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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국에서 큰 자-마 18:1~10(어린이날)

천국에서 큰 자

 

마 18:1~10

 

나이지리아의 노예시장에서 한 어린 아이가 담뱃잎 한 포대와 교환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도 노예로 팔려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노예 상인들은 어린 아이를 노예선에 태워 미국으로 향합니다. 미국으로 가던 중 불법노예선임을 알게 된 영국 군함에 의해 나포되었습니다. 군함의 군목은 수백 명의 노예들 속에서 총명하게 보이는 그 어린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양자로 삼아 철저한 신앙훈련과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나이지리아 교회 최초의 감독 취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취임하는 감독은 세계적 성서학자이며 민족의 지도자인 사무엘 크로우더(Samuel crowther)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30년전 노예선에서 군목에게 양자로 선택을 받았던 그 어린 아이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한 어린아이가 훌륭한 양부모를 만나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 어린 아이의 인생이 어른들이 어떻게 대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회학자가 말하기를 지나간 19세기가 여성을 발견한 세기라면,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그전까지는 어린이가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으로 간주되기보다는 부모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0년대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로 있을 때 어린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방정환(方定煥)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다음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어린이 즉 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 1921년의 일이었으며, 192251일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하고, 1923년에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 그해 51일 아동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창설하게 되는 데 이것이 어린이날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던 어느 날,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시던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서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라는 논쟁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천국백성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한 샘플로 어린 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고 교훈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통한 천국 백성관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돌이키는 자회개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어린 아이가 있는 곳에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돌아섬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속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교훈도 동시에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첫째로 낮추어야

어느 날 랍비가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가 묻기를 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여기의 낮추다의 헬라어 타페이노오는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멸시와 천대와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겸손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진리를 행하면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모욕과 조롱을 받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걷는 것이 자기를 낮추는 삶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고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예배당에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아서 서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러 가는데 교만하게 서서 들어가지 않고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야 만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낮추어야 갈등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출 때 가정과 교회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 주십니다. 자신을 낮춤으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영접하여야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밤낮 청소만 시켰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따졌습니다. “스승님, 이제 무엇인가 가르쳐 주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스승이 질문을 합니다. “저기 돌벽 뒤에 엄청나게 많은 금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돌벽으로 막아 두었으니 어떻게 꺼낼텐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벽을 깨고 꺼내면 되죠.” “맞아, 금괴를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지. 그러면 질문 하나를 더 하겠다. 독수리 알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생명을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제자가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품어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기다려주어야 됩니다.” 품어주고 사랑해주면 그 속에 생명이 자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평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비난하면 신이 납니다. 마치 망치를 들고 달걀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비평한다지만 실제로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비판 잘하는 것이 똑똑하다는 증거라고 착각하면 결코 안 됩니다. 비판으로는 절대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품어주고 영접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어린 아이는 자신을 낮추고 예수의 모습을 닮아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연약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 받는 것은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은 예수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무엇을 하든 예수를 향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영접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약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경멸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자신이 초라해 집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으로, 가난한 사람이 부자로, 건강하던 사람이 병자로, 병든 사람이 건강해 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배려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 때 행복이 있고 존경 받고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욕심을 부리고 빼앗고 나누지 못하면 결국 빼앗기고 잃어버립니다. 후회와 고통만 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영접하라환영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여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귀히 여겨야

오토다케 히로타다(乙武洋匡) 오체불만족이란 책이 있습니다.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4학년이었던 그는 선천성 사지 절단증을 가지고 있는 장애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10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쓸 때에도 뺨을 의지해야 쓸 수 있습니다. 종이를 자를 때에도 가위 한쪽을 입으로 물고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밖에 안 되는 팔로 농구를 하고, 야구를 하고 또 10밖에 안 되는 다리로 축구도 합니다. 또 겨드랑이로 턱걸이도 하는 등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언제나 밝게 다녔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과 장애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밝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부모가 그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작은 자에게 있기에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반드시 작은 자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작은 자를 사랑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중세 시대 한 성당에서 찬양대원들이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어린 아이가 지휘자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니?” 지휘자가 물었습니다. “찬양대원이 되고 싶어요.” 어린 아이의 대답에 지휘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찬양대는 어른만 하게 되어 있단다. 어린 아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너는 안 되겠다. 네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자 이 당돌한 어린 아이는 맑은 눈빛으로 지휘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지휘자님,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요.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왔어요.”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고백을 들은 지휘자는 감동을 받고 어린 아이를 찬양대원으로 발탁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찬양도 탁월하게 잘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자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 작곡한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만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도록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온전히 세워 가실 것입니다. 부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섬기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신앙으로 성장시키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자를 귀하게 여김으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복을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2-05-05

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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