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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9. 18.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5:13-16

11. 9. 18.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마태5:13-16



I. 주제 설정의 배경


오늘본문 성경의 말씀처럼 소금이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다면 분명 금은 그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등불이 발아래 숨겨져 있다면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내일부터 청주 상당교회에서 본교단 총회가 개회됩니다. 제96회 총회 주제가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 (마태복음 5:13-16, 벧전2:11-12)로 정해졌습니다. 이 주제는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와 공신력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자성으로부터 출발된 주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본교단의 작금 지상 과제가 있다면 소금으로서의 맛을 되찾고 빛으로서의 사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온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던 것처럼”

(행2:47) 세상으로부터의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핍박은 어제 오늘의 일은 결코 아니지요. 초대교회에도 박해가 있었고 핍박이 있었습니다. 한국 초기교회에서도 반대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대와 핍박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었고 진리가 겪는 수난이었습니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이러한 박해 앞에 당당히 순교로 맞서서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반대는 오히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고 빛이 그 사명을 버려 당하는 것이기에 아픔과 곤혹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번 총회에서 본교단이 오늘 우시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그 정체성을 고민하고 교회의 공신력 회복을 위해 몸부림하기로 결단하여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이란 주제를 설정한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II. 너희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을 때 너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12절에 나오는 팔복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했을 때에 “복이 있도다”는 경축을 받은 그 사람들이 바로 “너희”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산에 오른 무리와 제자들,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에 압제 당하고, 종교에 짓눌리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던 사람들이 여기 “너희”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복되도다, 복된 존재다. 참으로 존귀하다.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이 너희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바로 너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 희망이 있다. 바리새인들에게 희망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한 서기관에게 희망이 있다. 로마군대에 희망이 있다. 헬라 철학에 희망이 있다. 이렇게 해도 믿을까 말까인데 상처 받아서 몰려온 그 제자들, 무리들을 향하여 온 세상의 희망이 너희들에게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도무지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이 못 될 것 같은 그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예수님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라고 말씀하신 마태교회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 성품, 존재를 통해 세상이 맛있어지고 세상이 밝아질 것을 예수님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금과 빛은 팔복의 말씀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팔복 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팔복 씀을 우리 삶속에 어떻게 적용하면서 사는 것이 옳습니까? 묻는다면 소금이 되어서 살아가십시오. 빛이 되어서 살아가십시오. 이것만큼 명료한 설명은 없을 것입니다. 복되도다, 세상의 소금된 성도들이여. 복되도다 상의 빛된 성도들이여. 이렇게 요약하더라도 조금도 틀림이 없는 말씀입니다.

III. 땅의 소금, 세상의 빛


  우리말 성경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엔 똑같이 세상인데 앞의 세상과 뒤의 세상이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땅과 세상은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서는 똑같이 세상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가 나오는데 팔복 말씀 제일 마지막에 보면 11절 12절 너희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욕을 듣고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럴 때 “너희”가 나옵니다. 팔복 마지막에 나오는 “너희”와 오늘 본문의 “너희”는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욕을 듣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너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소금이고 빛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살아가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세상이 싫어요.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그때 계룡산에 올라가 도를 닦고 사는 도사가 되어라. 그런뜻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둔주의, 도피주의를 거부합니다. 죄악된 세상 한복판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 - 세상이란 단어속에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은둔주의가 되어서도 안되고 세속주의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서 살아가는 삶을 은둔주의라 하고, 세상에 파묻혀 세상속에 동화되어지고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되어져 버리는 것을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은둔주의도 거부하고 세속주의도 배격합니다. 오히려 도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발은 땅에 붙이고 세상에 붙이고 살아갑니다.


  바다의 물고기를 볼 때마다 참 신비합니다. 짠 물속에 삽니다. 그리고 짠 물을 끊임없이 마시고 사는데도 어떻게 이 고기가 소금에 절여지지 않을까? 계속해서 바닷속에서 살고 바닷물을 마시는데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짜야 될텐데 전혀 소금기가 없단 말이지요.


  배가 바다에 떠 있지만 바닷물이 배 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팔복말씀에 보면 너희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되어야 된다. 너희들이 통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 예수 믿고 오래되었는데도 온유하지 못해. 박지르지 않습니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IV. 소금


  “너희는 세상의 황금이다” 그랬으면 우리의 자존감이 살아날 것 같은 “너희는 세상의 다이야 몬드다” 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 아주 흔한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값싼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흔하지만 아주 소중한 것이 소금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소금입니다. 집집마다 가득히 있지만 없이는 못 사는 것이 소금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 그 무리들이 나아오면 금방 사회적인 신분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나온 제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수입이 그날로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이 세상의 다이아몬드다. 너희들이 세상의 황금이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존재가 달라지고 성품이 달라지는 것 이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네가 어떤 존재인가 그것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너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달라질까? 세상의 율법과 성취에 집중하게 되면 너희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 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에 집중하여 살아갈 때 너희들은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시든 지금이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금 그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맛입니다.


  음식은 간이 맞아야 맛이 있습니다. 가장 맛있게 느끼는 소금의 량이 0.8-0.9g 된다고 합니다. 너무 많으면 짜고 그보다 모자라면 싱겁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1g쯤 먹어야 맛이 있다는 사람은 짜게 먹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0.5g정도 먹어야 맛이 있다는 사람은 싱겁게 먹는 사람이겠지요.


  소금을 연구해 보면 소금은 대비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수박에 약간 소금을 넣고, 설탕에 약간 소금을 넣고, 단팥죽에 소금을 약간 넣으면 더 달아집니다. 소금의 대비효과입니다.


  소금의 억제효과라는게 있습니다. 초밥이나 초무침에 약간의 소금을 넣으면 신맛이 덜하다고 합니다.


  단백질 응고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장어를 구워 먹을 때 소금구이가 제일 맛있다고 합니다. 생선이나 장어를 구울 때 소금을 가지고 구우면 탱탱해지고 수분이 빠지지 않아서 육질이 쫀득쫀득해 진다는 것입니다. 단백질 응고효과라는 것이지요.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얘기는 맛을 내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 해서 그곳이 재미있어지고, 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 행복해 지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효과가 더 나고, 그 사람이 들어오면 조화가 이루어지고, 응고가 되어지지 않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응고되어지고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소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제가 어릴 때 생선을 먹으면 소금이 많았는지 생선이 많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소금이라고 했을 때에 믿을만한 사람, 인격이 신실한 사람, 공동체의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 공동체에 충성을 할 줄 아는 사람, 젊은이들 가운데 기대가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나면 히브리 사람들은 소금같은 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동리사람들이 어릴 때 저를 보고 진국이다 그랬습니다. 제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했다면 동리사람들이 소금이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소금이란 변하지 않는 약속, 변하지 않는 의리 - 소금 약속, 소금 의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약속하면 약속을 변개치 않고 끝까지 의리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소금같은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썩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저희 집사람과 어머님이 가끔 싸움을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싸움을 하는가 하면 음식 가지고 합니다. 저희 어머님은 아직도 안 쉬었다. 아내는 쉬었다. 저희 어머님은 냉장고에 있었기 때문에 쉴 리가 없다. 아내는 냉장고에 있어도 음식은 오래되면 쉰다. 왜 버리느냐? 빨아서 먹으면 된다.


  음식은 어디에 두어도 상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썩을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인들을 보니까

월요일은 아담처럼 선악과를 탐하고

화요일은 가인처럼 형제를 미워하고

수요일은 다윗처럼 음욕을 품고

목요일은 아간처럼 남의 물건을 탐하고

금요일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을 속이고

토요일은 가롯 유다처럼 하나님에게 분을 품고 배반하다가

주일날 와서 하나님 죄송해요 그러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살아가는 여정 모두가 우리는 썩을 수밖에 없고 죄에 오염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부패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너만 너 자신을 고고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썩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소금 그랬을 때에 갈증을 연상하게 됩니다. 소금을 먹은 자는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맥주집에 가면 솔티스틱이라는게 있답니다. 아주 짠 막대기같은 과자를 준다고 합니다. 그걸 먹으면 계속 맥주가 넘어가기 때문에 소금과자를 주는 것입니다. 짠 걸 먹으면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갈증,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소금과 같은 사람인 것이지요.


  누군가 여러분의 삶을 보고 ‘아, 저 사람이 다니는 교회가 궁금해. 저 사람이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도 한번 알아보고 싶어. 나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 나도 신앙을 갖고 싶어.’ 그들이 목마름을 느꼈다고 한다면 소금과 같은 사람인 것이지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거듭남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나도 새로워질 수 있다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치료받을 수 있다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고 삭개오가 그랬고 바디메오가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그 외에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랬을 때에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나가는 몇 가지 그림이 더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 소제물에다 소금을 넣었습니다.(레2:13) 에스겔서에 보면 번제물에도 소금을 넣도록 되어 있습니다.(겔43:24) 출애굽기에 소금은 성결을 의미했습니다.(출30:35) 치료제, 소독제 역할을 하는 것이 성경에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책에 “소금은 폭발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얘기는 세상 어디에 가든지 그 자리에 가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소금이라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접근이었습니다.


V. 빛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했을 때 그 빛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소금은 음식 속에 녹아 들어가므로 소금맛을 냅니다. 그러나 빛은 어둠을 몰아냄으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빛은 분리되어지는 것입니다.


  소금이 너무 흔하게 널려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빛은 고고한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값싼 것이 소금이라면 존귀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금이 낮아짐과 겸손과 녹아짐 그럼에도 귀하게 사용되어지는 것이 소금이라면 빛은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살아가는 삶 이게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이란 세상 속에 녹아 있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스며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이란 세상과 전혀 다른 존재이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때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이 무엇인가? 생각의 어두움 - 무지한 것이지요. 마음의 어두움 - 마음이 좁아져서 진리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움 - 혼돈과 무질서 무능함. 무신론과 물질주의와 이성주의,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어두움, 마음의 어두움, 영혼의 어두움 이것이 빛의 반대개념의 어두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빛이 무엇인가? 세상을 밝게 하는 것이 빛입니다. 내가 갈 때 세상이 기뻐해야 되고, 나로 말미암아 행복이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겨울이 되면 동리에서 양지바른 곳에 짚단을 쌓아놓으면 전부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서 놓았습니다. 햇빛이 모이는 곳은 따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햇빛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고 내 마음을 녹여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녹여주고 서로의 관계를 녹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빛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빛입니다. 동물 식물 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체를 살리는 것이 빛입니다. 빛은 길을 안내합니다. 배의 길을 안내하는 것은 등대이지요. 활주로에 불이 밝혀져야 비행기가 내려질 수 있지요. 가로등이 있어야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14절 - 15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됫박)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


  새들백교회에 가서 보면 도시가 우리처럼 산을 깎아서 평지를 만들어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사방에 낮은 산들이 끝도 없이 널려져 있는데 그 도시가 아주 아름다운 집들이 전부다 산위에 지어져 있어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대게 부자들입니다. 거기서 LA 시내로 들어가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산위에 있는 집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밤이 되면 산전체가 불로 환하게 밝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가서 보면 산 위에 한국지도 마을이 있습니다. 저녁에 언덕을 바라보면 멀리 있는 도시가 일부러 한국지도를 그려놓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한 것처럼 그 마을 전체가 한국지도하고 똑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시드니에 가면 한국지도마을 꼭 가서 보게 된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도 도시가 산 위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밤에 불을 밝혀 놓으면 마을이 있네 도시가 있네 집이 있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됫박밑에 숨고 시궁창에 숨어살기 때문에 컴컴하게 살아도 잘 모르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삶이 들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귀족의 의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가 배운 사람이 되었으면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제자가 되었으면 리더가 되었으면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거룩한 의무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살아야 될 삶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소금처럼 살고 빛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될 의무를 가진 것입니다.


VI. 소금과 빛 된 삶 배우기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먼저는 초대교회 즉 사도행전 교회로부터 우리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소금과 빛 된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 말씀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초대교회는 복음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행2:42).


둘째, 초대교회는 아름다운 코이노니아와 강력한 기도가 있었습니다(행 2:42).


셋째, 초대교회는 기사와 표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행 2:43).


넷째,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눠주는 섬김과 봉사가 있었습니다(행 2:43-44).


다섯째, 초대교회는 성전예배와 소그룹 가정모임의 균형을 통하여 예배와 삶의 조화가 있었습니다(행 2:46).


여섯째, 초대교회는 교회의 존귀함과 복음전도의 능력이 있었습니다(행 2:47).


다음은 시대정신으로부터 소금과 빛 된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시대는 카리스마 리더십보다는 섬김의 리더십이 통하고 권위보다는 소통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회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때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복음의 사회성을 강조하므로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가던 교회가 세상으로 다가서고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본 교단은 통전적 신학 중심에 서는 신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이란 주제와 함께 바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초기교회로부터 “소금과 빛 된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희망이요, 등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은 타락된 세상 속에서 과연 소금이었고, 빛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늘 려 살던 어린이, 여성, 가난한 하층민의 희망이요, 친구였습니다. 국교회는 선교병원을 세워 천한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또한 선교학교를 세워 천민과 백정들을 세상의 중심에 세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한센 병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도 삶의 희망을 나눠주었습니다. 또한 온 나라를 병들게 하던 마약을 퇴치하고, 술, 담배문화를 근절하는 운동에 앞장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애국운동의 중심에 서서 나라를 구하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외에도 빈민구제운동, 농촌부흥운동을 펼쳐 기독교는 이름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었고 빛이었습니다.


본 교단은 2012년 9월이면 교단창립 100주년을 맞게 됩니다. 지난 100년을 점검하고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설계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지난 시간 소중했던 자산을 새로이 갈고 닦아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새 시대에 적합한 복음의 진로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