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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신년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눅 10:36-37

고사성어 가운데 ‘조지양익’(鳥之兩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새가 제대로 날려면 두 날개가 함께 날갯짓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지양륜’(車之兩輪)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수레는 두 바퀴가 있어야 제대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레가 제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려면 두 바퀴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사는 두 날개가 조화를 이루어 날갯짓을 할 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는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루며 작동할 때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이념의 핵심 가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에 우선적 가치를 둡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안보를 강조합니다. 기업경영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해 진보주의자들은 평등에 우선적 가치를 둡니다. 평등을 지키기 위해 독재타도와 민주수호를 강조합니다. 경제 정책도 빈부격차를 줄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복지를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두 가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에는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와 진보가 다 필요합니다. 둘이 서로 경쟁하며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나라가 든든하게 설 뿐 아니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도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 6:5과 레 19:18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장 핵심적인 명령이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 22:37-40를 보면 예수님께서 더욱 분명하게 요약 정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하신 가장 핵심적인 명령을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가 마치 새의 두 날개가 함께 날갯짓해야 새가 날 수 있는 것처럼 함께 실천될 때 하나님의 명을 제대로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함께 작동해야 수레가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함께 수행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지양익, 거지양륜하고 있나요? 이 두 가지를 함께 잘 실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앞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선 한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당시 제사장들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지금 이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한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며 제사직무에 헌신하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길거리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한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일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아마 이 일은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자기는 제사직무를 수행하다 지금 지치고 힘들어 이 사람을 도울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나중에 하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혹시 우리가 이 제사장과 같지 않을까요?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면서 도와야할 이웃을 외면하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에 집중하느라 여력이 없다고 이웃사랑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내게 주어진 우선적인 일이 교회 봉사이기 때문에 이웃을 돌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어쨌든 안타까운 것은 이 제사장은 하나님 사랑에만 집중했지 이웃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레가 한쪽 바퀴로만 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만 돌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레위인입니다. 레위인도 강도만난 사람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또 왜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레위인 역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과 같지는 않아도 성전직무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이 혹시 죽었다면 시신을 만져 부정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아마 이 사람 곁에 오래 머물다보면 자기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우리가 이 레위인과 같지 않을까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다보면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엮일 수 있기 때문에 피하려 했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일에 분주하다는 핑계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했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레위인도 하나님사랑에 몰두하다가 이웃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시 한쪽 날갯짓만 하고 한쪽 바퀴만 돌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양쪽 날개가 제대로 날갯짓을 하고 있는지 양쪽 바퀴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함께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과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 사랑보다는 이웃사랑에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힘 써야 할 것은 이웃사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그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웃의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사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 율법교사들은 29절을 보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두 질문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사들의 질문은 도움을 주려는 내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이웃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사람이 이웃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도움을 받을 사람이 이웃이라는 말은 돕는 사람이 주체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객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도울 이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도와야 할지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도움을 받을 사람에게는 돕는다고 해도 꼭 필요한 것을 돕기가 힘이 듭니다. 때로는 돕는다고 하면서 불쾌하게 만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한 고아원 원장님은 푸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정치인들이나 대기업에서 찾아온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느 기업에서 원아들이 입을 오리털 파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옷마다 ‘모 기업증’이라고 글자를 새겨두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창피해서 그 옷을 입고 학교를 갈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또 어느 정치인은 라면 박스를 쌓아놓고는 아이들 전부 다 동원해서 사진 찍느라고 정신이 없더랍니다.

나의 이웃을 찾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돕는 사람이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주체이고 돕는 사람이 객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도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도와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도와야 할 때는 언제인지,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결정할 때 반드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 해 전에 급식이 시행되기 전에 인근 중학교에 가난해서 점심을 굶는 학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우려 찾아갔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학생들 10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마침 교우 가운데 그 학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아이들이 사춘기여서 무척 예민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들을 만나서 격려하면서 직접 급식비를 전달하려고 했었습니다. 선생님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이들이 급식비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마음을 다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학교식당에 식비를 대납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이 때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이웃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그를 도왔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처한 딱한 상황만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도왔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 상황에서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강도만난 사람은 지금 이곳이 유대지역이라서 유대인일 텐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돕는 것은 당시 관례상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과 같아서 서로 상종을 하지 않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율법에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웃은 구별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게 이방인은 이웃일 수 없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들이지만 저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장애인이나 나병환자와 같은 사람들 또는 죄를 지은 사람들 역시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저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이웃의 폭을 제한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웃의 폭을 좁혀 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권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IS 문제로 시리아에 대규모 난민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모두가 다 무슬림들입니다. 그런데 이슬람권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도 이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없습니다. 저들을 돕기 위해 돈을 내는 나라들도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오일달러가 넘쳐나서 대규모 건설공사들을 하면서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소위 ‘인샬라’ 사상 때문입니다. 다 알라의 뜻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간신앙으로 볼 때 다 제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나서서 도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웃의 폭을 한 없이 넓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마 5:44를 보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자기를 박해하는 자까지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국가인 유럽 각국들은 이슬람 테러분자들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슬람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지역과 남녀와 빈부와 국가와 인종의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심지어 이념과 나와의 과거 원한 관계까지도 넘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힘써야 합니다.

금년 2016년 우리 교회 표어를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로 정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잘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날개로 날갯짓을 하고 두 바퀴를 제대로 작동시켜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 사랑하는 일은 지금까지 한 것처럼 열심히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하는 일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열심히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변을 살피면서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지를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과 한 반도 나아가 북한과 온 세계를 살피면서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돕고 섬기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을 펴나가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규칙” 세 가지입니다.

존 웨슬리는 동전 세 개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하루에 세 가지를 행하면서 하나를 행할 때마다 동전을 왼쪽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세 동전이 다 옮겨갔나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는 ‘기쁘게 반기기’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기쁘게 반겨주기입니다. 둘은 ‘선물 나누기’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은 ‘착한 일 하기’입니다.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