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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한 토막 하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우산 장사를 했고, 작은 아들은 소금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매일 두 아들 걱정하면서 울며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우산 장사하는 큰 아들을 걱정하고, 반대로 비가 오는 날은 소금 장사하는 작은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고 매일 울며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할머니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 할머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감사를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소금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소금이 잘 팔리겠구나!"라고 감사하면 될 것입니다. 또 반대로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 장사를 하는 큰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하면서 감사하면 될 것입니다. 감사를 회복하면 문제는 절로 해결이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하얀 백지 위에 사인펜으로 선을 하나 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선에는 손을 대지 않고 그 선을 짧고 가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그 옆에 사인펜으로 더 굵고 더 긴 선을 여러 개 그으면 됩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본래의 선은 짧고 가늘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자꾸 그 문제에 집착하면 문제가 더 크게 보입니다. 괜히 머리만 아파집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접어두세요. 그리고 그 옆에다 감사의 줄을 더 굵고 더 길게 그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감사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 동안 상실했던 감사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충만하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바르게 정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가 감사를 회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유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열 명 모두의 병이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열 명의 행동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로는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졌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그냥 그대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이방 사람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셨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감사에 대한 중요한 교훈들을 여러 가지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감사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일이 쉬울 것 같습니까? 어려울 것 같습니까?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롬1:21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그만큼 "내가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몹쓸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사를 잊고서 상실한 채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어떤 맹인은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약 내가 눈을 뜬다면 나는 제일 먼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 그리고 난 뒤에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 보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감사를 잊고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그 한 가지만 해도 감사의 조건은 충분한 줄 압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품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잊고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주께서 우리의 더러운 옷을 다 벗겨주시고, 우리에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본시 그 분의 이름은 손영준 목사였습니다. 그는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가 모인 교회에 초빙되었을 때, "나는 여기서 내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애양원을 따서 손양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손목사님은 그곳에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여수반란사건때 목사님은 그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빨갱이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손목사님은 장례식때 답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 다. 셋째,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 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 했으니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에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 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 합니다. 아홉째,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면서 그 엄청난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답사를 이렇게 끝맺음했습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 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고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신자와 불신자가 나란히 담을 하고서 이웃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식탁을 앞에 두고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난 뒤에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그랬더니 불신자가 대꾸를 했습니다. "믿고 안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그런 미신적인 신앙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 혼자 경건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불신자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집에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는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는 속으로 "아마도 그는 대학에 다니는 그 집 아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집에도 똑똑한 친구가 한 명 있구만. 누구인가? 대학 다니는 자네 아들인가?" 그랬더니 하나님을 믿는 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닐세! 우리 아들은 나보다 신앙이 더 좋아.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돼지를 가리키는 말일세." 하나님은 돼지에게는 감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감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열 명 모두가 문둥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이방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7∼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놀라셨을 것입니다. 첫째로, 마땅히 돌아와야 할 유대인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둘째로, 기대하지 않았던 이방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그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놀라게 한 성질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긍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서 기쁘시게 해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느끼지 않는 사람,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는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긍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때, 예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원하십니다. 그 기대에 어긋나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는지 아세요?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마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일백 세 되었을 때, 그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내 아들, 내 독자, 내 사랑하는 이삭"이라면서 마음이 온통 이삭에게만 쏠려 있었습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려야 할텐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드려라." 그제야 아브라함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던 자신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단했습니다. 그는 이삭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때는 억지로라도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원하시는 감사를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될 줄 압니다. 유대인들처럼 부정적으로 주님을 놀라게 하지 맙시다. 사마리아인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욕심이 많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감사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보는 것도 아닙니다.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빼앗긴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열 명이 나옵니다. 누가 복있는 사람입니까?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까? 대답할 필요도 없이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얻게 된 명예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명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명예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마리아 사람의 복있는 모습을 다시 살펴보십시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러 가다가 도중에 자기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할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여러분 생각에 그 사마리아 사람이 무엇이라고 큰 소리 쳤을 것 같습니까?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몹쓸 병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떻습니까? 큰 소리를 외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 기도했겠지! 속으로 감사했겠지!"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속으로만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만백성이 보는 눈앞에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속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마음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과 감사를 떳떳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표해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절을 갖추어서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최상의 경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최고의 예절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깊은 감사의 정을 느끼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절로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뜨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찬송을 불러도 절로 눈물이 나오고, 기도를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구구절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그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으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고, 긍휼을 구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병나음을 입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나음을 입을 수 있었다는 믿음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시옵소서"의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합니다"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받는 믿음만 있었지, 드리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칭찬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시옵소서"의 믿음입니까? "감사합니다"의 믿음입니다. 받는 믿음보다 드리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행20:35의 말씀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은 받는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드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있는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주시옵소서"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감사합니다"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받는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드리는 믿음으로 성숙해지는 우리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하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보았다면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방인이고 저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뭐! 다른 사람들도 다 그냥 가는데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더라면, 그는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들이야 넓은 길을 가든지 말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좁은 길을 가야지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 감사의 길을 가야되는 것입니다. "그 집은 나보다 돈도 많이 벌고 부자인데 헌금하는 것 보면 너무 작게 합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뜻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감사를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면 절로 효도하는 자녀가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니까 효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로 그 가정은 화목합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만 회복하면 저절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사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타락한 습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원하시니까 우리는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를 요구하십니까? 감사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시옵소서!"의 받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감사합니다!"의 드리는 믿음으로 성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모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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