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갈라디아서 강해/제 4 강 내가 전한 복음이(1) (갈1:11-17)

제 4 강 내가 전한 복음이(1) (갈1:11-17)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본문 바로 앞에 있는 갈1:9 말씀을 읽어봅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릇된 가르침으로 미혹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질책을 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길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처럼 이단 사상인 “다른 복음”을 전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들을 용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연 없습니다. 행4:12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 인생이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엄하게 경고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려놓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신들의 이단사상으로 죽이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복음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입니다. 우선 11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거짓 교사들인 율법주의자들이 전하는 이단 사상인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1:6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가 곧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옳은 길을 따르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언제나 그들에게 “형제들”이라는 애칭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갈3:15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4: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갈4:28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5:11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이외에도 갈5:13, 6:1, 그리고 6:18에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를 때, “형제들”이라는 애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를 때, “형제들”이라는 애칭을 사용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좇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강한 어조로 질책을 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은 순진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잠시 마음이 격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그들을 알아듣기 좋게 설득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향한 자신의 변함없는 애정을 밝히면서 아울러 자신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혔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사실을 그들에게 알릴 것이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주의를 일단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선언하게 될 중요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1절 하반부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라면,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도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모든 인본주의 종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만 의롭게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난 복음은 이와는 다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의 골격이 되는 합2:4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는 딸이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갔습니다. 이미 그의 어머니는 음식을 다 장만하고서 사랑하는 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보자말자 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어서 오너라. 잘 왔다. 너를 위해 모든 음식 준비를 다해두었으니까, 어서 손을 씻고 와서 같이 먹도록 하자.” 그런데 딸은 어머니가 미덥지 못한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에이, 어머니가 무슨 음식을 만드셨다고 그래요? 어머니가 음식의 간이나 제대로 맞추기나 했겠어요? 제가 손을 봐야 음식이 제대로 만들어지지요.” 그러면서 딸이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나와서 자기 어머니가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음식을 하나하나 점검을 하듯이 들추어보았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어머니를 돕는 것입니까?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니지요. 딸의 말과 행위는 어머니를 돕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처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마치 예수님이 하신 일이 미덥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행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복음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라 된 인본주의적 사고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의 말씀을 12절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처음 두 가지는 부정적인 말로, 마지막 한 가지는 긍정적인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첫째 말씀은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입니다.

둘째 말씀은 “배운 것도 아니요”입니다. 사람에게서 배우지를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 말씀을 차례대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말씀은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으로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출처, 또는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일 바울이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았다면 그 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셈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율법주의자들이 전하는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은 굳이 분간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서 자기에게 준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전한 복음의 출처나 기원은 결코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헬라어 원문에는 일인칭 대명사인 “내가”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과 누군가를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 자신과 율법주의자들을 비교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보다는,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그저 조상들의 유전을 자신들의 종교적 규범으로 삼고 따랐을 뿐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피상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5:5-6입니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기보다는, 사람이 만든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할례와 율법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사람에게서 받았다. 결국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인간의 묵상이나 생각으로 만들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상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것에 미혹을 받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 위에 굳게 서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당부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둘째 말씀은 “배운 것도 아니요”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그대로 너희에게 전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물론 바울은 과거 그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유대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인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26:5입니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아울러 그는 당대의 최고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유대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행22:3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그러나 바울이 유대교에서 배웠던 그 모든 것들은 복음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난 뒤에는 유대교에서 자기가 배웠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3:7-9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처럼 바울은 유대교에서 복음을 배웠을 리는 만무합니다. 유대교와 복음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을 혹시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에게서 배우지는 않았을까요?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복음에 대한 것을 조금 배워서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시켜서 이방인들에게 틀리게 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배웠습니까?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1:16-17입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고 난 뒤에 복음을 배우기 위해서 그 누구도 찾아가지를 않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서 만난 사도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갈2:6입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여기서 말하는 “유명한 이들”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들조차도 자기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자기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면 그 누가 자기에게 복음을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기가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유전으로 내려오는 것을 그가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직접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에는 그 어떠한 인적 요소가 들어 있지 않고 순전히 신적인 경로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어졌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주체로 보는 견해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목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견해가 모두 가능합니다. 각 견해가 나름대로의 근거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주체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갈1: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여기에 전치사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주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갈1:12에서도 같은 전치사 “말미암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계시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주체로 해석을 한다면, 예수님은 언제 바울에게 복음을 계시하셨겠습니까? 행9:4-6 말씀입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 곧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그는 그때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타내 보이신 대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목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갈1:16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에 “나타내시기를” 하는 단어가 바로 “계시한다”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그 아들 예수님을 바울 속에 나타내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다시 말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바울 속에 계시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갈1:12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목적으로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사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이전에는 그가 예수님을 알아도 완전히 잘못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열심히 핍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표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목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또 나름대로의 의미도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의견도 서로 비등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출처가 사람이 아니고,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 11절과 12절을 통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는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지금 사람에게서 받고 사람에게서 배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고, 단지 우리의 머리만 굵어질 뿐입니다. 게다가 심지어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 말씀을 받게 될 수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듣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비로소 우리에게 송이 꿀보다 더 달고 오묘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 후 바울은 오늘 본문 13-17절에서는 그것을 자서전적으로 입증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들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그릇 주장을 해왔습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을 함과 동시에 오늘 본문에서 실제로 그것을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영적 삶을 세 시기로 구분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가 구원을 받기 이전, 곧 유대교에 있을 때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3-14절).

둘째,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5-16절상).

셋째, 그가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어떻게 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6절하-17절).

바울은 자신의 삶에 있었던 일들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11절 말씀처럼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12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인지를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서 바울이 구원을 받기 이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만 살펴보고, 그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1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를 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1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자신의 연갑자들보다 유대교에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우선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지금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어떤 영향력에 의해서는 자기에게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유대교의 골수분자였던 바울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만든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만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밝힘으로서 지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며,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과연 갈라디아 교인들은 누구를 통해서 바울의 과거에 대해서 들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밝히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선 갈라디아 교인들은 소문을 통해서 바울의 과거를 들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행9:13입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바울은 그만큼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기독교인들을 심히 핍박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소문으로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하기 위해서 직접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빌3:5-6입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아무튼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핍박하다”는 단어는 시제가 미완료형입니다. 그 행위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음을 뜻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또 핍박했습니다. 바울이 바랐던 것은 교회를 잔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막 싹이 올라오는 교회를 짓밟아서 완전히 없애버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어떤 식으로 핍박을 했는가를 잠시 살펴봅시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고 난 뒤였습니다. 행8:1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8:3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행9:1-2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26:10-11을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이처럼 바울은 교회가 완전히 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리기를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이런 말씀에서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민25:6-13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아마도 그는 자신을 그 시대의 비느하스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을 하고서 기독교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가 깨닫고 보니 자기가 핍박했던 교회는 이단이 아니라, 그가 오늘 본문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교회”였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교회를 핍박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한 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더불어서 그러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15:9-1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신의 잘못되고 스치스러운 과거를 이외에도 여러 번 언급을 했습니다. 예컨대 딤전1:13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 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 뒤에 베드로는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설교를 할 때마다,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실을 자주 언급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는 롬5:20 하반부의 말씀을 우리에게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깊은 죄의식에서 더 큰 은혜를 받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1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는 바울이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행했던 두 번 째 일입니다. 연갑자라는 말은 동년배라는 뜻도 되고 동시대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유대교에 열심이어서, 유대교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 사이에 내려오는 유전에 대해서도 열심을 다해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3:5-6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이 교회를 그토록 심하게 핍박했던 것은 결국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지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열심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바울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은 얼토당토 않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수치스럽고 어두웠던 과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귀한 직분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