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눅 13:1-5)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저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여러분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마침내 죽으리라는 사실을 다들 잘 압니다. 단지 우리가 언제 죽을지를 정확하게 모를 뿐입니다.
왜 사람은 죽어야만 합니까? 시51:5 말씀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은 죄 중에서 잉태되어 죄악 중에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잉태될 때부터 죄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롬6:23 말씀과 같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해야만 합니다. 단지 언제 죽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죽을 수도 있고, 어린 시절에 죽을 수도 있고, 나이가 많아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실로 위험한 곳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으며,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또한 이 지구상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고, 지진이나 화산폭발이나 태풍 등등의 재난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병에 걸릴 수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예기치 않은 재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의 시한부 인생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급선무가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눅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때도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눅12:58 말씀입니다.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반드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59절 말씀입니다.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서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벌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무리 가운데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최근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아뢰었습니다.
그 내용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판을 주제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아뢴 사람들의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살해당한 것도 하나님의 심판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 때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극악무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러다가 주후 칠십 년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빌라도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 유월절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빌라도는 그들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로마에 반란을 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군병들을 보냈습니다. 반란을 꾀하던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군병들은 그들을 급습해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했습니다. 그 때 살육당한 자들의 피는 그들의 제물에 뒤섞여 피비린내를 풍겼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도 끔찍한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의문이었습니다.
눅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바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해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예컨대 욥이 곤경에 처했을 때입니다. 욥22:4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이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욥을 향하여 조롱조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인 욥22:5 말씀입니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욥이 해를 받은 것은 그의 악이 크고, 그의 죄악이 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엘리바스가 했던 말이 바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그가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해를 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최근 예루살렘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유대인들은 사람이 죄 값으로 해를 받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시며, 그들의 전통적인 생각을 부인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여기지를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해 받은 사람들을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도 이와 같이 망하기 전에, 반드시 회개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해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병에 걸리거나, 뜻밖의 사고를 당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해를 받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이고, 해를 받지 않는 우리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죄 중에서 잉태됩니다. 모든 사람은 잉태될 때부터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해를 받아 마땅합니다. 따라서 왜 어떤 사람이 해를 받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해를 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입니까? 어찌 나 같은 죄인이 해를 받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물어야 할 합당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시면서, 더 나아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해를 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해를 받지 않고 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그러기에 벧후3:9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렇듯 우리가 해를 받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도, 또한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의 전에 오른 것도 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가운데는 단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진 사고입니다.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이 해를 받으면, 이는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빌라도가 성전에서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추가적으로 하나의 예를 더 드셨습니다. 바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진 사고였습니다.
앞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한 것은 인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반면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진 것은 자연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해를 받는다는 결과적인 면에서는 인위적인 사건이나 자연적인 사고나 둘 다 동일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실로암은 예루살렘 남쪽 벽과 동쪽 벽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못의 이름입니다.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기혼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샘은 물이 풍부했습니다. 그 샘에서 나는 물을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내에 물을 모아놓은 저수지가 바로 실로암 못이었습니다.
실로암에 저장된 물은 인공적으로 만든 여러 갈래의 수로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내 곳곳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실로암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워서 늘 그 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그 때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로 열여덟 사람이 치어 죽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하다가 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해를 받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때의 사고를 언급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시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해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을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이번에는 아예 예루살렘 사람들이 해를 받은 경우를 예로 드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늘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해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못에서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그 사고로 열여덟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해를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인하셨습니다.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죽은 열여덟 사람은 죄가 있는 나쁜 사람들이며, 사고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죄가 없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색출해내셔서, 그들을 사고로 심판하지는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고를 당한 사람은 죄인이고,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어떤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사고로 인해 해를 받은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고를 거울삼아서, 각자가 회개할 기회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각종 사건과 사고 소식을 쉴 새 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해를 받은 사람은 죄인이고, 해를 받지 아니한 우리는 의롭다고 여기지 맙시다. 우리가 해를 받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까? 다시 한 번 벧후3:9 하반부에 있는 말씀을 읽어봅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딤전2:4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로, 시한부 인생의 진정한 참사입니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5절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날짜와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우리 모두는 똑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참사는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참사는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참사는 회개하지 않고 망하는 것입니다. 이 때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겪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것은 아닙니다. 히9:27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아니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관건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고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참사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옳겠습니까? “우리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죽어야 되겠지. 그러니 저런 일을 당하기 전에 얼른 회개해야지. 아니면 우리도 이와 같이 망하겠구나.”
여기서 “이와 같이”라는 말은 같은 사건이나 같은 사고로 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뜻밖의 사건이나 사고를 당하기 전에, 미리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회개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회개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는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만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을 미워하여 그를 목 베어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미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렇듯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회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어.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전연 없어. 그러니 나는 떳떳해.” 이런 생각을 가지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즉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를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죄 중에서 잉태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회개하려면, 우리가 죄인임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회개의 또 다른 한 가지 요소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죄를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눅24:46∼47에 있는 말씀처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내리신 결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물론 이 때의 망한다는 말씀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려면, 우리가 회개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요지입니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사고들의 의미를 이해하셨습니까? 해를 받은 사람이 우리보다 죄가 더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3:16 말씀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어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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