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 남은 기간 꼭 해야할 일이 있다면/사도행전 1:1-8
장자옥씨의 [마지막 남은 생명]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두명의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 몇 사람을 죽였고, 또 한 사람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분노를 참지 못해서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중 첫 번째 사람은 죽기 전에 고기를 실컷 먹고 싶었답니다. 그렇지만 돈도. 사식을 넣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결과 자기의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기로 하고 선금 10만 원을 받았답니다. 죽기 전에 실컷 먹고 싶었던 고기를 주문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고기지만 3만 원어치 이상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가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옆 친구가,“야. 그거 맛있겠구나.”하니까.“맛은 무슨 맛. 내 몸뚱이를 팔아서 먹는 고긴데”하면서 숙연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총재산이 15,000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도 이것 가지고 먹을 것을 실컷 사 먹을까 궁리하다가. “마지막 남은 생명인데 무엇인가 좋은 일 한 가지는 하고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어느 교회 성가대가 위문차 왔습니다. 함께 오신 전도사님께 “무엇인가 좋은 일에 사용해주십시오”하며 15,000원을 건네드렸습니다. 이 돈을 받은 전도사님은 '어떤 좋은 일에 쓸까' 궁리하다가, 마침 그 교도소 교회당을 새로 짓고 헌당을 하게 되어 부족한 돈을 더해서 아담한 강대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헌당식 날 그 사연이 알려지면서 뭇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수에서 감형되어서 무기징역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1999년이 26일 남았습니다. 26일 후면 새로운 천년이 시작됩니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꼭 이것만은 하고 새천년을 맞이하여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우리에게 26일밖에 인생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남은 기간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은 마지막 생을 어떻게 보내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40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에 나온 것처럼 부활하시어 마지막 지상 사역을 마치는 것도 40일로 마치게 됩니다. 이 40일 동안 하신 사역에 대하여 3절은 요약하기를 먼저 제자들에게 많은 증거로 부활을 보여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였습니다.
만약 한 천년이 26일 있으면 끝나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마지막 이것만은 하라고 부탁하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해야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천년의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부탁하신 이 명령을 준행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 부르심의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훈련시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유언의 말씀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1.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1-2).
지난 10월 17일자 뉴욕타임스(NewYork Times)는 지난 세기를 정리하면서 '서양역사에서 지난 천년은 인간이 신이나 국왕보다 자기 자신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연대였다'라고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지난 천년은 '나 밀레니엄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적어 놓기를 'The me millenium'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나 나를 찾았지만 하나님을 잃어 버렸고 이웃을 잃어 버린 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 문화, 인권을 찾기에 애를 쓰며 욕망을 마음껏 누려보려고 했으나 관계를 상실하는 시대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귀중성이 상실되고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는 시대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예쁜 아가씨들이 난자를 판다고 광고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 장기 부품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자도 판다고 광고할 것입니다. 간공장이 생기고 심장 공장이 생길 줄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의사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누가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1)행하신일 2)가르친 일 3)승천 날까지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왜 기록했습니까? 누가복음 1:4절에 보면"이는 각하로 그 배운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데오빌로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없는 것을 알고 다시 사도행전을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개인적으로 찾아 가십니다. 우물가의 여인, 세리, 굶주린자, 방황하는 자를 찾아가십니다. 단체로 대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에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숫자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숫자로 취급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귀중성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장 3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의 가치를 온 우주,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광인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돼지 2천 마리를 아낌없이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무엇을 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해야하겠습니까? 생명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가시다가 낯익은 청년 한 사람이 술에 만취된 채로 인사불성이 되어 혼자 지껄이며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부지런히 일할 시간에 일은 하지 않고 왜 이렇게 술에 취해 있느냐”하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절뚝발이였는데 당신이 나를 고쳐 주었기 때문에 전에는 빌어먹는 거지였으나 지금은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기분 좋게 술을 마신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후 조금 더 나아가 보니까 어떤 여인이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화려하게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그 뒤를 어느 한 남자가 추파를 던지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접근하여 “여보십시오, 왜 그렇게 여자만 따라다니시오?”하고 물었더니 “선생님, 나는 본래 소경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나를 고쳐주셨기에 이 눈으로 아름다운 여성을 보니 자꾸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따라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정 그 영혼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겉모습만 변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남편에게 집중하고 아내에게 집중하고 부모에게 집중하고 자녀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니카가 아들 어거스틴으로 고심하며 눈물 흘릴 때 암브르스는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바울 한 사람이 변화하니까 유럽이 변화됩니다.
AD 60년경에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마게도냐를 건너서 유럽을 향해서 복음을 들고 갑니다. 복음이 아시아에서 출발했만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유럽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 교수는 "바울이 유럽으로 갈 때에 아시아의 복을 다 유럽으로 옮겼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한 나라도 남김없이 2천년동안 큰 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2.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육체적인 힘이 있으면 힘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힘이 있으면 어려운 문제도 풀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영적인 일을 하는 것은 육체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힘으로 부족합니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은 성령의 능력으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에 대하여 네차례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2,4,5,8).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바울도 고린도 전서 2:4-5절 에도보면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
골1:29절에서 성령님의 힘으로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강팍한 불신자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고 저주하던 베드로도 오순절을 통해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행2:41). 앉은 뱅이가 일어납니다(3:6). 5천명이 회개합니다.
D.L 무디는 비록 그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성령의 권능을받아 일생 동안 5천만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목동 요셉도 성령의 힘으로 했습니다. 바로가 신하들에게 요셉이 성령에 감동한 사람(즉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창41:38)"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삼손이 그렇게 위대한 힘을 발휘할수 있었던 것도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삿14:06)"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3. 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란 "확신을 가지고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이란 행동으로써 말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은 복음을 순교자가 될 각오를 가진 자입니다. 헬라어에서 증인이란 말은 "마르투스"인데 이 말은 "순교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증인이란 언제나 복음을 위해서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세계를 품어야 합니다. 2)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3)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합정동에 가보면 한강변으로 양화진이라고 곳이 있습니다. 거기 가보면 절두산이 있고 그 뒤쪽으로 외국인 묘지가 있습니다. 기회있으면 한번 가보셔서 그곳 비석이 쓰여있는 글들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이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395명이 순교하여 거기에 묻혔다고 합니다.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캐나다, 호주, 등 10여개국의 선교사들이 그곳에 묻혀있습니다.
가난한 나라, 소망없는 나라,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와서 그들은 피를 흘리며 교회당을 짖고 학교와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칼에 맞아, 병에 걸려, 갖은 핍박을 당하며 대한 민국 국민을 사랑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중 캔드릭 선교사의 묘비에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라고 써있습니다. 그렇게도 이 나라를 사랑하였습니다. 1886년 스물 네 살 처녀로 오신 엘리스라고 하는 선교사는 이곳에 와서 일생을 바치고 정신여고를 세워 훌륭한 여성 교육의 명문 학교로 남겨 놓았습니다.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
장로교의 창시자 죤 낙스는 "조국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복음은 위해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를 보내었지만 러시아는 어떠했습니까?
러시아의 최후의 날에 대해서 톨스토이가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볼때 러시아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황족으로부터 귀족된 모든 국민들이 다 교인입니다. 왜 당시 종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거의가 다 교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취직이 되질않았고 증명서 발급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황금시대에 거리에도 성경지명을 따라 이름을 지어 장사하면서 간판도 성경의 이름으로 지었고, 음식이름도 성경에 나오는 식물이름으로 따서 음식을 팔았다고 합니다. 기독교 황금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귀하게 보시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당시 교회는 지붕위에 십자가를 금으로 만들고 예배당을 금으로 장식하고 화려하게 또 할일이 없어서 성직자들은 모여서 회의한다며 모여 싸움을 했습니다. 축도를 하는데 축도하는 손은 60도를 할것이냐 70도로 할것이냐 80도 혹은 90도로 할것이냐 하며 싸움을 했습니다. 성찬식을 하는데 떡을 자르는데 5센치냐 6센치냐, 포도주 양도 적게 하느냐 많게 하느냐 언제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때는 선교할 때이며, 내가 너희에게 힘을 준것은 이 기쁜 소식을, 복음의 소식을 전하라고 한것인데, 밤낮 싸움이나하고, 온 백성들은 사치하고 방종하고 죄를 짓고 낭비하고 그래서 결국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혁명이 생기면서 공산화가 되었고 황족들 귀족들이 수백 화차에다가 금은보화를 실고 살길을 찾아서 영하40도가 넘는 시베리아로 달려가다가 다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많이 복을 받았습니다. 국민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농부들도 논에서 일하다 핸드폰으로 "김양 여기 커피 석잔"라고 시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이 나라 이 교회에 이런 복을 주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하지 않으니까 강제로 흩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한번 우리는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내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 자신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화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내 인생이라고 긴박감을 가져 보십시오. 무엇을 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깁시다. 그들을 변화시키려면 내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좁은 가슴으로 웅크리지 말고 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 남은 기간 꼭 해야할 일이 있다면/사도행전 1:1-8/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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