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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창11:1-9 * 성도가 버려야 할 것들- ➃교만

창11:1-9   성도가 버려야 할 것들-➃교만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O. Henry)라는 미국의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장편은 쓰지 않았고, 단편만 한 300여 편을 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마지막 잎새’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뉴욕에 그리니치 빌리지라고 하는 아파트에 사는 화가 지망생인 존시라는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존시는 앞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은 큰 꿈을 꾸었는데, 그만 폐병에 걸려 나날이 병세가 악화 되었고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러고서는 창가 건너편에 있는 건물의 담쟁이넝쿨 잎새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시간만 보냅니다. 이 담장 넝쿨의 잎사귀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서는 몇 개 남았다, 몇 개 남았다 하고 세고 있는 겁니다. 그의 친구 수는 존시의 삶의 의지를 도와주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막무가내입니다. '저 잎이 다 떨어지면 나는 죽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 화가 베어먼이라고 하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이 노인은 필생에 한번 걸작을 남겨 보려고 화가로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쓸 만한 걸작을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저 싸구려 광고물이나 그리면서 연명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세찬 바람이 불어칩니다. 그 때에 존시는 생각합니다. '이 바람이 불고 나면, 나뭇잎이 다 떨어졌을 거다. 내일 아침에는 잎사귀가 없을 거다. 그러면 나는 죽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니 벽돌담 벼락에 담쟁이 잎사귀 하나가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또 비바람이 몰아쳤는데 다음날도 여전히 그 잎사귀 하나가 거기에 붙어 있습니다. 존시는 이 마지막 잎새 하나를 보면서 생명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저 마지막 잎새같이 끈질기게 내도 살아남을 것이다.' 용기를 냅니다. 굳게 삶의 의지를 세웁니다. 정말 병은 나았습니다.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주는 날 그 친구 수가 존시에게 '이 마지막 잎새는 베어먼 노인이 네가 그렇게 잎새에 집념하는 걸 알고 그 비바람 치는 날 담장에 올라가서 잎새 그림을 그렸고, 그는 앓고 있던 폐병으로 인해 죽었다.'라고 사실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한 청년을 살리기 위해서 한 노인은 죽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희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무 잎새 하나를 생각하며 소망을 거는 인간의 하찮은 의지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입니다.

 

나무 잎새 하나에 소망을 거는 한없이 연약한 인간 같지만 그 중심에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어려우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찾는 인생이지만 그 한 가운데에 교만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 중의 하나가 ➃교만입니다. (➀원망과 불평, ➁탐욕, ➂분노)

 

 

기독교 중세시대에 경건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일주일 단위로 매일 한 가지 죄악과 더불어 씨름하면서 그 죄악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에 7가지 죄악을 정해 놓고 영적 씨름을 했습니다.

1) 교만(Pride) 하나님은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오시고, 사단은 교만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2) 질투(Envy) 질투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약3:15)입니다.

3) 분노(Wrath)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이 분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4) 탐욕(Greed)

영어 성경은 탐욕을 ‘Evil Desire’라고 표현합니다. ‘악마적인 욕망’이라는 의미입니다. 저열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5) 탐식(Gluttony)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억 정도의 사람들은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일도 버거워합니다.

6) 게으름(Neglect)

게으름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단절되기 때문에 죄이고, 불평이 많아지고, 모든 사람들과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7) 정욕(Lust)

하나님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죄성을 이기며 살 수 있을까? 그들은 부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 7가지 죄악 중에 가장 치명적인 첫 번째 죄가 교만입니다. 훌륭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옥스퍼드의 사상가 C. S. 루이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본질적인 악, 최고의 악은 교만이다. 이에 비하면 부정, 탐욕, 술 취함, 그리고 그 외 모든 악은 벼룩에 지나지 않는다. 천사가 사탄이 된 것은 바로 교만을 통해서였다. 교만은 다른 모든 악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아멘입니다. 천사 중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으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나 마귀가 되었습니다.(사14:14) 그러한 마귀의 꾐에 빠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교만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창3:5) 최초의 타락, 죄는 교만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19세기 사회학자 Reinhold Niebuhr(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교만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줍니다.

첫째, 지적 교만입니다. 배운 사람일수록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모르기 때문에 겸손하지만, 아는 것이 많을수록 가만히 있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둘째, 신분적 교만입니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권력층일수록 교만의 위험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부유할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즉 직급과 소유가 교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도덕적 교만입니다.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교만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중에 남들보다 올곧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도덕적 우월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넷째, 신앙적 교만입니다. 먼저 신앙생활을 했거나, 무언가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직분 때문에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다섯째, 집단적 교만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떤 그룹에 속했는가,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신분상승이 이루어진다는 집단적 교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정신

 

 

오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이 교만한 인간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교만으로 망한 사건입니다. 창10장까지의 내용이 뭡니까? 노아 홍수사건 이후에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먹고 살만해졌습니다. 여기서 부터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이 되고 안정되고 먹고 살만하게 되었으면 감사하고 더 잘 섬겨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인간은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바벨탑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바벨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4)

사단과 아담처럼 하나님처럼 되겠다.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교만이 바벨탑 정신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이름을 내자.(4)

본문 4절의 ‘우리의 이름을 내고’라는 말은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자”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영광을 나타내어 스스로 만족을 누려 보자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기술과 지혜를 과시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름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교만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알아주는 것이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합니다. 그러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알아달라는 삶보다 알아주는 삶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알아달라고 하면 관계가 멀어지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관계가 깊어집니다. 알아달라고 하면 섭섭함을 느끼지만 알아주려고 하면 넉넉함을 느낍니다. 행복은 ‘알아달라는 삶’에 없고 ‘알아주는 삶’에 있습니다. 산에 가면 가끔 한적한 곳에 혼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봅니다. 그 꽃은 보는 사람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아름답게 향기를 날리며 피어있습니다. 미모 경쟁도 하지 않고 향기 경쟁도 하지 않고 그냥 혼자 아름답게 삽니다. 삶의 목표는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간적인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인정받고 칭찬 듣는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흩어짐을 면하자.(4)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최초의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고 인간을 향한 복이며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민족들이 각기 기질과 재능에 의해 나뉘어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시날 평지에 정착한 인간들은 흩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한 곳에만 모여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이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바벨탑의 최후

 

 

교만과 불순종의 정신, 바벨탑의 정신은 어떤 최후를 맞게 됩니까?

 

 

➀혼란한 세상

‘바벨’이란 뜻은 ‘혼란’이란 말입니다. 바벨탑의 교만 때문에 이 지구상에 공식적인 언어만 7천 가지가 넘게 되었습니다. 부족언어를 뺀 공식 언어만 7천개가 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까? 혼란의 세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➁흩어짐

인간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 우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그럼 하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십니까? 7절 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흩어지게 하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흩어지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은 다 흩어지고 만 겁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 앞에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교만할수록 쉽게 무너집니다.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요, 누란지세(累卵之勢)입니다. 하나님이 입김을 한번 발하시면 천지가 진동합니다. 지축이 흔들립니다. 하늘의 별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잔잔한 바다가 흉흉하며 노도광풍(努漆狂風)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바벨탑 정신, 교만을 경고합니다.

 

1)하나님을 배반합니다.(욥15:25)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2)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신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3)망합니다.(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4)넘어집니다.(렘50:32)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놓으리니 그 사면에 있는 것이 다 살라지리라”

5)스스로 속습니다.(렘49:16)

“바위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6)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시18: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7)하나님께서 대적합니다.(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8)하나님께서 물리칩니다.(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어느 고약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처음에 꽉 잡아 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난다고 처음부터 힘든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생트집을 잡고 일부러 모욕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며느리는 그때마다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냐?" 하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공손하게 대답합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 시어머니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 시어머니는 공연히 며느리에게 모욕을 줬습니다. 그렇지만 며느리는 도리어 웃으며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 식이니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대꾸라도 해야 큰소리를 치며 나무라겠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인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저 시어머니 발밑으로 기어 들어가니 불안하고 피곤한 것은 오히려 시어머니 쪽이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결국은 이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서로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좌우간 나중에 시어머니가 그랬답니다. “너에게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시어머니는 권위와 힘으로 며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며느리가 겸손으로 내려가니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겸손에는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진노만 불러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혹이라도 내 안에 바벨탑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높여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가 버려야 할 것은 ➀원망과 불평, ➁탐욕, ➂분노, ➃교만입니다.

출처 : 목포하늘비전교회
글쓴이 :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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