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이동원목사
저는 지난 열흘 동안 105분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모시고 터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아무래도 터키 성지 순례의 꽃은 갑바도기아 방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암굴 공동체와 지하도시들이 원형그대로 남아있는 곳인데 여기서 우리는 지난날 박해시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고난을 감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는가를 온 몸으로 느낄수 있는 현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작은 암굴 까지 합하면 무려 3,000여개의 암굴 교회들의 족적들이 남아있는 불가사의한 현장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안이한가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지하도시 데린큐유에서 우리는 무려 지하 120m 약 8층까지의 땅속으로 내려가 십자가 형태의 지하 예배실에서 순례단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저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런 고난을 감내하였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들려온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웃는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훗날에 주님앞에서 그리고 후손들앞에 부끄럽지 않을 복음의 미래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예외없이 다 그런 승리로운 믿음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적지 않은 배도와 변절,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딤후 1:19-20에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라고 변절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합니다.
딤후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당장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 내일의 역사를 그리고 영원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부끄러운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은 비단 후메내오, 알렉산더, 데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된자들이 나중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잘 출발하여 나중에 부끄러운 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처음은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으나 나중 인생을 영광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일군의 비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된자들이 나중되는 이유-무엇때문일까요?
1. 흥정의식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마태 19:27-30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매우 솔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19:27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이 아닙니까?
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보이지 않는 영생의 약속으로 만족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로도 만족할수 없었습니다.
피부에 와닿는 손익계산상의 플러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Give가 있었으면 구체적인 Take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주일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몸 드려 봉사했으면 무엇인가 가시적인 축복이 내게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잘되거나, 증권이 잘 되거나 아니면 아파트 값이라도 오르든가 아니면 로또라도 당첨되든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 곧 바겐 의식인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흥정이 시작되자 믿음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손해본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9:29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배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흥정의식으로 너는 이제 나중된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30말씀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20장 본문에서 포도원 일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여기 먼저 부름심을 받아 포도원 일군된 자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20:3을 보십시오.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절을 읽어보십시오.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어떤 단어가 반복됩니까?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부르심을 받기전 인생을 낭비하고 무의미하게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시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아닙니까?
우리 죄사하시고 구원 하신것만 해도 감사한데 거기다가 일군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은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은혜의식을 상실할 때 우리는 흥정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때가 나중됨의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2.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오전 삼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육시(정오12시) 구시(오후3시)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제 십일시(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자기들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11절)
왜 원망합니까?
10절에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 씩 받은지라"
나중 온 자와 비교한 것입니다.
이 비교가 불평을 낳은 것입니다. 원망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의 그 어느 날 문득 내안에서 일어나는 불평을 성찰해 보십시오.
그 대부분의 원인이 비교의식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수 있습니다.
비교하기 전까지 행복했던 내가 상대적 비교를 시작하자 갑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 비교의식이 발전하면 질투도 되고 계급의식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행이 경건한 은혜의 여행이 되도록 쇼핑을 허용하지 않다가 마지막 날 이스탄불에 와서 그 유명한 그랜드 바자에서 두 시간정도 쇼핑 시간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행복해 하시는지요? 버스에 물건들을 사가지고 와서는 서로 얼마를 깍았다고 자랑을 하더니 갑자기 표정들이 시무룩해 지시더러구요. 자기보다 꼭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행복이 달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을 극복할수 있을까요?
비교의식의 성경적 처방은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도 꼭 같지 않게 다르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따라서 인생의 가는 길이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길을 나 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옆집 아줌마처럼 꼭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색깔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인생의 다양성의 멋이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획일화의 불행인 것입니다.
제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르게 살 자유를 허용하십시오.
당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모방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비교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만 허락하신 그 삶의 정황을 감사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당신과 다른 이웃이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나의 영역에서 언제나 먼저 된 자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 이미 당신은 나중됨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3.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받을 만큼 공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더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로의식에 사로잡히는 순간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섭섭 귀신입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이 직장에서, 혹은 이 교회에서 이만큼 공로를 세웠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의 감격을 상실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공로의식을 극복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출발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다윗은 자신의 기도실에 목동시절의 의상을 늘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가 목동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삼하 7:18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잇습니다.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장터에서 놀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공로의식을 극복하는 유일한 처방이 바로 이 빚진자 의식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로마서1:14에서 "--나는 빚진자라"고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래서 옛날 우리 선배들은 기도를 마무리하며 "공로없는 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혹은 "다만 예수님의 공로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 그리고 그 구원의 주님을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 우리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는 빚진자에 불과합니다.
이 빚진자 의식이야 말로 우리를 겸허한 봉사자로 살게하는 유일한 성경적 처방이라고 믿습니다.
이번 터키 성지순례에서 우리는 서머나(이즈밀)에서 폴리캅 기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를 목양하던 폴리캅은 유대인들의 참소로 체포되어 총독앞에 끌려 옵니다.
총독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그를 놓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폴리캅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깁니다. "나는 8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섬겨왔오. 그분은 이제까지 한번도 나를 해롭게 하신일이 없건만 내가 어찌 나의 왕을 져버릴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과 형리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작개비들을 모아 불을 지폈습니다.
폴리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나를 태우시오. 내가 어찌 점시 타다가 꺼질 불을 두려워하겠오. 어서 할 일을 하시오"
그리고 폴리캅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 주님 저를 구원해주시고 이렇게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세워주시니 웬 은혜입니까? 이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상하게 불이 그를 에워싸고 태우지 못하자 한 형리가 칼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찌르매 붉은 피가 솟구치며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폴리캅 기념 교회 천장에는 불란서의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의 순교성화가 그려 있는데 인상적인 것은 형리 뒤에 두손이 포승줄에 묶인 화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의 순교는 바로 나를 대신한 순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 선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순교자들의 값비싼 피의 강이 흐르고 흘러 우리가 마침내 복음의 소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빚진자 들입니다.
갚을수 없는 은혜에 빚진자 들입니다.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방종할수 없습니다.
교만할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한 평생 주님과 주의 백성들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빚진자의 의식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주의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총의 의식과 빚진자의 의식으로 산다면 오히려 나중된자라도 먼저 되어 주 앞에 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이번 성지순례를 인도하면서 계속하여 묻고 대답하고 강조했던 일관성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세기의 성도들 바울 요한 누가 디모데 오네시모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비브라 이들은 모두 자기 시대 자신들의 삶의 장에서 복음의 빚진자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자의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시대의 먼저 된자로서 당신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복음의 빚을 갚으려 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그렇게 안이하게 사시다가 먼저 되고도 나중된자로 주님앞에 서시겠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배경인 마태 19:27의 질문을 베드로가 던진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2. 본문의 3절과 7절에서 "놀고"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본문 10-12절에서 먼저 온 자들의 항의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의식을 다시 풀어서 말해 보십시오.
4. 먼저 부름 받은 일군이 나중 되는 이유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서 나에게도 해당되는 의식들이 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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