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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유영모목사

13. 3. 31. 부 활 로마서 6:1-11

13. 3. 31.                         부 활                     로마서 6:1-11

I. 인류 최대의 드라마: 부활


어떤 목사님이 주일저녁예배때 다른교회에 가서 헌신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설교 원고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목사님께서 “제가 설교준비를 잘 했습니다만 우리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제 서재에 와서 설교 뒷부분을 다 찢어서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길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짧게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교인들은 모두 집에 돌아갔고 강사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담임목사님들이 다과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목사님 집에 강아지 새끼 낳으면 우리교회에 한 마리 보내 주세요.” “뭐하시게요? 우리 목사님 집에 선물하게요.”


설교 원고 찢어먹는 강아지 우리 집에 보내지 않아도 제가 오늘 짧게 하겠습니다.


한국초대교회에 선교사님들이 우스개 소리를 하더라도 한국교회 교인들은 웃지를 않았습니다. 장로님들이 당황해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경건해서 늘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묵상해서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님이 그러시더랍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있습니까?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웃으십시오.”


오늘 기뻐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교를 하더라도 한 마디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설교 끝났습니다.

정히 바쁘신 분은 하루 종일 설교 들어도 그 얘기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은 장사하시는 분들의 대목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백화점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절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수많은 명절 가운데 최고의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뱀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사탄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온 땅을 죽음의 저주로 덮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난폭하게 쳐죽였을 때 사탄은 환호했습니다.

죽음의 저주가 역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멕이 ‘연쇄살상’을 저질렀을 때 사탄은 힘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세상에 이 저주가 신속히도 확산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을 때 사탄은 오른손 불끈쥐고 높이 쳐들며 판정승을 자축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 앞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탄은 흐뭇했습니다.

“보라! 온 땅은 저주의 땅이 되었다” 사탄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기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사탄은 긴장했습니다. 어떤 반격의 시나리오가 펼쳐지지나 않을지 염려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사탄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살아난 그들에게 또 다시 죽음의 망을 씌웠을 때 사탄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렇지, 살아나도 난 다시 그들을 죽일 수 있다!’


사탄은 예수를 가만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대와 유대 종교권력 그리고 가롯유다를 이용하여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고 사탄은 조롱하며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의 피가 사탄의 머리를 부수었습니다.


성경은 이미 이 사실을 창세기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그리고 3일후,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주 최대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죽음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가두었던 무덤문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돌무덤은 굴러갔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도 아직도 사망의 무덤에 갇힌 분이 계십니까?

죽음의 사슬에서 허덕이며 달려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 가운데 전해지는 복된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II. 기독교 복음의 핵심(케리그마): 십자가와 부활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 기독교의 알맹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신학자들은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입니까? 그분이 태어날 때 천군천사가 노래하고 하늘의 별이 움직입니다. 역사상 단한번 그분은 동정녀 몸에서 탄생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그러나 성탄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교훈입니까? 모든 국가 헌법의 기초가 된 모세오경과 십계명, 모든 성인을 감동시킨 산상보훈 - 이 얼마나 놀라운 메시지들입니까? 그러나 그분의 교훈이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분이 행하신 기적입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보리떡 몇 개로 오천명을 먹였던 기적들! 이 얼마나 신비한 능력입니까? 인류역사에 누가 감히 그분의 기적을 흉내라도 낼 수 있더란 말입니까? 그러나 기적 사역은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특별히 요한고난의 기간, 단 일주간의 짤막한 시간 내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는 데에 그의 복음서 절반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있었던 이 십자가와 부활을 기록하고 전하는데 모든 열정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 복음의 핵심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요 과학자였던 토마스 헉슬리 교수는 신앙인을 비웃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년, 임종을 지키던 간호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헉슬리 교수는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세 마디를 남기고 죽어 갔다고 합니다.

아! 내가 틀렸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하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군요.

나사렛 예수여 당신은 부활하시고 오늘도 살아 계시는군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와 여러분은 조금도 의심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사도신경을 외울때마다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할 때 가장 신이 납니다. 힘이 납니다. 내 영이 살아나고 설교를 듣는 심령들이 살아납니다.


III. 모든 것이 불확실하나 죽음은 확실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많을 것 같지만 그 종착점에 가보면 결국 하나 죄의 문제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어그스틴의 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피해보고자 인간은 갖가지 헛된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고 생명을 연장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한무제는 장생불사하겠다고 숭로반에 이슬을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진시황은 불노초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방삼신산에 동남동녀 오백인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일찌감치 다 죽었습니다.

·세계 도처에 영생의 꿈을 담은 “미라”가 있습니다. 이집트, 칠레, 네델란드, 중국, 소련, 북한...


현대에 와서는 그럴듯한 과학적인 근거까지 마련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뇌세포와 뇌의 구조가 잘 보존되면 심장박동이나 호흡이 멈춘 후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국 서멈(Summum) 장의사는 7천만원쯤 내면 현대판 미라를 만들어 줍니다. “엘코 생명 연장사업단” 이라는 곳에서는 1억 3천만원 정도를 받고 “미라”의 특별관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그렇게 해서 먼훗날 골동품같은 인간이 살아나면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가 이 땅에 100년을 살아도 이 짤막한 기간은 우리가 영원히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갈 천국 영생을 준비하는 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죽음과 죽음의 공포를 빼앗아 영생으로 바꿔주십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생을 얻었습니다.


IV. 부활은 실제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확실하고 실제적이듯 성도들에게 부활 또한 확실하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겨우내 메마른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겨울을 지낸 앙상한 가지에 새움이 듯, 계란에서 병아리가 깨쳐 나오듯 자연 현상의 일부로 부활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부활은 Life process 생명의 과정이 아닙니다. 유일회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을 톨스토이의 부활처럼 정신속에 살아있는 부활,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을 환생이나 소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아닙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의 아들은 죽었다가 엘리사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왕하 4:17-37).


나인 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눅7:11-17).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살 된 외딸도 죽어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할 때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고 이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하시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막5:41, 눅8:40-56).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는 죽어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나왔습니다(요11:1-44).


바울이 드로아에서 설교하는데 밤중까지 설교하니까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깊이 졸다 삼층에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바울이 그 청년을 살렸습니다(행20:7-12).


모두 놀라운 일들이고 귀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해 ‘부활’이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가 눈을 떴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아이가 곧 일어났다’ ‘죽은 자가 수건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왔다’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만 부활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소생(resuscitation)했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도 힘든데 그들은 두 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resurrection) 했고 다시는 죽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사흘만에” 이 말은 성경적으로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없는 사막에서 물을 구하지 못하고 사흘을

헤맸다는 것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간 상황을 말합니다.


사흘동안 나사로가 무덤에 누워있었다는 것은 시체가 충분히 썩을 만큼

지난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힌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죽고 시신이 상한 상황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당시 퍼져있던 기절설, 환상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 이것이 복음의 일성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케리그마입니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부활논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 형태가 어떠하냐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속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구원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부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를 지옥의 권세,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V. 말씀을 맺으며


영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소년이 새장의 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소년에게 “얘야 너 그 새를 어찌하려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좀 더 괴롭히다가 싫증나면 죽여 버리지요.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새 내게 팔지 않으련?” “백달러를 주면 팔지요.”

소년은 농담으로 말합니다. 새 한 마리를 백달러에 살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은 백달러를 주고 그 새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설교시간에 그 새장을 들고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새 한 마리에 거금 백달러를 주고 산 새장을 교인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망과 저주의 새장에 가두고 괴롭히는 마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마귀가 대답합니다.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갖고 놀다가 죽여 버리지요. 뭐.”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되겠느냐?” 마귀가 웃으면“이것들을 사서 뭘 하시려고요?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반한재가 아닙니까? 그래도 사시겠다면 당신의 외아들 예수의 목숨을 내어 놓으세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목숨을 내어주고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천국을 훨훨 날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게 구원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예수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네 죄를 사하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가 영생을 얻어 다시 살아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