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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모스(박상훈)

[스크랩] 아모스서/제48강 마지막 다섯번째 묵시(9:1-4)

제48강 마지막 다섯번째 묵시(9:1-4)

 

9:1-4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모두 다섯 개의 묵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묵시는 마지막 다섯번째 해당되는 것으로서 가장 강도가 세게 나타납니다. 아모스가 본 첫번째 묵시와 두번째 묵시에서는 아모스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을 면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번째 묵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다림줄을 두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묵시에서는 하나님은 여름 실과 한 광주리의 묵시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의 끝이 다 되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섯번째의 묵시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개의 묵시가 갈수록 점점 강도가 심해져 감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섯번째 묵시는 지금까지 나온 네 개의 묵시에 비해서 상당히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과 양식 면에서 첫번째 묵시와 두번째 묵시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고, 세번째 묵시와 네번째 묵시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섯번째 묵시는 앞의 네 묵시와는 달리 몇 가지 특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다른 묵시들은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지만, 다섯번째 묵시는 "내가 보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과 선지자 아모스 사이의 대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다른 묵시와는 달리 다섯번째의 묵시에는 상징물이 없습니다. 첫번째 묵시에서는 황충이 상징물이었고, 두번째 묵시에서는 불, 세번째 묵시에서는 다림줄, 네번째 묵시에서는 여름 실과 한 광주리가 상징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다섯번째 묵시에서는 특별한 상징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절 상반부에서는 아모스가 본 묵시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 하반부에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4절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한 절씩 읽어가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내가 보니"라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만일에 이 말씀이 빠졌더라면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아모스의 묵시에는 해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모스는 네 개의 묵시만 보았던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묵시를 보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번째의 묵시는 그 시작이 다른 이전의 네 개의 묵시와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짧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지막 다섯번째 묵시의 권위 자체가 제한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다음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지금 묵시 가운데 말씀하고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마지막 다섯번째의 묵시도 역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단 곁에 서셨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단은 벧엘의 단일 것입니다. 벧엘의 단은 금송아지가 있는 단입니다. 더러워진 단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이 아닙니다. 죄의 소굴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곁에 하나님께서 서셨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곧 무엇인가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주께서 단 곁에 서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시는 것입니까? 본문에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모스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성전의 기둥 머리를 직접 치는 일을 감당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선지자이지만 선지자 개인의 힘으로는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의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삼하24: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대상21: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는 임박한 파멸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 임무를 맡은 당사자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 말씀하셨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의 파괴가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이 곧 이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아울러서 그 가운데서 예배하는 자를 모두 다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소에 대한 파괴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아마도 이것은 지진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암9:5)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기둥 머리라고 하는 것은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칠 때에 아래에 있는 문지방까지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파괴된다는 뜻입니다. 메리스무스적인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양쪽 끝을 예로 들면서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서 말하는 기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소 전체가 다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그 위력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건물 전체가 그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들 위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삿16:23∼31에 나오는 대로, 삼손이 집을 버틴 기둥을 무너뜨릴 때 집이 다 무너져 그 속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깔려죽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의 성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자신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4:4에서 벧엘에 가서 모여 예배드리는 행위는 범죄 행위라고 질책하신 바 있습니다.
(암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또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그 이유는 3: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3: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묵시의 초점은 이제 성소의 파괴로부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죽음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 옛날 예후가 바알 선지자들을 멸할 때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왕하10: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들어 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장관들이 칼로 저희를 죽여 밖에 던지고
결국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옛날 바알을 따르던 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배역했기에 같은 운명에 처해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진을 피해서 살아남은 자들은 대적들의 손에 의해서 살육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들의 손에 패하게 될 것을 말씀해주었습니다.
(암2:14∼16)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3:11∼12)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암4:2∼3)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5:2∼3)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암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6:7∼11)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 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암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암7: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살육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던지 한 사람도 그 살육을 피해서 살아남지 못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내용도 2:14∼16에서 예고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서 도망친다든지, 피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부질없는 노릇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암2:14∼16)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절에는 왜 이스라엘 백성이 피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다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데, 어찌 인간들이 하나님의 통제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2∼4절을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할지라도"라는 말이 몇 번 사용되었고, 또 "거기서"라는 말이 몇 번 사용되었는지 여러분께서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암9:2∼4)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모두 다섯 번씩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거기서 다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눈에서 결코 도망할 수 없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손에서 피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고,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눈에서 피할 수 없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2절 말씀을 보십시다.
(9: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음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스올"(    )을 가리킵니다. "저희가 파고"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음부는 땅 속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욥11: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사14:9)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사14:11)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마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음부는 죽은 사람들이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 깊은 곳을 파고서 그 속에 들어가 숨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그곳조차도 찾아서 끄집어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또 하늘은 끝없이 높은 곳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아무도 그곳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거기서 숨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서 끄집어내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분이 아니십니까?
(암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은 바가 무엇입니까? 하늘과 음부 사이가 아무리 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있는 모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내서 다 멸하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메리스무스적인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깊은 음부로 숨어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고, 또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숨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거기서 취해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과 음부 사이에 아무 곳에도 숨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여기에도 역시 메리스무스적인 표현이 나타납니다. "갈멜 산 꼭대기"와 "바다 밑"이 그것입니다. 갈멜 산 꼭대기는 숨기 좋은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삼림이 있습니다. 갈멜이라고 하는 이름은 포도원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갈멜 산에는 나무들이 많기 때문에 숨기가 좋습니다.
(미7:14)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아울러 갈멜 산에는 2,000개 이상의 천연 동굴이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숨기가 대단히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다 밑 깊은 곳에 숨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다 밑은 음부나 하늘처럼 인간은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지자 요나의 경우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그 속에도 미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욘2:3∼6)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바다 밑은 지구의 기반이 놓여 있다고 생각되었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뱀이 살고 있다고 옛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그 뱀의 이름을 라합, 또는 리워야단이라고 했습니다. 상상적인 존재입니다.
(욥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욥26:12)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시89:10) 주께서 라합을 살육 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하나님은 이러한 뱀들을 이용해서 도망자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이미 이와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암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절과 3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의 영역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4절에서는 인간의 영역을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 밖으로 피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보면 선지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가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요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멀리 가면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4절에서는 그것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습니다.
(9: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으로 만족을 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방 땅에 사로잡혀 간다 할지라도 거기서 칼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목하여"라고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말씀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렘24: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지키시기 위해서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한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출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암9: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지막 다섯번째 끝맺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화를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어떠한 소망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비극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적에게서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이 되셔서 저들에게 복 대신에 화를 내리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저들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저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지만 이제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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