 악인의 장막에서 임금노릇을 하는 것보다도 내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신앙인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언제나 신앙인 그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었고 하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나무의 뿌리와 같이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이고 전자기기의 배터리와 같이 우리 인생의 에너지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군도를 살펴보면 언제나 법궤를 중심으로 행진을 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등뒤에 언제나 법궤가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 가운데 법궤가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 앞장 서 법궤가 인도하는 믿음으로 광야를 여행했습니다. 진을 칠때에도 아무렇게나 진을 치는 것이 아니라 법궤를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12지파가 정확하게 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장에 다윗의 이런 마음, 이런 심장이 있습니까?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주의 성전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최근 이 소중한 주일 예배 신앙이 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예배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자세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걸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주일 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주일 예배를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고 그 부활을 기뻐하고 부활을 증거하는 날이었지요.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부활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주일은 언제나 작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신앙의 근본이 무너지면 그 어떤 것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일예배신앙이 많이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뿌리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구조가 너무 분주하고 복잡해져서 주일성수신앙을 제대로 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최근엔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성도들의 마음이 더욱 세상으로 치닫고만 있습니다. 현대 상대주의 가치관이 교회로 들어와서 ‘꼭 그렇게 목숨을 걸고 주일예배를 지켜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지요. ‘바쁘면 텔레비전을 통해서 설교 한번 들으면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을 어떻게 지냈을까요?”

제가 어릴 때를 기억해보면 어머님들 교회 집사님들이 일주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토요일 밤 늦게까지 타작하고 빨래하고 다리미질하고 주일날은 아침부터 바쁜 농번기에 깨끗이 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역시 자신의 소도 남의 집에 빌려주지 않습니다. 주일날은 소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은행이 별로 없어 돈이 낡고 구겨지고 때가 묻습니다. 돈을 물에 살살 헹구고 다리미질하고  빳빳하게 해서 성경책 속에 넣어 가더라구요.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보냈습니다. 요즘 이런 정성이 없어졌습니다. 100년동안 믿음의 선진들, 한국교회 교회는 예배를 이렇게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예배를 드리시고 말씀을 선포하신 다음 베드로의 집에 가서 병든 자를 심방하고 고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는데 이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주일을 지내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예배드릴 수 없는 병든 자, 병원을 심방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수 없는 믿음 약한 가정을 돌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할 때는 여전도회원들이 주일마다 전도지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전도회’입니다. 남선교회 역시 골목골목 다니면서 전도하는 계획을 하지 않는 남선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회’입니다. 이런 한국생활의 아름다운 전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침에는 모여서 말씀을 듣는 예배를 찬송하고 말씀을 듣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에 갔다가 다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다가 저녁에 모여 떡을 떼는 성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렇게 하기보다는 한번에 모여서 말씀 듣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비운 다음에 세례 받은 사람들만 남아서 성만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전통. 지금부터 20년전 복음이 전해진 다음에 100년동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신앙생활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심방하고 관리하고 저녁에 모여서 찬송과 임재가 있는 기도가 있는 말씀이 있는 저녁 찬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루생활의 매듭을 지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주일을 너무나 자유스럽게 생각는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의 안식일로, 구약의 안식일 정신이 그대로 주일 안에 남아 있어야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전통·장로교 전통이 안식일의 정신과 의미를 가진 모형은 폐지되었지만 그 정신과 의미의 본질 자체는 오늘의 주일 안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어야 될 것을 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성수 주일 그랬을 때에 주일은 어떤 날인가? “그치는 날”입니다. 중지하는 날입니다. 히브리어로 안식 - “사바트”라는 것은 “그치다, 중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일을 중지하는 날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고 주일날 세상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 우리를 속입니다. 더 많이 가지면 너는 하나님 같이 된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따 먹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 맡겨 보아서 하나님 주일날 장사를 하면 내가 더 많이 벌고 더 부자가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내가 주일날 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으로 먹고 살기로 믿겠습니다. 고백하는 날이 주일날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 행위를 중지해라. 사고 팔지를 말아라. 오히려 일주일간 얻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이고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에 집중하는 것, 세상일에서 6일 동안 하던 일을 그친다. 중지한다. 이것이 바로 주일신앙, 성수주일 신앙의 첫 번째 고백입니다.


 2) 성수 주일은 쉼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고 쉬신 것처럼 주일날 쉬는 것입니다. 쉬는 것은 창조질서입니다. 노동으로 쉼으로써 육체도 쉬고 마음도 쉬고 특별히 영적인 안식을 누리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쉼은 쉴만한 물가가 필요하고 푸른 초장이 필요하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일날에는 말씀 안에서 쉬는 날입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됩니다.


  쉼은 우리 삶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우리 삶의 미래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그 날은 예수와 함께 보내면서 쉼을 경험하는 날이 안식일, 성수주일 신앙입니다.


 3) 성수 주일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 세계 교회 공동체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한소망교회 성도가 되었으면 한소망교회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날이 주일날이라는 것이지요.


  이 주일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기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그날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 모든 교우들과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우들이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날입니다. 시간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 동동체가 건강해 집니다. 물질을 가능한 많이 드려서 교회 공동체의 영향력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교회 공동체에 담음으로써, 또 우리교회에 주신 성도들과 소중하게 교제함으로써, 입원한 성도들을 찾아보고 주일 낮 예배를 드리지 못한 성도들을 찾아가서 심방을 하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찾아가 도와줌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가치를 우리의 날로 받아들이는 날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한소망 가족이 되었으면 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함께 예배드리십시요.


 4) 무엇보다 안식일은 기쁨과 감격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분이 하늘 나라에 가서 ‘너희들 예배 잘 하나 보자’ 구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믿고 그분과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살 그날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살아계시고 임재하신 예수님을 찬송함으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살게 될 것입니다. 고백하는 날이지요.


  금년에 신앙의 기본을 지켰으면 합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임재에 기본으로 돌아가면 능력있는 예배, 강력한 말씀, 살아있는 기도, 손해보고 취미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을 걸고 예배드리는 기본이 서면 한국교회는 반드시 일어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민족이 일어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일어서고 민족이 일어서면 통일됩니다. 우리시대에 통일이 될 것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생애 북녘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타협하지 않는 주일 예배, 예배를 위해서 생명을 거는 자세, 낮예배 드리고 저녁 예배 드리고. 항존직 직분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요예배 안 드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살 줄 알고 자존감을 누리고 살 줄 알았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타협하고도 기도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지 않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주일날도 오전예배 오후예배 드리자. 오전 10시예배 드리고 저녁 먹고와서 7시 30분에 예배를 드리자. 교역자들이 저녁에도 안찼는데 어떻게 낮에까지 차겠습니까?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예배에 생명 걸기로 결단하면 수요예배도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III. 제자를 위로하시다


  오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셔서 행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는데 배를 버려두고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자연히 가정생계가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 노릇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아비노릇하기 어려웠겠지요. 더구나 늙으신 장모님의 병든 것도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돌봐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을 심방해 주신 것입니다. 열병 들어 죽어가고 있던 장모님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 살지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직장생활하고 조금만 시간나면 목장 섬기고 목원들 돌보고 선교회 모인다 그러고 세상으로 무슨 일 취미생활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잘못 살고 있는 것 아닙니다. 제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한국교회 지난 100년 아니 지난 2000년 동안 모든 진실한 사역자들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잘 산 것입니다. 취미를 잃어버린 것, 세상에 관심 한번 갖지 못하고 교회만 매여만 살았던 것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집을 찾아가 주셨습니다. 생계가 어려웠고 병든 노모를 돌보지 못했던 베드로의 집을 예수님이 방문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소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무너졌던 가정을 주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9-30)


  베드로 자신은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초조하게 간청하고 있지 않습니다. 상당히 성격이 급한 사람인데 점잖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면서 “예수님, 우리집에 장모님이 병들었단 말입니다. 어서 좀 가주세요”하고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세 복음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마는 그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베드로는 보통의 상식대로 ‘선생님’을 자기집에 모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단순히 점심을 대접하려는 것뿐이요 장모의 병을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라고 합니다. 그 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예수님, 지금 이 집에 문제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편안하게 보이지만 저 뒷방에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직접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과정이 그렇게 좋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1:30)

누가복음 4:38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장티푸스나 요즘으로 말하면 노인이 신종플루처럼 열이 심한 중병입니다.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마가복음 1:31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마태복음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주님께서 사랑으로 터치(Touch) 하셨다.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될터인데 주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며 위로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사위 하나 있는 것이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하느라고 밥은 제대로 드십니까? 아랫목은 따뜻합니까? 병드셨는데 돌봐드리지도 못했지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돌봐 주실 것입니다. 힘내세요.” 그리고 손을 꼭 잡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난 다음에 그 손을 꼭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어루만지고 꽉 붙들어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장모의 삶을 성경 기자는 대단히 인상적으로 짤막하게 기록을 남깁니다.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막1:31)


  “그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공동체를 얘기합니다. 초대교회를 섬기는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종드니라” 미완료과거형 계속용법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섬겼더라. 죽을 때까지 교회를 섬겼더라. 힘닿는 데까지 시간과 물질과 온몸을 바쳐서 초대교회를 섬겼더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3에 보면 예수를 만난 이 여인들이 예수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초대교회 제자교회 사역을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모두 내어놓고 섬겼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주님이 십자가에 잡혀 죽으실 때에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갔지만 떡을 먹던 사람들, 병 나은 사람들이 다 도망갔지만 이 여인들은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까?


  묻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 만나셨습니까? 구원받았습니까? 은혜를 입었습니까? 고침 받았습니까?

반드시 섬기는 자리를 가지십시오. 목장을 섬기고 직장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마을에 돌아가서 이웃을 섬길 사람을 찾고 만나는 사람을 섬기고 사역팀을 섬기고 찬양대 찬양팀에서 섬기고 긍휼사역으로 섬기고 어른들을 섬기고 어린영혼들을 섬기고 누가 권면하지 않아도 찾아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행복입니다. 사역은 복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상처를 받고 실망을 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울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아요. 주님 계신 곳으로 주님 나라로 절 데려가 주세요.”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니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딸아 나와 천국에 가자. 그런데 하늘나라에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좀 요청할 일이 있는데 몇 가지만 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첫째로 네가 하늘나라 오려면 장례식을 해야 할텐데 집안이 너무나 어지럽혀져 있는 것 같다. 장례식에 왔을 때 사람들이 네가  끝까지 깨끗하게 잘 정리하고 갔다는 얘기를 듣도록 집안 청소 좀 할래?”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하겠습니다.” 집안을 깨끗이 정돈했습니다. 며칠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또다시 “다음으로 장례식을 치루려면 마당에서 머물러야 되는데 사람들이 네 정원을 보고 ‘풀을 깎은지 오래된 것 같은데 저 정원 한번도 손도 대지 않고 갔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이왕 가려면 정원 손질 좀 하고 가겠느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며칠동안 열심히 땀을 흘려서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꽃도 새로 심고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됐다. 그런데 가기 전에 아이들이 어미가 죽은 다음에 얼마나 허전하겠니? 평생 어미의 사랑을 먹고 살았다는 추억은 남기고 가자. 그걸 느낄 수 있도록 자식들에게 며칠 동안 네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해 봐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봐라.” 여인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격려하고 소중하다 귀하다 말해주고 밥 해주고 머리에 손 얹고 축복기도 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정성껏 섬겼습니다. 아이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 네 남편이 너 속 썩인 것 내가 잘 안다. 밉지? 그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겠느냐? 그러나 남편이 장례식 하면서 ‘참 좋은 여자였는데...’ 하는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이왕이면  정성껏 따뜻한 밥을 지어서 먹이도록 해라. 그리고 남편을 사랑해 주어라.”여인은  남편에게 “사랑한다.” “똑똑하다.” “잘났다.” 말해주고 따뜻한 밥을 정성껏 지어 함께 먹었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옷 받아 걸어주고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시더니 “하늘나라 갈 시간이 되었구나. 네 집을 한번 더 돌아보려므나.” 여인이  집을 둘러 봤더니 아주 잘 정돈된 정원에서는 꽃이 피어 있었고 집안도 깨끗이 정돈이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실로 자녀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의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여보 밥 먹자. 집에서 먹는 밥이 최고야. 일찍 들어옵니다.


여인이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가 천국입니다. 주님 여기가 천국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섬기는 그 곳이 천국이란다.”


  가정에서도 섬김 받으려고만 하니까 그곳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섬기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교회생활에 재미가 없어졌어요? 교회 생활에 행복을 잃었다고요?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요? 생각해 보세요. 언제 행복했는지.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리가 아프도록 교회를 섬기고 오는 사람을 섬길 때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미친 듯이 교회생활을 할 때 행복했습니다. 섬길 곳. 사역지가 있어서 지치도록 그곳을 위하여 울면서 기도하고, 물질을 바치고, 시간과 몸 바치는 그 자리가 행복했습니다.


  교회생활 재미없다는 얘기는 구경꾼으로 전략했기 때문에 방관자로 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섬길 곳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역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 섬기면 당신이 섬기는 그곳이 천국으로 됩니다.

  세상 살기가 지긋지긋해 졌다구요. 세상에서 섬겨보세요. 김치 한 포기라도 나누고, 도시락을 나누고, 양로원을 섬기고, 정박아 시설을 방문하고, 고아원에 찾아가서 아이들과 놀아도 보는 등 주변에 섬길 곳을 찾으세요. 그러면 그곳이 천국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내가 가는 곳곳마다 천국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역은 복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그곳이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